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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만 보는 바보>
<책만 보는 바보> ⓒ 보림
이덕무가 좀 더 부각된 것은 김탁환의 역사 소설 덕분이었다. 비록 주인공은 아닐지라도 가난해도 책을 손에서 떼지 않는 선비의 모습으로, 엄하면서도 인자한 현감의 모습으로 등장한 이덕무의 고른 숨결은 분명 인상적이었다. 이덕무는 그렇게 차츰차츰 오늘의 시대를 향해 걸어왔다. 그러더니 마침내 햇볕의 가장자리에 성큼 그 모습을 드러냈다. <책만 보는 바보>에서 다른 이가 아닌 그 스스로의 모습으로 이덕무라는 이름이 생명력을 얻은 것이다.

이덕무, 그는 스스로를 바보라고 말했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책만 보는 바보'라 하여 스스로를 '간서치'라 불렀던 게다. 이 사실은 여기저기서 본받아야 할 모습으로, 혹은 '대상에 미쳐 경지에 미친' 모습으로 그려지곤 했다. 하지만 <책만 보는 바보>에서 이덕무가 간서치를 자처한 사연을 들여다 보면 가슴 한곳이 아련하게 저려온다. 책이 좋아 이덕무 스스로가 책을 가까이한 까닭도 있지만 서자의 한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덕무는 서자였다. 서자는 양반이되 반쪽짜리 양반이었다. 그래서 변변한 벼슬 하나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렇다 하여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장사 또한 그러했다. 서자란 그런 것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이 전무한, 차라리 농사꾼이나 장사꾼으로 태어났으면 속이 시원한 것이 서자라는 것이었다. 어린 나이 이덕무는 책 보기를 즐겼다. 그때만 해도 세상을 모를 때였으니 커다란 근심은 없었다.

하지만 성인이 되었을 때 이덕무는 책 보기를 어린 시절처럼 즐길 수가 없었다. 책을 보고 있다 하여 집안의 가세가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가슴 속 웅대한 꿈을 펼칠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덕무의 가슴 아픈 심정을 엿보게 해주는 대목이 있다. 거듭되는 흉년에 온 식구가 굶주리자 이덕무는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았던 <맹자> 한 질을 돈 이백 전과 바꾸고 가족 먹일 양식을 얻게 된다.

선비가 책을 팔아 양식을 마련한다는 것, 그것은 고금을 통틀어 찾기 어려운 괴이한 일이었다. 이덕무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올곧은 선비 정신이었던 그였기에, 어렵게 마련하여 벗들에게 자랑하고 자랑했으며 두고두고 아꼈던 <맹자>를 내주는 것이기에 그의 심정은 찢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는 서자이고 내줄 것은 그것뿐인 것을.

허나 이덕무는 그것으로 쓰러질 녹록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속으로 한을 감내할 줄 알았다. 그래서 그의 책읽기는 더욱 빛을 발했는지 모른다. 그는 스승이 없다 하여 세상에서 버려졌다 생각하지 않았다. 논어에 나온 말처럼 이덕무는 홀로 옛것을 스승으로 삼았고 책 안에서 무궁무진한 세계를 만나 계속 자신을 수련했다. 가슴 속 깊은 곳에는 언젠가 쓸모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하늘도 감동한 것인가. 세상은 이덕무를 옥죄였지만 하늘은 이덕무에게 벗을 주었다. 또한 스승을 주었다. <책만 보는 바보>에서는 이덕무는 대신 죽어도 억울하지 않을 절친한 벗들인 박제가, 이서구, 백동수 등과의 인연이 나온다. 또한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박지원과 홍대용과의 인연이 나오는데 그 안에는 이덕무가 세상을 둥글둥글하게 볼 수 있도록 힘을 준 우애가 구구절절 녹아들어 있다. 관중과 포숙아의 우정에 비해 손색없는, 진실한 우정의 이야기들이 실려 있어 인간 이덕무를 부럽게 만든다.

스스로를 간서치라고 말했던 이덕무, 천하의 학식을 지녔어도 신분제도가 무엇보다 우선인 세상에서 그 기량을 마음껏 펼치지 못했던 그는 불혹을 앞둔 늦은 나이에 벼슬을 하게 된다. 개혁 군주 정조 덕분이었다. 그래서인가. 이덕무는 <책만 보는 바보>에서 자신보다 앞선 비슷한 처지의 그들은 재주를 펼치지 못했지만 자신은 그나마 벼슬을 할 수 있었으니 세상이 좀 더 나아졌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다음 세상을 열어갈 아이들 때도 점차 그렇게 나아지기를 소망하는 고백을 하는데 이덕무의 바른 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덕무, 그는 업적으로만 본다면야 역사 속에서 변변치 않은 이들 중 하나로 분류될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가 커다란 산처럼 다가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책을 스승으로 하고 마음을 단련시키더니 '그 자리'에서 기어코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일까? 바보를 자청했다지만 인간 이덕무의 이름은 누구보다 듬직하다. 복잡하기만 한 오늘날의 모진 풍파에도 날아가지 않을 것만 같은 듬직함이 느껴질 정도다. 그래서다. 그래서 이덕무가 기억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책만 보는 바보>에서 이덕무는 말했다. 옛것을 되살려 새롭게 깨닫는다면 그것으로 스승을 삼을 수 있다고. <책만 보는 바보>에서 이덕무는 만나는 것, 이것도 그와 같다. <책만 보는 바보>, 이덕무에게 배움을 청하는 소중한 기회가 될 터이다.

덧붙이는 글 | 책만 보는 바보: 이덕무와 그의 벗들 이야기 | 안소영 지음/강남미 그림 | 보림 

이 글은 도서정보 사이트 '리더스가이드(http://www.readersguide.co.kr)'에도 실렸습니다.


책만 보는 바보

안소영 지음, 보림(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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