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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 손영옥
심재 손영옥 ⓒ 전영준
심재 손영옥(心齊 孫英玉). 서예가이며 서각가인 그를 안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지난 2년 동안 이곳 경남 양산의 문화예술인들을 찾아 이리저리 발품을 팔고 다녔지만, '심재 손영옥'은 선뜻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지난 10월 8일부터 15일까지 양산문화예술회관 전시실에서 열린 그의 첫 개인전 소식을 듣고서야 비로소 그의 이름 석자를 알게 되었다.

서예 인생 30년

'심재 손영옥전'이라는 타이틀의 이 개인전에 출품된 서예 20점, 서각 28점, 모두 48점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수작(秀作)이었다.

'아니, 우리 고장에 이런 인물이 숨어 있었다니…'

하지만 그는 숨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번 전시회가 지역에서 연 첫 개인전이어서 미처 몰랐을 뿐, 그는 국내 유수의 서예 및 서각대전의 초대작가와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중견 서예가였다. 또 연세대학교와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중국복강성 하문시립박물관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을 만큼 역량을 인정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국내 개인전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그동안 일본 후쿠오카와 대마도 초청 전시회를 비롯해 각종 기획전과 그룹전, 순회전에 출품한 작품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는 것도 알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붓을 잡았으니 제 서예 인생도 하마 30년이 됐네요. 서예에 입문한 동기는 좀 엉뚱스러운데, 단지 선생님 소리를 듣고 싶어서 서예를 시작했어요. 나중에 서예학원이라도 차려 수강생을 받으면 선생님 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했지요."

지난 10월에 가졌던 자신의 개인전을 찾은 시민들에게 작품을 설명하고 있는 손영옥.
지난 10월에 가졌던 자신의 개인전을 찾은 시민들에게 작품을 설명하고 있는 손영옥. ⓒ 양산시민신문
선생님 소리를 듣기 위해서라? 뭔가 그럴듯한 입문 동기를 기대했더니 좀 의외다 싶다. 그러나 이어지는 얘기를 들어 보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어렸을 때부터의 꿈이 선생님이 되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더 이상 공부를 할 수 없게 되었어요. 대학 진학이 좌절되었을 때, 대학을 가지 못하게 된 서러움보다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꿈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 더 큰 아픔이었지요.

한동안 깊은 상실감에 젖어 있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불현듯이 고등학교 때 국사 선생님 얼굴과 선생님이 제게 하셨던 말씀이 생생하게 떠올랐어요.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제가 글씨 쓰는 것을 보실 때마다 '영옥이 글씨 솜씨가 보통이 아니구나. 너는 이 다음에 훌륭한 서예가가 되겠어'라며 칭찬을 해 주셨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죠."

태어나서 돌이 막 지나자마자 아버지를 여읜 그는 어머니마저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스스로 돈을 벌어 공부를 해야 했다. 그런 가운데 어렵사리 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넉넉잖은 생활비를 쪼개 서예학원에 등록을 했다.

그리고는 학원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글씨 쓰는 일에 전념을 했다. 비록 대학은 못 갔지만, 이 길만이 남들로부터 선생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믿고…. 경남 밀양이 고향인 '손영옥'은 그 뒤 곧 고향을 떠나 부산에서 본격적인 서예 인생의 길을 열었다.

"지금은 다소 여유가 생겼습니다만, 지난해까지 하루 세 시간 반 이상 자 본적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글 한점 쓸 동안에 저는 열 점은 써야 직성이 풀렸으니까요. 서예는 노력한 만큼 결과가 드러납니다.

흔히들 서예를 시작하기 전에 자신은 소질이 없다고 망설이는데 서예는 소질과는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일정한 수준까지는 기능의 향상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소질보다는 노력이 관건입니다. 그렇게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다 보면 어느 순간 기능의 경지를 뛰어넘어 예술의 경지로 승화하게 되지요."

배움에 대한 끝없는 욕심

처음에는 무작정 닥치는 대로 글씨를 써나갔지만 차츰 서예의 세계가 한없이 넓고 깊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좋은 스승을 만나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마치 순례자처럼 스승을 찾아 나섰다. 그런 가운데 대구의 '율산 이홍재(栗山 李洪宰)' 선생으로부터 행서(行書)를, 서울의 '국당 조성주(菊堂 趙盛周)' 선생으로부터는 전서(篆書)와 전각(篆刻)을 사사했다. 한글은 부산의 '현재 김종문(玄齋 金鍾文)' 선생의 지도를 받았다.

"세 분 선생님들이 다 우리 서예계의 거목들이신데 특히 부산의 김종문 선생님은 저의 정신적 지주이십니다. 부산 서예의 대명사이신 청남 오제봉 선생의 직계 제자인 김종문 선생님은 소리 글자인 한글을 그림으로 다듬어내는 독창적인 서예가이신데, 제게는 글씨뿐만 아니라 욕심 버리는 법과 검소하게 사는 법을 일깨워 주신 어른이시지요. 이제는 특별한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선생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되었을 정도로 선생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며 흠모하고 있습니다."

