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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촬영한 덕유산의 설화 사진. 지리산의 겨울 풍경과 많이 닮아 있다.
지난 주에 촬영한 덕유산의 설화 사진. 지리산의 겨울 풍경과 많이 닮아 있다. ⓒ 김정수
급하게 몇 발 내려서는 순간 낙엽 위를 밟은 오른발이 바위 틈으로 빠져버렸다. '악'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지만 재빨리 내려와 등산로로 복귀했다. 쉴 곳을 찾은 다음 배낭을 벗고 바지를 올렸다. 무릎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무릎 안쪽에 상처가 심하게 났다. 배낭을 뒤져 과산화수소로 소독한 다음 머큐룸을 발랐다.

보름달이 없었다면 그대로 하산해 민박을 하려고 했을 것이다. 무릎의 통증도 문제지만 시계가 없어 컨디션 조절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등산을 할 때 30분 간격으로 5분 정도 휴식을 취한다. 10분쯤 걷자 무릎의 통증도 잊을 수 있었다.

유암폭포에 도착하자 한결 안심이 되었다. 물줄기 양 옆으로 주렁주렁 매달린 고드름이 달빛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듯했다. 이내 헤드랜턴은 건전지가 다 되어 달빛속에 불빛이 묻혀버렸다. 적어도 10시는 넘었다고 봐야 한다. 비상용 손전등이 하나 더 있지만 1시간 30분 정도 밖에 여유가 없었다. 지대가 높아진데다 나무가 별로 없어 달빛만으로 산행이 가능해졌다는 게 다행이었다.

하지만 바람이 언제 구름을 몰고 올지 모를 일이라 서둘렀다. 1시간쯤 지났을까? 험한 길은 다 지나고 이제 30분만 가면 도착할 수 있다고 잠깐 딴 생각을 한 사이 나는 엉뚱한 곳에 서 있음을 느꼈다. 눈이 많이 덮여 길을 잘못 든 것도 모르고 계속 걷다보니 나무가 많이 우거져 헤쳐 나가기가 어려웠다.

벌써 이 코스가 여덟번째인데도 길을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더군다나 나는 시계도 나침판도 없다. 시계만 있어도 달그림자로 방향을 알 수가 있는데 말이다.

"누구 없어요, 도와주세요" 하고 고함을 쳐봤지만 이 늦은 시간에 내 목소리를 듣고 쫒아올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점점 초초해졌다. 배낭을 풀어놓고 길을 찾은 다음 라면을 끓여 먹기로 했다.

잠을 자도 될 만큼 바위 틈이 넓고 높이가 낮은 곳을 발견하고는 그 안에 배낭을 던져 넣었다. 그리고 그 앞에다 나무를 꺾어서 쌓아두었다. 나중에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길을 찾아 나아가면서 나뭇가지를 꺾었다. 그러다가 손이 아파서 나무막대기로 눈 위에 화살표를 그려 바위의 방향을 가리켰다.

10분이 지나도록 길을 찾을 수가 없어 되돌아가려 했으나 눈 위에 그려놓은 화살표는 바람에 날아갔는지 눈에 띄지 않았다. 30분 이상을 헤매도 바위를 찾을 수가 없었다.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배낭을 못 찾으면 얼어 죽을 판이다.

'하느님, 제발 도와주십시오. 배낭만 찾으면 저는 어떻게든 살 수 있습니다. 2년 동안 지리산만 돌아다닌 놈입니다. 여기서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구요.'

종교를 안 믿는 나지만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2년 동안 40번 정도 지리산을 찾았지만 눈 덮인 산에서 밤에 길을 잃은 데다 배낭까지 없으니 나로서도 속수무책이었다.

1996년 설연휴 때 지리산 종주하던 필자의 모습. 그때도 무척이나 힘들었는데 사진을 보니 지금보다도 나이들어 보인다.
1996년 설연휴 때 지리산 종주하던 필자의 모습. 그때도 무척이나 힘들었는데 사진을 보니 지금보다도 나이들어 보인다. ⓒ 김정수
'달님, 도와주십시오. 보름달이 너무 밝아 달님만 믿고 올라 왔습니다. 제발 배낭있는 곳만 찾을 수 있게 도와 주십시오.'

