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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리콥터 학무보의 '극성'을 보도한 <알바니 타임스>.
헬리콥터 학무보의 '극성'을 보도한 <알바니 타임스>.
미국의 초등학교나 중학교의 운동경기장에는 작전지시를 하는 코칭스태프들 외에 사이드라인이나 관중석 하단에 앉아 소리를 질러대며 '번외 지시'를 하는 부류가 있다.

이들은 선수들의 학부모들이다. 그러나 어쩌다 눈살을 찌푸리는 관중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잠깐 눈길을 줄 뿐 그냥 지나친다. 수업뿐 아니라 학교의 크고 작은 일에 학부모들의 참여를 적극 활용하고 있는 미국의 학교에서는 학부모들의 이 같은 극성을 '좀더 적극적인 참여' 정도로 치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같은 학부모들의 극성이 고등학교와 심지어는 대학교나 대학원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해 일선 교육 행정가들과 전문가들의 우려를 사고 있다. 대학 당국자들은 표면적으로 이들을 '참여하는 부모'라고 점잖게 부르지만, 내부적으로는 '헬리콥터 학부모'라고 부른다. 이 헬리콥터 학부모들은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서는 학생과 학교의 일에 간섭하는 학부모들을 일컫는 말이다.

"내 아들 인정 못 받아" 학교 5차례 옮긴 학부모

미국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운동선수 자녀를 둔 학부모들이 자녀를 따라 거주지와 직장을 옮기는 것은 흔한 일이다. 이들은 코치에게 자기 자녀가 주전으로 뛰게 해 달라고 생떼를 쓰기도 하고, 이 같은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이리 저리 학교를 옮기기도 한다.

어머니의 압력으로 학교를 옮기는 것으로 알려진 플로리다 대학(UF) 쿼터백 조시 포스터에 관한 기사를 보도한 <잭슨빌 타임스 유니온> 12월 10일자.
어머니의 압력으로 학교를 옮기는 것으로 알려진 플로리다 대학(UF) 쿼터백 조시 포스터에 관한 기사를 보도한 <잭슨빌 타임스 유니온> 12월 10일자.
지난 9일 미국 대학풋볼 '파워 하우스'로 유명한 플로리다 대학 풋볼 팀의 유망주 신입생 쿼터백 조시 포티는 "내년 학기에 학교를 옮기겠다"고 발표해 코치와 대학 당국자들은 물론 풋볼 팬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시즌이 끝난 지난 1일 <올랜도 센티널>에 "코치가 정말 훌륭하고 모든 여건이 만족스럽다"고 했던 그가 열흘도 안 돼 마음을 바꾼 것이다. 그의 갑작스런 태도 변화는 그의 어머니 패트리샤의 압력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포티의 어머니 패트리샤는 10일 오전 <게인즈빌 선>에 "내 아들은 그동안 코치가 요구한 모든 것에 따른 착하고 훌륭한 아이인데, 코치는 그 애에게 운동장에서 볼을 던질 기회를 거의 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녀는 2주일 전 플로리다 주립대학(FSU)과의 경기 후반전에서 "압도적 스코어로 리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코치가 내 아들에게 볼을 던질 기회를 주지 않았다"며 노골적인 불만을 표현했다.

그런데 조시가 학교를 옮기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캘리포니아 롱비치의 고등학교 시절에 두 차례 학교를 옮긴 것을 비롯해 지난 2003년 이후로 이번까지 무려 다섯 차례나 학교를 옮긴 드문 기록의 소유자다.

조시가 다니던 캘리포니아 고등학교 체육 디렉터 레스 콘젤리어는 지난 10일 <올랜도 센티널>에 "조시의 어머니는 아들이 주내 최고의 수직 점프 기록 보유자인데도 풋볼 팀에서 충분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면서 "그의 어머니를 생각하면 대책이 서지 않는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학장실 전화선은 '세상에서 가장 긴 탯줄'?

