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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3월 29일 종로 거리
1996년 3월 29일 종로 거리 ⓒ 윤찬영
'강경대 죽음 이후 처음'이라는 구절을 읽는 순간 아득함을 느꼈다. '강경대 죽음 이후' 우리 곁을 떠난, 그리고 그 이름마저 잊혀 가는 몇몇 죽음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10년 전에도 유사한 상황이 있었다. 1996년 3월 29일 연세대 법학과에 재학 중이던 고 노수석씨의 죽음이 그것이다. 고 노수석씨는 '김영삼의 불법대선자금 환수와 국가교육재정 확보'를 요구하며 서울지역 대학생들과 함께 종로 거리에 섰다.

15대 총선을 불과 열흘 남짓 남겨둔 시점에서 터져 나온 대학생들의 시위를 경찰은 강경 진압했다. 이 와중에 노씨가 사망했다. 노씨 사망 직후 경찰의 한 관계자는 "외상이 없는 점으로 미루어 외부 충격에 의한 사망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단정했다. 2005년 11월의 상황과 유사하다.

그러나 부검 뒤 유족측 참관인으로 부검에 참여한 인도주의실천의사협회 양길승 박사는 "노군 사체에서 외부의 압력에 의해 생긴 것으로 보이는 피하출혈이 4∼5군데 발견됐다. 이는 구타 또는 넘어지면서 생긴 것으로 보이지만 이것이 직접적인 사인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부검팀과 합의를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시위현장에 함께 있던 노씨의 친구 남기돈씨는 노씨가 사망하기 전 "나 맞았어"하고 2∼3차례 말하며 다리를 휘청거렸다고 증언한 바 있다.

진상조사단장 이덕우 변호사 역시 '상부로부터 어떤 불상사가 일어나도 좋으니 강력하게 진압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며 몹시 괴로워하던 어느 기동대 중대장의 제보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검을 진행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강신몽 법의학과장은 노씨의 사인을 '급성심장사'로 결론지었다. 그것이 끝이었다.

1996년 4월 13일 연세대 교문을 빠져나가는 고 노수석씨의 장례행렬
1996년 4월 13일 연세대 교문을 빠져나가는 고 노수석씨의 장례행렬 ⓒ 윤찬영
그리고 이듬해 3월 조선대 고 류재을씨가 전투경찰과의 대치 도중 사망했고 같은 해 9월 광주대 고 김준배씨가 체포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죽음의 행렬은 계속되었고, 죽음을 둘러싼 논란 역시 그때마다 되풀이되었다.

기억하지 못하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 넉달 뒤면 고 노수석씨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된다. 10년이 지나도록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과 더불어 우리 주변에 드리워진 망각의 그림자가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본질을 흐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발언의 당사자나 기자를 탓하고 싶은 마음도 물론 없다. 울분과 분노는 분명 노무현 정부와 경찰을 향해야 한다. 아울러 진실을 위해 헌신하는 모든 이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한 가지만 덧붙이고 싶다. 뜨거운 감정의 폭풍이 휘몰아치고 난 뒤에도 누군가는 이들의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 언젠가 진실이 밝혀지리라 믿는다면, 그리고 진정으로 바란다면 말이다. 그것이 숱한 죽음의 행렬 가운데 삶을 이어가고 있는 우리들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 아니겠는가.

고 노수석씨의 영정을 든 학생
고 노수석씨의 영정을 든 학생 ⓒ 윤찬영

덧붙이는 글 | 윤찬영기자는 현재 노수석열사추모사업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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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옆 앞 '기찻길옆골목책방' 책방지기.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수도권에서 살다가 2022년 전북 익산으로 이사해 지방 소멸의 해법을 찾고 있다. <로컬 혁명>(2023), <로컬꽃이 피었습니다>(2021), <슬기로운 뉴 로컬 생활>(2020), <줄리엣과 도시 광부는 어떻게 마을과 사회를 바꿀까>(2019), <나는 시민기자다>(2013)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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