하지만 나의 기도는 허사였다. 그렇게 헤매다 지친 나는 바위 틈에 몸을 숨기고 잔뜩 웅크린 채 앉아 있었다.

'정수, 잠들면 죽어, 제발 정신 차려.'

이렇게 속으로 고함치며 잠이 들지 않도록 크게 노래를 부르기도 하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그것도 잠시, 이내 잠이 들었다. 부모님이며 동생들 얼굴이 지나가는 통에 화들짝 잠이 깼다. "드드드득" 이가 떨리고, 온몸에 한기가 느껴졌다. 기침을 해대기 시작하고 무릎의 상처 부위도 얼어붙는 것 같았다.

아까 다쳤을 때 압박붕대를 하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사장님이며 직장에서 같이 일하던 사람의 얼굴이 차례로 스쳐 지나가고, 친구들의 모습도 나타났다 사라졌다.

'죽을 때가 되면 가까운 사람들 얼굴이 나타난다는데 내가 이대로 죽는단 말인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순간 나는 몸을 뒤져 볼펜을 찾아냈다. 그리고 며칠 전에 받은 월급봉투 위에다 유서를 쓰기 시작했다.

'어머니, 아버지 너무 춥습니다. 배도 고프고요, 그나마 달빛이 있어 다행입니다. 이 근처 바위 틈에다 배낭을 두고 길을 찾다가 배낭마저 찾지를 못했습니다. 배낭만 찾으면 사람들이 일출 보러 올라가는 시간까지 버틸 수 있어 구조가 될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만약 제가 죽게 되면 화장을 해서 장터목 산장에 뿌려주세요.'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써보는 유서였다. 손이 얼어서 더 쓰기도 어려웠지만 봉투에 여백이 없어 이렇게만 적었다. 10분쯤 더 떨다가 이 나이에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발과 양말을 벗어 발을 문지르고 무릎은 목도리로 감았다. 그래도 모자, 목도리, 귀마개와 장갑이 추위로부터 나를 보호해주고 있었다.

바위에서 나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까 배낭을 놓은 곳과 비슷한 바위만 찾으면 살 수 있을 거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10분 정도 헤맨 끝에 너무나 완벽한 바위를 찾아냈다. 바위 틈이 직사각형에 가까운데 그 중앙을 둥그스름한 바위가 막고 있어 머리가 겨우 들어갈 정도였다. 바위가 꼭 고인돌 모양을 닮아 있었다. 입구 앞을 바위가 막고 있어 한낮에 10미터 앞에서 쳐다보아도,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머리를 먼저 넣고 그대로 누웠는데 허리 부분부터 폭이 좁아지면서 바위 바닥이 높아졌다. 바위 윗부분은 일직선이라 그렇게 이상적일 수가 없었다.

내가 들어서자 바위가 꽉 차는 느낌이었다. 이내 잠이 들었다. 두 시간쯤 잤을까? 발이 시려워서 잠을 깼다. 신발을 벗어 손으로 발을 비비기 시작했다. 오른쪽 양말이 흠뻑 젖어 있어서 벗었다. 양말을 뒤집어서 배에 품었다. 그리고 목도리로 오른발을 칭칭 감은 다음에 다시 잤다. 체온만 유지하면 얼어 죽지는 않을 것 같았다.

1995년 겨울 유암폭포의 모습. 2003년 태풍 루사로 인한 집중호우로 바위가 메워 지금은 폭포의 모습을 볼 수 없다.
1995년 겨울 유암폭포의 모습. 2003년 태풍 루사로 인한 집중호우로 바위가 메워 지금은 폭포의 모습을 볼 수 없다. ⓒ 김정수
그러다가 심한 바람소리에 잠이 깼다. 고개를 내밀어보니 뿌연 안개가 달을 삼켜버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른발에 쥐가 났다. 목도리를 풀었다. 배에 품었던 양말이 말라 있어 다시 신었다. 그렇게 바람이 심하게 불어대도 그 요새 같은 바위 덕분에 추위를 거의 못 느끼고 잘 수 있었다. 서너 차례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가 붉은 기운에 잠이 깼다.