헬리콥터 학부모들의 역할은 체육 분야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그들은 아침 수업시간이 너무 일러 자기 자녀가 일어날 수 없다면서 대학에 직접 전화를 하기도 하고, 자녀를 원하는 방에 배정해 달라면서 기숙사 사무실에서 떼를 쓰기도 한다. 이들은 딸의 전공을 바꾸는 문제로 북부 시카고에서 남부 올랜도까지 날아오거나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 아이가 받은 학점에 대해 항의한다. 심지어 룸메이트와의 트러블을 해결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듀크 대학에 다니는 아들을 둔 매튼 리치(54)씨는 더글러스 맥아더의 어머니가 아들이 입학한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앞에 호텔방을 얻어 놓고 아들 방의 불이 언제까지 켜져 있는지 지켜보며 4년을 지낸 일화를 들며 미국 학부모들의 자녀교육에 대한 극성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플로리다 대학(UF)의 샤론 블랜셋 기숙사 담당 디렉터는 지난 7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과거에는 룸메이트 간에 문제가 생기면 학생들을 불러 문제를 해결하면 그만이었으나, 지금은 10건의 트러블 중 9건은 학부모를 먼저 상대해야만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 어떤 부모들은 자녀 문제로 휴대폰이나 이메일로 학과장실이나 기숙사 사무실로 각종 문의를 한다. 때문에 미국의 대학당국자들은 학과장실이나 학장실 전화선을 가리켜 '이 세상에서 가장 긴 탯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미시간 대학에서 학사행정을 담당한 적이 있는 존스 브라운(58)씨는 "부유층 학부모들 가운데는 자녀의 학점에 대한 항의 결과가 좋지 못할 경우 총장에게까지 전화를 하거나 편지를 보내는 경우도 있다"면서 "마치 데니스 레스토랑에서 잘못 만든 오므라이스를 불평하듯 당당하게 시험 답안지 채점을 따진다"고 말했다.

뉴햄프셔 대학의 스콧 칼리키 부총장은 20일 뉴햄프셔 대학 온라인 신문 <뉴햄프셔닷컴>에 "헬리콥터 학부모는 하나의 증후군이다"면서 특히 휴대폰이 대중화 되면서 신입생을 둔 학부모들의 극성은 대단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같은 대학 교내생활 디렉터인 스콧 체스니는 "지난 5년 동안 헬리콥터 학부모들이 급증했다"고 밝혔다.

다트머스 칼리지에서는 개학 첫 주 동안을 신입생 자녀들의 기숙사 방에서 함께 지내는 학부모들도 있어 학교 직원들이 이를 적절한 수준에서 통제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엄마 아빠 도움 좀 받는 게 뭐가 나쁜가?"

헬리콥터 학부모들에 대한 기사를 게재한 <게인즈빌 선> 7월 23일자. 사진은 학부모가 자녀의 기숙사 방에 들어와 침대를 정리해 주고 있는 모습.
헬리콥터 학부모들에 대한 기사를 게재한 <게인즈빌 선> 7월 23일자. 사진은 학부모가 자녀의 기숙사 방에 들어와 침대를 정리해 주고 있는 모습.
이처럼 부모들의 간섭이 일반화되면서 자녀들도 아예 이에 길들여지고 있는 분위기다. 얼마 전 <에이피통신>은 마이애미 지역 쿠퍼 시에 사는 에이미 크래티시의 이야기를 다뤘는데, 그녀는 딸의 첫 학기 수업이 이른 아침과 늦은 저녁에만 배정되자 다른 시간에 빈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며 종일 수강신청 홈페이지를 지키거나 딸이 호텔관광학을 전공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 분야의 중요인사를 만날 수 있게 주선하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그런 그녀도 딸이 언젠가는 독립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모든 것을 해주고 싶은 충동을 자제하고 있지만 딸은 여전히 그녀의 도움을 받으려 하고 있다. 그녀의 딸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데 엄마의 경험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콜게이트 대학 비버리 로우 신입생 담당 학장은 지난달 10일 <알바니 타임스>에 "많은 학생들이 '우리 엄마와 아빠는 나의 제일 친한 친구인데 그게 뭐 나쁜 건가'라고 반문한다"면서 "많은 부모들은 장래 자녀들의 직업과 직장 등을 염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플로리다 병원 심리상담가 캐서린 조앤(41)은 인터뷰에서 "요즘 부모들은 자녀에 대한 간섭이 자녀를 덜 성숙하게 만든다고 여기기보다는 자녀들이 덜 성숙해서 간섭을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서 "사회와 경제가 불안정하면 할수록 이 같은 현상이 고조되어 왔다"고 분석했다.

