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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국내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조직을 다룬 책 <경성 트로이카>
일제시대 국내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조직을 다룬 책 <경성 트로이카> ⓒ 사회평론
1937년 4월 30일 일제 어용신문인 '경성일보'는 이재유 체포기사를 내보내면서 '집요흉악한 조선공산당 마침내 괴멸하다'라고 보도했다. 그의 체포를 두고 조선공산당이 끝났다고 호들갑을 떨 정도였으니, 일제 경찰에 이재유가 어떤 존재였는지 잘 보여준다. 도대체 그가 누구기에.

일제시대 사회주의자라고 하면 남로당을 이끌던 박헌영이나 독립군 사령관 홍범도, 김일성을 들 수 있지만 그들은 모두 국외파였다. 박헌영 또한 해방되기 전까진 거의 국외에 머무르며 국내 운동에 관여하지 못했고, 국내파 사회주의자 여운형이 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을 조직한 것은 1944년에 이르러서였다.

그렇다면 기나긴 일제 점령기 동안 국내 사회주의 운동은 누가 이끌었을까. 대표주자는 아니더라도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한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이재유(1905~1944)를 빼놓을 수 없다.

1933년 가을 고무공장, 인쇄공장, 방직공장 등 8개 공장 연쇄파업을 이끈 이재유는 훗날 남부군 빨치산 대장이던 이현상, 남로당 총책 김삼룡과 더불어 '경성트로이카'를 이끌었다. 1934년 1차 경성트로이카 사건 때 검거된 조직원만 2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방대한 조직이었다.

저자 안재성은?

1960년 경기도 용인 출생. 강원대학교 재학중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구속되어 제적되었다. 90년대 중반까지 구로공단 동일제강, 청계피복노동조합, 태백탄광지대, 구로인권회관 등지에서 노동운동을 했다. 장편소설로 '파업'(1989), '사랑의조건'(1991), '황금이삭'(2003) 등이 있다. / -저자소개에서
해방직후 결성된 조선공산당에서도 중앙위원 상당수를 차지한 그룹은 김상룡, 이현상, 이순금, 이관술 등 경성트로이카 출신들이었다.

<경성트로이카>(안재성 지음/사회평론)는 이재유와 동지들의 일제시대 투쟁사를 담은 책이다. 생존자들의 증언과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했지만 소설 형식으로 써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책 속엔 담긴 내용은 조직원들의 활동과 국내 사회주의 운동 파벌 간의 대립, 사회주의자들의 자유연애 등 다양하다. 게다가 국내파 사회주의자들이 국경을 넘어 중국공산당 팔로군에 가담하는 과정이 대단히 세세하게 그려져 있다.

먼저 '트로이카'라는 조직 이름부터 살펴보자. 그 속에는 이재유 사상의 핵심이 담겨 있다. 이재유는 과거 사회주의 조직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방적으로 지시를 하거나 명령을 전달하는 것을 반대했다. 상부 모임 구성원이라 해도 보안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들 외에 하부 조직원에 대한 명령권 같은 것은 갖지 않았다. 또 공산당 재건을 위한다며 강령 따위를 논의하느라 시간을 보내는 일은 피했다.

1937년 4월 30일 일제 어용신문인 '경성일보'는 이재유 체포기사를 내보내면서 '집요흉악한 조선공산당 마침내 괴멸하다'라고 보도했다.
1937년 4월 30일 일제 어용신문인 '경성일보'는 이재유 체포기사를 내보내면서 '집요흉악한 조선공산당 마침내 괴멸하다'라고 보도했다. ⓒ 사회평론
러시아 말로 세 마리의 말이 동등한 힘을 갖고 마차를 이끄는 삼두마차라는 뜻의 '트로이카'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모든 활동가들이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자신과 조직의 운명을 결정하고 따르는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이라는 뜻이다.

