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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상념에 빠지게 만든 문자메시지. 행복한 남자!
나를 상념에 빠지게 만든 문자메시지. 행복한 남자! ⓒ 이동환
2005년이 저물고 있다. 채 한 달도 안 남았다. 송년회니 뭐니 해서 번화가 골목마다 벌써부터 휘청거린다. 우리는 과연 지난 한 해 무엇을 이루었을까. 보람 있는 한 해를 보낸 사람도 있을 것이고 대개는 소주 한잔에 아쉬움을 달래며 새해 소망을 품어 볼 터.

위암 말기를 마라톤으로 이겨낸 사람. 12월 5일(월) 오후. 그를 만나보기 위해 가방을 챙기다가 문자메시지 하나를 받았다. 약속 시각을 상기시키기 위해 보낸 문자에 대한 답이었다. 전철 속에서 나는, '행복한 남자'라는 문구를 곱씹어 보았다. 대체 이 남자, 얼마나 행복하기에?

위장의 70%를 잘라낸 남자

오상효(36)씨는 13년째 서울 여의도 63빌딩 별관 3층, '63뷔페'에서 요리사로 근무하고 있다. 공식 직함은 부조리장.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살았던 그는 지난 2001년,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청천벽력 같은 판정을 듣게 된다. 위암 말기!

"믿을 수 없었어요. 중고등학교 때 속이 가끔 쓰리기는 했지만 위가 약해서 그러려니 했거든요. 서른두 살 그해 내내 속이 심하게 쓰려 한약만 들입다 먹다가, 동네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 선생님이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하더라고요."

절망이었다. 당시 겨우 두 돌 넘긴 아들 얼굴만 떠올리면 눈물이 앞을 가렸다. 전라남도 해남 땅끝마을이 고향인 그는 5남매 가운데 넷째로 앞만 보며 살았고 단란한 가정을 혼자 힘으로 꾸렸다. 그런데 암이라니, 그것도 말기라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달릴 때, 자신이 만든 음식을 손님들이 맛있게 드실 때, 가족들과 함께 할 때 가장 행복하다는, 아니 늘 행복하다는 오상효씨.
달릴 때, 자신이 만든 음식을 손님들이 맛있게 드실 때, 가족들과 함께 할 때 가장 행복하다는, 아니 늘 행복하다는 오상효씨. ⓒ 이동환
"저는 원래 술은 잘 못하고 담배와는 담 쌓은 사람이었습니다. 집과 직장밖에 모르고 살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스트레스와 불규칙한 식사 습관이 주원인이 아니었나 싶어요. 물론 체질적으로 위가 약한 탓도 크겠지요."

위장의 70%를 절제하는 대수술을 받고 난 뒤 6개월 간 집중 항암치료를 받았다. 고통이 뼛속을 가를 때마다 그는 "살아야 한다"고 속으로 울부짖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내와 어린 아들을 생각하면 피눈물이 쏟아졌다. 턱뼈가 시큰하도록 이를 악물었다.

"수술 받고 일 년 정도 지났을 때 이대로 누워만 있다가는 정말 죽을 것 같더라고요. 걷기 시작했죠. 여섯 달 정도 매일 1.5km 정도를 걸었어요. 그러다가 2002년 9월부터 뛰어보자고 결심했지요. 일주일에 4,5일은 5,6km씩 꼭 뛰었어요. 달리기가 제 체질에 맞았나 봐요. 달릴수록 그렇게 좋을 수가 없는 거예요. 몸으로만 느끼는 거 왜 있잖아요."

그렇게 목숨을 걸고 달린 결과 2003년, 주치의로부터 더 이상 암세포의 전이가 없는 완치 가능성 판정을 받았다. 물론 2006년 3월에 최종 판정을 남겨놓고는 있다.

매일, 행복하다고 외치는 남자

목숨 걸고 달린다는 그의 말에 나는 숙연했다. 나는 과연 이 남자처럼 목숨 걸고 자신과 가족을 지킬 수 있을까? 술부터 우선 줄여야겠지?
목숨 걸고 달린다는 그의 말에 나는 숙연했다. 나는 과연 이 남자처럼 목숨 걸고 자신과 가족을 지킬 수 있을까? 술부터 우선 줄여야겠지? ⓒ 오상효_이동환
그는 이미 여러 대회에 출전해 기록을 낸, 아마추어로서는 꽤 알려진 마라토너다. 병마를 이기고 마라톤풀코스를 여섯 번이나 완주했으며 하프마라톤도 열두 번이나 치러냈다. 42.195km 최고 기록은 올해 춘천마라톤대회에서 거둔 2시간 46분이다. 그는 이 추운 날씨에도 출퇴근 시간만큼은 꼭 달린다. 상암동 집에서 63빌딩까지, 10km 코스와 11km 코스를 정해두고 단 하루도 거르지 않는다. 비가 오는 날에는 자전거를 탄다.

