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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소 다로 일본 외상
ⓒ 연합뉴스
일제강점기 1만여 명 이상의 조선인을 강제로 탄광에 끌고 가서 혹사시킨 아소다로(麻生 太郞·65) 일본 외상의 증조부인 아소타키치(麻生 太吉· 1933년 사망)가 1926년 일본기업 아소광업의 전신인 아소 상점(麻生 商店)을 경영하고 있을 때 충청남도 태안군에 있는 안면도를 조선총독부로부터 매수해서 산림을 훼손한 사실이 드러났다.

안면도 산림은 고려시대부터 천년동안 국유림이었지만 조선총독부는 법을 바꾸어 필요한 식민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일본의 아소 상점에 산림을 매각했다. 당시 아소 상점과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입찰했으나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25년에 발생한 나주군 궁삼면 토지수탈사건으로 여론의 눈총을 받고 있어 아소상점에 산림이 넘어갔다.

아소다로 일본 외상이 아소 기업을 직접 경영하고 있던 1975년 4월에 (주) 아소시멘트가 발행한 아소(麻生) 100년사에도 이와 같은 주장이 실려 있다.

아소 상점은 1926년, 당시 조선 총독부가 안면도의 산림을 개방하고 민간에게 개척을 맡기려고 했을 때, 총 면적의 9천 정보 중 6천 정보를 82만3천 엔에 매수했다. 그 후, 1927년 3월, 안면도 임업소와 파출소를 개설하여 지역 주민의 이용을 제한했다. 당시 안면도 초대 소장에는 기독교 출신으로서 도민에게 존경받는 하야시쇼조(林省三)를 기용했다. -<아소 100년사>- 중

▲ 안면도에서 벌채한 나무를 일본으로 옮기고 있다.
ⓒ 한원상
▲ 당시 안면도 소나무
ⓒ 한원상
안면도 임업소 경영에 대해 아소타키치는 같은 책에서 "안면도는 내지(일본인)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훌륭한 나무들이 가득하다. 내가 이 섬에 눈독을 들인 것은 나의 광산에 사용할 갱목이 연간 4천만에서 5천만 엔 정도 비용이 들어가는데 이 섬이 있으면 경영에 매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며 "당장 제재소를 설치하여 나무를 베어내고 싶다"고 그 매수 동기를 설명하고 있다.

아소상점 역시 "안면도에는 유리의 원료인 규사가 대량으로 산출되어 아소 상점이 대단히 관심을 가졌던 지역으로서 안면도는 그 이름대로 '편안히 잠들 수 있는' 이상적인 환경을 구축한 '아소 가(家)의 왕국' 건설을 목표로 한 곳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안면도 주민이었던 박병태(84)씨가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한원상
당시 안면도 주민인 박병태(85)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아소상점이 안면도에 임업소를 설치한 후 일본인 하야시 쇼 조(林省三)을 초대소장으로 기용했다. 임씨는 안면도 도민을 잘 설득시켰다. 도민들은 안면도 나무를 살리기 위해서 송충이를 잡기도 하고 나무를 심어주기도 했다. 안면도 도민들이 많은 역할을 했다. 이렇게 도민을 설득시켜 협조를 얻더니 나무를 베어 배에 싣고 인천, 군산을 거쳐 일본으로 갔다. 많은 나무들이 손실을 입었다. 그래서 여기에 살던 주민 지식층들은 많은 비난과 반대를 했다."

▲ 당시 송진을 채취한 오문환씨가 안면도 휴양림 현장에서 송진 채취 흔적을 가리키고 있다.
ⓒ 한원상
이밖에도 오문환(84)씨는 17살 때 징용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아소상점에 취직해 송진채취 작업을 했다. 오씨는 당시 송진은 '일본 군수품에 사용됐다'고 말한다. 다음은 오씨와 나눈 일문일답.

- 아소상점에 들어가게 된 동기는.
"당시 우리는 아소 상점을 '마생상점(麻生 商店)'이라고 했어요. 마생회사에 들어가서 송진채취하면 징용 안 갔어요."

- 송진 채취한 것은 어디에 사용되었나.
"어디에 사용하는지는 잘 모르지요. 일본 사람들 말로는 군수품으로 사용한다고 했어요. 비행기 기름 낸다고요."

- 사람들의 나이는 보통 몇 살 대였나.
"17살에서 19살된 젊은 층이었지요."

- 하루 일당은?
"70전에서 80전 정도 받았습니다. 그 돈 받아가지고 5일 일해야만 쌀 한 말 살 수 있었어요. 저 먹는 것밖에 안돼요."

아소家 인물들의 주요 경력

1. 아소타키치(麻生太吉)

1872년 석탄사업 시작
1899년 중의원 당선
1918년(주)아소상점 사장 취임
1933년(주)산업시멘트 철도사장 추임
1933년 사망

2. 아소타가키치(麻生賀吉)

1934년 (주)아소상점, 산업시멘트철도 사장 취임
1941년(주)아소상점에서 아소광업사로 개칭
1951년 (주)큐슈전력 회장취임
1971년 (주)산업시멘트, (주)아소광업, 합병
1971년 (주)아소생지소 설립
1980년 사망

3. 아소타로(麻生 太郞·65)

1973년 아소기업 사장취임
1979년 중의원출마 당선, 사장사임
2000년 경제재정정책담당
2001년 자민당 정조회장역임
2003년 일본 총무상
2004년 자민당 정조회장
2005년 일본외상
역사가 깊은 안면도 산림에는 재질이 좋은 우수한 나무들이 많았다. 그 이유는 안면도 소나무림이 천 년 동안 잘 관리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장솔' 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특히 나무에서 나오는 송진은 전쟁에 쓸 수 있는 군수품에 적합하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 기업들이 욕심을 냈을지도 모른다.

일제시대 때 아소상점이 안면도에서 송진을 채취한 내역을 알기 위해 김영희 전 안면도 휴양림 소장(70)이 4년 전에 최종석(사망)씨를 만났다. 그는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아소상점에서 송진채취 담당 직원으로 일했다. 최종석씨는 일제말기에 항공유 혹은 화학제품으로 사용하기 위해 안면도 6천 정보 내에서 매일 200그루를 골라 송진채취를 했다고한다.

안면도 산림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수난을 겪은 바람에 더는 천년동안 양질의 국용목재를 공급해 왔던 그 안면도가 아니다. 천연보호림으로 유명한 안면도의 봉산이 일제시대 때 단절되어 국민들의 관심 속에 사라져 버렸다. 아소상점의 창업주인 아소다로 현 일본 외상의 증조부인 아소타키치와 부친인 아소타가키치가 가업을 이어오면서 우리의 문화유산을 단절시켜 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아소다로 일본 외상은 조상들이 저지른 침략행위에 대한 반성은커녕 망언만 하고 있다. 이제 아시아 침략으로 이익을 얻은 아소기업의 실체가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 후쿠오카현에 있는 아소家
ⓒ 한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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