"이재유에게는 당장 일어나고 있는 파업이 더 급했다. 언제 경찰의 습격으로 연행될지 모르는 그는 국제선과의 통합이나 이론 투쟁보다는 현장 파업을 지도하는 일에 자신의 귀한 시간을 쏟고자 했다."-p.123-124

책은 1930년대가 배경이지만 지금 상황에 적용해도 무리가 없다. 게다가 사회주의, 민족주의, 보수주의에 대한 혁명가들의 다양한 의견들을 엿볼 수 있어 더욱 흥미롭다.

1920년대 먼 장래를 위해 당장의 싸움을 자제하고 힘을 기르자는 민족주의자들과 당면한 싸움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주의의 대립은 당시 사회주의가 인기를 얻었던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

진정한 보수주의에 대한 의견도 눈길을 끈다. 가령 조직원인 이효정은 철저히 봉건적 사고를 지닌 할아버지를 존경했다. 어쩌다가 상민이 멋모르고 곰방대 물고 동네 골목을 지나가면 하인을 시켜 잡아다가 볼기를 때릴 정도로 완고했던 할아버지는 노비의 환갑날에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 잔치를 하고 노비의 아들딸과 온 동네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서 노비문서를 불사르는 모습을 보인 인물이다.

사회주의자였던 이효정은 할아버지를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이기적인 보수주의자가 아니라 사회와 집안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 틀을 지키려 애썼던 정당한 보수주의자'라고 인정했다.

적장(이현상)에 대한 예를 갖추어 그의 시체를 스님들의 독경속에 정중히 화장한 국군 토벌대장 차일혁 총경을 특별히 언급한 점에서 보이듯 책은 좌우대립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오히려 권력을 위해 이념을 이용한 사람들이 비판의 대상이다.

올해는 이재유 추모 60주기

이재유는 1993년 '이재유연구'(김경일 지음/창비)가 나올 때까지 잊혀진 인물이었다. 남과 북 모두에서 버림받은 국내파 사회주의자들의 지난 역사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근 그에 대한 추모 움직임이 일고 있다. 올해 이재유 출생 100돌을 맞아 지난달 29, 30일 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에선 '이재유 선생 60주기 추모식'이 열렸고, 일본에서도 '이재유 연구'가 번역돼 출간될 예정이다.
저자는 국내파 사회주의자들을 탄압했던 남북한의 지도자들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숨기지 않는다. 그에게 김일성은 '불과 수십 명의 유격대를 이끌다가 일찌감치 러시아로 피신했던' 인물이고, 이승만은 '미국 땅에서 넥타이를 매고 백인들의 파티에나 드나들던' 데 불과했다. 특히 한때 이재유 그룹과 동지라고 여겼던 북한 정권에 대해선 더 혹독하다.

"식민지 조선이나 남한에는 최소한의 법률이라는 것이 있어서 이를 어기지 않는 한 마음속으로 어떤 죄를 지어도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공산당은 사람의 마음 속에 든 정신까지도 옳고 그름을 따지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해방 후 불과 반 년 만에 공산당은 신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되어 있었다."-p.354

소설 형식을 빈 책의 내용은 대단히 구체적이고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일제 경찰보다 더 무서운 변절한 혁명가들, 안전한 아지트를 위해 남녀가 동거했던 상황, 그 속에서 빚어진 사랑 싸움, 일제의 검거를 피하기 위해 실시했던 변장과 도피술, 여감방 풍경 등을 읽다보면 어느새 1920년대가 현재인 것처럼 느껴진다.

또 저자가 자신의 생각을 담아 풀어낸 혁명가들의 고뇌와 절망, 두려움은 주인공들을 영웅에서 인간으로 다가오게 만든다.

'경성트로이카'를 만든 창시자는 이재유다. 그러나 조직명이 뜻하듯이 이재유는 군림했던 지도자는 아니다. 그래서 책은 이재유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박진홍, 이순금, 김삼룡, 미야케, 김태준, 이병희, 이효정 등 수많은 혁명가들의 활동상을 차례로 비춰준 뒤 막을 내린다.

그리고 단지 이재유의 활동이 과거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듯이, 현재 생존해 있는 이효정을 만나서 나누는 대화로 처음과 끝을 맺는다.

경성 트로이카 - 1930년대 경성 거리를 누비던 그들이 되살아온다

안재성 지음, 사회평론(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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