"찬바람이 폐부 깊숙이 느껴지면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어요. 저는 지금 인생을 두 번 사는 거잖아요. 달릴 때마다 지나치게 되는 가로수며 햇빛이며, 흔한 들꽃까지 그렇게 아름답게 보일 수가 없어요. 모든 사물과 사람들에 대해 긍정하게 되고, 또 그렇게만 느끼며 생각한답니다. 화 낼 이유가 없어요(환한 웃음)."

그는, 아내 강화정(34)씨가 아니었으면 절명의 위기를 이겨내기 힘들었다고 회상한다. 그런 아내와 내년부터는 함께 뛰고 싶다고. 병마와 싸우는 동안 벌써 일곱 살이 된 아들(오주환)을 볼 때마다 아빠로서 참으로 자랑스럽고 행복하단다.

주방이 배경으로 너무나 잘 어울리는 남자. 달릴 때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주방이 배경으로 너무나 잘 어울리는 남자. 달릴 때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 오상효_이동환
"가끔, 제 소식을 듣고 비슷한 처지에 계신 분의 가족들이 문의를 해 와요. 어떻게 하면 완치할 수 있느냐고. 저는 운이 좋은 경우랍니다. 달리기가 체질에 맞았고요. 투병 중인 모든 암환자들에게 달리기를 권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고 경우가 다르니까요. 그러나 꼭 한 가지 권하고 싶은 것은 있습니다. 무엇이 됐든, 몰입할 수 있는 한 가지 '거리'를 만들라고요. 미친 듯 빠져들 만한 무엇인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 그 미친 듯 빠져든 한 가지가 오상효씨에게는 마라톤이었나요? 그리고 정말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럼요. 달리기가 아니었다면 지금 제가 이 자리에 있지 못하겠지요. 가족과 직장 그리고 마라톤이 제 남은 인생의 모든 것입니다. 죽는 날까지 달리고 싶어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요? 바로 접니다. 인생 두 번씩 사는 남자가 흔한가요? 저는 매일 아침저녁 달릴 때마다 '나는 행복한 남자다'라고 외칩니다. 최면처럼 주문을 걸지요."

- 2005년도 이제 한 달이 채 남지 않았습니다. 올해 크리스마스는 오상효씨에게 좀 남다른 느낌이 아닐까요?
"물론이죠. 그래서 아내 모르게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답니다. 그깟 이벤트로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다 표시할 수는 없지만 금년 크리스마스만큼은 정말 기억에 남도록 해주고 싶어요(울컥하는지 눈시울이 촉촉해짐)."

아들 오주환과 마라톤대회에서. 누군들 자식이 없을까마는 자신의 목을 그러안은 아들과 함께 한 오상효씨 눈빛은 세상을 다 얻은 듯싶다.
아들 오주환과 마라톤대회에서. 누군들 자식이 없을까마는 자신의 목을 그러안은 아들과 함께 한 오상효씨 눈빛은 세상을 다 얻은 듯싶다. ⓒ 오상효
인터뷰를 마친 뒤 여러 장 사진을 찍고 헤어지며 악수를 나누는데 깡마른 손아귀에 웬 힘이 그렇게 들어가 있는지 깜짝 놀랐다. 얼굴 주름 따위 상관없이 해맑은 웃음, 속 깊은 웃음, 따뜻한 웃음은 이미 오상효씨의 일상인 듯싶었다. 아침저녁 찬바람 가르며 달릴 때마다 외는 주문을 들려달라니까 주저하지 않고 기도하듯 읊조린다.

"난 할 수 있다! 난 이길 수 있다! 난 재수가 좋다! 난 행복한 남자다!"

덧붙이는 글 | 매일 아침 9시 45분에 방송되는 MBC '팔방미인'에 이번 주 금요일 오상효씨가 출연합니다. 암 관련 정보 특집이라니까 관심있는 분들은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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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커서 '얼큰샘'으로 통하는 이동환은 논술강사로, 현재 안양시 평촌 <씨알논술학당> 대표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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