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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깨끗하게 손질을 하자 윤기가 화려합니다
깨끗하게 손질을 하자 윤기가 화려합니다 ⓒ 김관숙
손이 빠른 남편 덕분에 예상보다 일이 빨리 끝났습니다. 남편이 탁자며 화분들을 한쪽으로 몰아 놓고 있습니다. 거기까지는 바라지 않았는데, 나는 남편의 눈치를 보면서 얼른 거실 바닥에 신문지들을 두 겹씩 해서 폅니다. 남편이 고추들을 널어 줍니다. 뿐만 아니라 남편은 아직은 견딜 만하다면서 새벽에도 가동치 않던 난방을 다 가동을 합니다. 이내 바닥이 따듯해지면서 실내가 아주 훈훈해졌습니다. 매운 내가 집안을 가득히 채워 갑니다.

맑고 고운 가랑잎 소리가 납니다
맑고 고운 가랑잎 소리가 납니다 ⓒ 김관숙
두 시간 쯤 지나자 고추들은 품고 있던 아름다운 가랑잎 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손으로 한 번 쓸어주기만 해도 맑고 고운 가랑잎 소리를 내며 예쁜 노란 씨들을 쏟아냅니다. 남편은 방앗간에 갈 채비도 도와줍니다. 연신 재채기를 하면서도 씨를 털어낸 고추들을 두 개의 비닐봉지에 넣어 푸른 끈으로 십자로 단단히 묶어서 내 손에 들려줍니다. 나는 기분이 묘했습니다. 이게 아닌데.

방앗간에서 돌아오는 길, 엘리베이터 안에서 붓글씨를 배우고 돌아오는 이웃을 만났습니다.

"또 혼자 했어?"
"아니, 같이 했어. 근데 좀 안 돼 보여. 그러는 게 보기 싫구."
"무슨 말야, 담부턴 혼자 하라 하구 헬스 가버리라구. 나처럼 분담해서 살래두. 얼마나 편하구 좋은지 몰라."

나는 그냥 웃기만 합니다. 화분들이며 탁자가 원래 대로 제 자리에 놓여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편은 청소는 물론 매운 내가 진동을 하던 집안 공기까지 말끔하게 환기를 시켜 놓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고추를 널었던 흔적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전 같으면 내가 다 해야할 일들 입니다. 남편은 시침을 뚝 떼고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하나도 반갑지가 않습니다. 내가 뭔가 잘못을 해도 크게 하고 있는 것만 같은 것입니다.

나는 그런 남편에게 눈웃음에 손만 한 번 들어 보이고 주걱을 가지고 와서 온기가 있는 비닐봉지를 열어 고춧가루를 헤쳐 놓습니다. 고춧가루가 뭉치지 않게 하려면 방앗간 기계 열을 식혀야 합니다. 무슨 프로를 보고 있는지 갑자기 남편이 크게 웃는 소리가 났습니다. 순간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근래에 들어보지 못했던 그 큰 웃음소리도 웃음소리지만 남편의 환한 모습은 분명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오호, 이 기분! 베리 굿! 굿!'

나는 한눈에 알아봅니다. 남편 모습에는 집안일을 거들어 주고 난 뒤에 오는 뿌듯함이 철철 넘쳐나고 있습니다. 아내를 위해 대신 뒷정리를 말끔히 해 놓고는 티비를 보면서 방앗간에 간 아내를 기다리는 것도 괜찮은 즐거움이고 행복이었던 것입니다. 나는 머리를 돌리고 남편 모르게 조그맣게 웃었습니다. 이제야 그 숱한 나날들에 대한 보상을 받은 기분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생각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늦었지만 많이 늦었지만 나도 시대 흐름 대로 아니 아까 만난 그 이웃처럼 남편과 집안일 분담을 하면서 살게 되는 꿈 같은 보랏빛 나날들이 오려나 봅니다. 남편이 해준 밥도 먹고, 남편이 타 준 커피도 마시고, 마음 놓고 긴 외출도 하고, 마음 놓고 여행도 가고…. 저 역시 '오호, 이 기분! 베리 굿! 굿!'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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