안개속에 붉은 물감을 뿌려놓은 듯 붉은 불기둥이 올라오고 있었다.

'아 이제 살았구나.'

나는 추운 줄도 모르고 밖으로 나와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지리산 천왕봉을 비롯해서 여러 차례 일출을 보아왔지만 그 어느 광경보다도 장엄했다. 이건 내가 살아있음의 확인이요, 이제 구조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감기조차 걸리지 않았다는 게 신기하게 여겨졌다. 해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자 붉은 기운은 서서히 사라지고 하얀 해만이 안개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이내 안개는 걷혔다.

해가 뜨는 방향과 주위를 둘러보고는 장터목에서 세석쪽으로 흘러들어 왔음을 알았다. 30분 정도 내려가면 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섰다. 주위를 몇 바퀴 둘러보다가 배낭은 포기하고 내려가기로 했다. 침낭이며, 코펠, 버너, 카메라 등 고가의 장비지만 찾는다 해도 지고 갈 자신도 없었다.

지팡이를 짚고 눈속을 헤치며 20분 정도 내려간 나는 "야호"하고 함성을 질렀다. 서너 번 고함을 치자 "야호"하는 대답이 들렸다. 신나게 내려간 나는 잠시 후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시간을 물어보니 8시 20분이라 했다. 부산에서 왔다는 아저씨의 도움을 받으며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곡이 나타나자 아저씨는 잠시 쉬자며 음식을 만들었다. 꽁꽁 얼은 김밥을 물에 넣어 끓이고 카레와 섞어서 주었는데, 입에서 살살 녹는 게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한결 기운이 나는 듯했다. 하지만 배낭을 메고 올라오는 것보다 지팡이에 의지하며 빈 몸으로 내려가는 게 더 힘들었다. 찬 바위 위에서 잔 때문인지 목이며 허리가 아파왔다. 무릎의 상처 부위도 얼어서 통증이 심했다.

그래도 유암폭포까지는 수월하게 갔다. 유암폭포에서 칼바위까지 가는데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보통 1시간 20분 정도 걸리는 구간이다. 칼바위에서 아저씨랑 잠시 쉬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하지만 그 이후론 아저씨를 만나지 못했다. 아저씨가 앞서가고 나는 조금 더 쉬다 출발했는데 무릎의 통증이 악화돼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버스정류소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1시였다. 부산아저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는데 미리 연락처를 알아두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숱하게 지리산을 올랐지만 이렇게 일찍 하산한 적이 없어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미련 때문에 천왕봉을 몇 번이나 돌아다보며 버스에 올랐다.

* 1996년 12월의 산행기로 제 홈페이지 출발넷 www.chulbal.net 에 실린 글이다. 이제껏 내가 여행다니면서 가장 위험하고 아찔했던 순간으로 기억된다. 이 일로 인해 나는 일주일간 허리와 무릎의 심한 통증으로 무지 고생하여 한동안 등산을 할 엄두를 못냈다. 하지만 3개월 후부터는 다시 등산을 시작해 지금까지 지리산에만 80차례 이상 다녀왔다. 그때의 악몽탓에 겨울철에는 지리산에 잘 안 가게 되어 지리산의 설경을 담은 사진이 거의 없다.

 

덧붙이는 글 | 김정수 기자는 여행작가로 홈페이지 출발넷(www.chulbal.net)을 운영중이며, CJ케이블넷 경남방송 리포터로 활동중이다. 저서로는 <주말에 떠나는 드라마 & 영화 테마여행>, <남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섬진강>, <남성미가 넘쳐흐르는 낙동강> 등이 있다. 
일본어 번역판인 ‘韓國 ドラマ & 映畵ロケ地 紀行’이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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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작가로 남해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금오산 자락에서 하동사랑초펜션(www.sarangcho.kr)을 운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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