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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화를 기원하지 않는다>
<나는 평화를 기원하지 않는다> ⓒ 지형
이 책은 전자에 해당하는 책이다. 끊임없는 분쟁으로 참혹한 전쟁을 겪고 지금도 그 후유증을 앓고 있는 지역에 조명을 비추어 무엇이 그 전쟁을 일으켰는지, 그 과정은 어땠으며 그 후 어떤 상태로 지금까지 왔는지를 세세히 보여준다.

못 사는 나라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내전, 끔찍하고 야만적인 학살. 시에라리온이나 캄보디아 같은 나라에 대해 우리가 어렴풋이 갖고 있는 이미지다. 그러나 우리는 모르고 있다. 그 전쟁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누구의 이익을 위해 죽어갔는지, 그 후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9시 뉴스의 말미에 등장하는 '시에라리온, 내전으로 000명 사망' 이라는 한 줄 뉴스를 듣고 그저 어딘가에서 또 싸움이 벌어졌겠거니 하고 무감각하게 넘어갈 뿐이다. 이 책은 그런 한 줄짜리 뉴스 혹은 가끔 신문 국제면 한 귀퉁이를 차지하는 낯선 나라의 낯선 이야기들을 우리 가까이로 데리고 온다.

그렇다면 2003년 12월에 샤론총리가 일방적으로 가자지구 철수안을 발표해 세계를 놀라게 한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팔레스타인에서 만난 현지 지식인들은 샤론 총리의 가자 지구 철수 제안이 기만적이라며 의구심을 풀지 않았다. 가산 카티브 팔레스타인 노동부 장관은 나와 인터뷰 하면서 "서안 지구 곳곳에 이미 마구 들어선 유대인 정착촌들을 이스라엘 영토로 편입하겠다는 장기적 전략에 비추어보면 가자 지구 철수는 아주 작은 양보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지적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화해무드 조성에 힘쓰는 온건한 총리쯤으로 알고 있던 이스라엘 총리 샤론에 대해 팔레스타인에서 돋보기를 갖다대자 이런 모습이 나왔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샤론이 온건한 화해주의자라고 생각했던 것도 어디선가 읽었던 신문 기사 한 단락 때문이었다. 그 신문기사 자체도 미국의 주류언론기사를 상당수 인용한 것이었다.

주민들의 시선으로 사건 대할 수 있어

저자는 분쟁지역에 대해 일목요연한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한다. 1)누가 왜 싸우나 2)사망자는 3)난민은 4)지금은 이라는 네 가지 정황을 제시한 후 끝에 간략하게 그 나라의 면적, 인구, 종교상황을 덧붙인다. 이렇게 분쟁지역에 대한 대략적 개요를 가지고 본문으로 들어간 독자는 그 전쟁의 각종 정치적 원인들, 전쟁이 진행되면서 일어났던 무자비한 학살들 그리고 전쟁이 어떻게 종료되었으며 그 후 그 지역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생생한 리포트를 들을 수 있다.

대부분의 진술은 객관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간에는 그 분쟁의 핵심 당사자가 되었던 인물과의 인터뷰를 삽입하여 생생한 현장감을 주고 있다. 현장을 찾아가 발로 뛰며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썼기 때문에 이 책은 기존의 고정적 시선에서 자유롭다. 독자들도 주로 서구 거대언론에 의해 형성된 기존의 일방적 시선에서 조금씩 풀려나와 그 지역 주민들의 시선으로 사건을 대할 수 있게 된다.

언론의 주술에서 풀려나와 대면하게 된 진실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잔인하다. 하루아침에 팔레스타인을 점령해 그 땅에 살고 있던 이들을 몰아내고 분리장벽을 세우는 이스라엘 사람들, 순전히 다이아몬드를 통한 이권을 챙기겠다는 욕심으로 어린애들의 손목까지 서슴없이 도끼로 잘라버리는 시에라리온 반군들, 반미와 공산정권 수립이라는 구호아래 인구의 1/4도 넘는 국민들을 서슴없이 죽인 캄보디아 폴포트 정권, 서로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 인종을 가차없이 '청소'해버렸던 세르비아인들.

지구상 곳곳에서 일어났던 무자비한 대량살육 장면들을 보면 그리고 그런 살육이 겨우 누군가의 금전적인 이득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차라리 눈을 감고 외면하고 싶어진다. 인류가 그토록 잔인한 종족이었단 말인가.

대량살상의 배후에는 어김없이 미국이

개개인의 탐욕에서 출발했던 이 대량살상의 배후를 파고 들어가 보면 어김없이 만나게 되는 한 나라가 있다. 이 시대의 최고의 강국, 전 세계의 정의를 지키는 경찰이라 자부하는 나라. 바로 미국이다. 미국은 유엔이 팔레스타인을 무단 점령한 이스라엘에 대한 비난결의안을 낼 때도 기권하면서 뒤에서 은근히 이스라엘에 무기를 대주었고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소위 호치민 루트’를 막기 위해 캄보디아에 무차별 공습을 가했다(이 사실은 공식적으로는 지금도 부인되고 있다).