이렇듯 부모들이 자녀들의 대학생활에 관심이 많다 보니 학교 당국은 이들 학부모들에 호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플로리다 인터내셔날 대학(FIU)이 최근 '학부모 주간'을 가졌고, 팜비치 애틀랜틱 대학의 행정처장은 매달 한번 전화로 학부모협의회와 회의를 갖고 학내 문제에 대해 학부모들의 의견을 듣는다. 중앙 플로리다 대학(UCF)은 '학부모101'이라는 기구를 발족시키고 신입생들이 당면한 여러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눈다.

대학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수만 불씩 수업료를 갖다 바친 학부모들에 대한 전략적 배려이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여기고 있다. 일면 부모가 자녀교육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학생들도 그런 자기 부모를 백안시하지 않는다는 것. 대학들은 학비를 부담하는 학부모들을 '고객'으로 여기고, 고객이 만족하지 못하면 불만을 쏟아 놓는 것은 일면 당연하다는 태도이다.

"제발 자녀를 놓아 주십시오"

현재 미국에는 자녀들의 대학생활까지 일일이 간섭하려 들고 있는 '헬리콥터 학부모'들이 점점 늘고 있다. 사진은 '헬리콥터 학부모'들에 대한 기사를 보도한 피츠버그 <포스트 가제트>지.
현재 미국에는 자녀들의 대학생활까지 일일이 간섭하려 들고 있는 '헬리콥터 학부모'들이 점점 늘고 있다. 사진은 '헬리콥터 학부모'들에 대한 기사를 보도한 피츠버그 <포스트 가제트>지.
그러나 대학들은 학부모들을 교육의 동반자로 여기기는 하지만 학부모들의 참여와 활동이 경계선을 넘어서지 않아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마이애미대학(UM)은 학부모들의 간섭이 지나쳐 학교 행정에 혼란이 초래되자 몇 년 전부터는 신입생 학부모들에게 '제발 자녀를 놓아 주십시오: 자녀들의 대학생활에 대한 안내' 라는 제목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학생과 부모가 가까이 있는 것이 여러 장점이 있다는 입장은 유효하지만 학부모들이 자녀에 대한 과잉기대를 자제하고 적절히 관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노스웨스턴 대학에서는 신입생 학부모들에게 '잡아 두어야 할 시간과 놓아 주어야 할 시간'이라는 안내 책자를 통해 자녀들이 학교생활에서 생기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공간을 남겨두라고 권유한다. 이 학교는 이 같은 '선 긋기'를 통해 부모들이 기본적으로 따라야 할 사항 몇 가지를 규정해 두고 있는데, '자녀에게 먼저 전화하기보다는 자녀가 전화하기를 기다릴 것', '전화대신 이메일을 보내지 말 것', '룸메이트와 문제가 생겼을 경우 총장에게 전화하지 말 것' 등이다.

플로리다 대학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학부모들이 자녀의 학교생활에 어떻게 건설적으로 참여할 것인지에 대해 안내하고 불필요한 간섭을 하지 말 것을 권유한다. 이 대학의 학생주택 담당관은 기숙사 방배정이나 룸메이트 문제로 학생들을 면담할 때 부모의 간섭을 차단하기 위해 휴대폰을 끄도록 요청한다.

이와 관련, 매리노 박사는 2004년 <사이콜로지 투데이>(Psychology Today) 겨울판에 '겁쟁이들의 나라'(A Nation of Wimps)라는 글을 통해 "학부모들의 과잉 간섭은 자녀로부터 덕을 보려는 우스꽝스런 소행"이라면서 "부모들의 과잉 간섭 때문에 정신질환에 시달리거나 폭음, 스토킹을 하는 학생들이 늘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덧붙이는 글 | 플로리다 코리아위클리(koreaweeklyfl.com)에도 실렸습니다. 기사 작성에 코리아 위클리 김온직 템파 주재 기자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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