십이간지로 시간을 표시한 시계. 아래의 글 '吉人爲善 惟日不足 凶人爲不善 亦惟日不足'은 '길한 사람이 선을 행함에 오직 날을 부족하게 여기고, 흉한 사람이 선을 행치 아니하는 것 또한 오직 날을 부족하게 여긴다'는 뜻.
십이간지로 시간을 표시한 시계. 아래의 글 '吉人爲善 惟日不足 凶人爲不善 亦惟日不足'은 '길한 사람이 선을 행함에 오직 날을 부족하게 여기고, 흉한 사람이 선을 행치 아니하는 것 또한 오직 날을 부족하게 여긴다'는 뜻. ⓒ 전영준
심재 손영옥은 배움에 대한 욕심이 남다르다. 제때에 대학을 못간 포원 때문이었던지 만학으로 대학 학부과정을 두 번이나 마쳤다. 그것도 들어가기는 쉬워도 졸업하기는 어렵다는 방송통신대학교의 경영학과와 중어중문학과를, 두 번 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각각 4년 만에 졸업을 했다니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다.

"경영학과도 쉽지는 않았지만, 중어중문학과는 어학이어서 정말 어렵고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서예를 한 덕을 톡톡히 봤지요. 서예를 하면서 자연히 길러진 고도의 집중력도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되었고, 서예를 통해 탄탄하게 다져진 한자 실력도 중문학을 하는 데 큰 보탬이 되었어요."

그는 서각에 눈을 뜬 뒤로는 미술 학원에도 한 5년간 다녔다. 각(刻)을 하기 위해서는 조형미와 색채감 등 회화적 안목도 길러야 하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서각작품들에는 한결같이 범상치 않은 색채미와 조형미가 깃들어 있다.

서예 30년, 서각 20년, 남을 가르친 세월 20년, 짧지 않은 세월을 줄곧 쓰고 새기며 배우고 가르치다 보니 심재 손영옥의 나이도 어느새 마흔 아홉에 이르러 지천명을 바라본다.

자신의 서실에서 뿐만 아니라 초ㆍ중ㆍ고교의 방과 후 수업이나 특기적성교육을 통해 가르쳐 왔고 이제는 대학(부산대 영산대 등)에 출강도 하게 되었으니 "선생님" 소리가 듣고 싶었던 어릴 적 꿈은 다 이룬 셈이다.

풀꽃 같은 남자와 함께 한 27년

인근 월평에서 분재업을 하는 남편의 일터 가까운 곳을 찾아 10년 전 새 삶의 터전을 잡은 곳이 이곳 양산시 웅상읍 삼호리.

"남편은 풀꽃 같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지난 세월 저의 창작 활동과 사회활동을 말없이 지지해 주고 후원해 준 남편에게 늘 고마운 생각을 품고 있어요."

심재 손영옥은 스무 두 살에 만난 자신의 풀꽃 같은 남편을 존경하고 사랑하며 27년 세월을 함께해 온 가운데 슬하에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두었다. 딸은 복지담당 공무원으로 웅상읍에 근무하고 있고, 아들은 대학을 나와 군복무를 마치고 현재 아버지 일을 돕고 있다. 아들 딸이 모두 곧고 바르게 커 준 것도 그에게는 크나 큰 복이다.

손영옥의 작품 ‘학’
손영옥의 작품 ‘학’ ⓒ 전영준
웅상읍 개운중학교 앞에 '심재 서예ㆍ서각 연구실'을 열어 놓고 있는 그는 누가 양산을 '문화의 불모지'라 하면 가슴이 막막해진다. 자신의 첫 국내 개인전을 굳이 양산에서 연 것도 자신이 뿌리를 내려 살고 있는 이 고장을 위해 뭔가 의미 있는 움직임을 보여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손영옥 선생은 대한민국 서예대전 및 대한민국 서각대전, 관설당전국서예대전 등 국내 대부분의 서예ㆍ서각전의 초대작가와 심사위원, 운영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또 일본문부성장관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해 창원지방법원 밀양지원 작품소장 및 감사패, 전라남도 광양시장 감사패 2회 등 다수의 수상 기록을 지니고 있다.

그는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면서도 국제라이온스협회355-1지구 웅상철쭉라이온스클럽 회장을 맡아 지역사회발전과 이웃을 위한 봉사활동에도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자신의 지난 어려웠던 시절을 생각하며 남몰래 불우청소년들을 위한 장학금도 내놓고, 도움이 필요한 곳에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일에 앞장선다.

현재 국제라이온스협회355-1지구 여성클럽지도위원장과 부산여류서예인회 회장, 영산대학교 서예전담교수, 한국미협회원, (사)한국서각협회 이사, 한일문화교류협회 회원으로 여전히 식지 않는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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