혁명아 체 게바라가 남미에서 반미 구호를 높이며 혁명을 수출하기 시작하자 놀라 재빠르게 개입한 후 그의 즉결처형을 배후조종했다. 이라크처럼 풍부한 석유가 매장되어 있는 나라의 경우에는 있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를 핑계 대며 직접 공격에 나서기도 했다.

반면 이해관계가 전혀 없는 나라의 내전에 대해서 미국은 180˚다른 태도를 보인다.

무장 집단이 전쟁범죄를 저질렀어도 평화협정으로 사면되는 상황은 무엇을 말하는가. 여기에는 미국과 영국 등 서방 국가들의 안이한 정치적 판단이 작용했다. 미국은 시에라리온과 이렇다 할 이해관계가 없다. 인권 차원의 개입을 해봤자, 1993년 소말리아에서처럼 정치적 불이익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세계의 경찰을 자부해온 미국이지만 시에라리온 내전은 석유가 걸린 걸프 전쟁이 아니다. 그렇기에 유화책을 펴기에 급급했다.

타국에 대한 내정간섭이나 침략의 이유로 미국이 즐겨 내세우는 '인권'은 자국의 이해관계가 걸렸을 때만 중요한 이슈가 되는 것이다. 이권을 쫓아 잔인한 학살을 슬그머니 종용하는 것은 비단 미국만이 아니다.

유엔에서는 아프리카 분쟁 지역의 '피 묻은 다이아몬드'가 반란군들의 자금원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애써왔다. 유엔 안보리는 무기 금수(수출 금지)등의 제재조치를 여러 차례 결의했다. 시에라리온의 다이아몬드 밀거래 배후에는 라이베리아의 전 독재자 찰스 테일러가 있었다. 테일러 자시도 무장 반란 끝에 1997년 대권을 쥔 인물이다.

그는 시에라리온 반군 RUF의 다이아몬드 밀수출을 돕고, 무기 밀거래를 뒤에서 지원해 왔다. 그러나 라이베리아의 반군에 밀려 2003년에 나이지리아로 도망쳤다. 테일러는 유엔이 지원하는 시에라리온 특별법정에 전쟁범죄자로 기소되어 있다. 다이아몬드 밀거래 이익 때문에 시에라리온 내전을 부추겨온 혐의다.


진실을 찾지 않는다면 학살은 계속된다

같은 아프리카 내륙에 있는 이웃나라의 독재자도 자신의 이권을 위해 옆 나라의 무고한 시민들의 손목이 잘리는 것을 태연히 부추긴 것이다. 본문을 따라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수많은 아픈 장면들, 인간의 잔인한 본성에 혹자는 그만 책을 덮어버리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 지구상 어딘가에서 수없이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살육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그 살육으로 인해 이득을 얻게 되는 이가 누구인지, 이득을 얻은 자들이 그 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왜냐하면 우리가 눈을 부릅뜨고 진실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 숱한 살육의 배후에 있었던 이들이 미래에 다시 한번, 굉장히 쉽게 같은 살육을 저지를 것이므로. 또한 살육의 현장을 각종 거대언론을 통해 조작된 이미지로만 유포시킬 것이므로.

책을 읽은 다음날, 신문의 국제면에 이스라엘 총리가 아프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스라엘 샤론총리 뇌졸중 입원, 중동 정치기류 술렁'
언론 "지역평화에 악재...이·팔 관계 악화우려" -세계일보 12월 20일자-

'팔레스타인과 해빙 주도 샤론 총리 뇌졸중 불안한 중동평화'
정착촌 철수강행 뒤 신당 창당...타격 불가피
팔레스타인 선거에선 무장조직 하마스 압승 -조선일보 12월 20일자-


대부분의 신문들은 일제히 샤론 총리를 '이·팔 관계의 해빙을 주도하는' 온건한 총리로, 팔레스타인은 과격단체가 정치적 우세를 차지하는 나라로 그리고 있었다. 이 기사만 본다면 두 나라가 대치 상태에 있는데 이스라엘은 평화를 계속 시도하고 있고 팔레스타인은 이에 계속 극단적으로 맞선다는 인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은 독자는 이런 기사를 무심히 넘길 수 없게 된다. 신문기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기사가 난 신문의 성향과 그 기사가 흘러나온 근원지 즉 미국의 거대언론들에 대해서까지 한번쯤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이다.

좋은 책은 이렇게 후속효과를 발휘한다. 신문기사를 볼 때도 무심히 그냥 받아들이지 않게 되는 것. 세상에 대해 조금 더 비판적인 안목을 가지게 되는 것. 이 아프고 적나라한 책은 그래서 많은 이들에게 읽혀져야 한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꼭 읽어야 하는 권장도서 리스트를 만든다면 꼭 들어가야 하는 책은 바로 이 책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참고서적. 그레그 캠벨 <다이아몬드 잔혹사>(2004·작가정신)


나는 평화를 기원하지 않는다 - 국제분쟁전문가 김재명의 전선 리포트

김재명 지음, 지형(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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