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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틀홀더, 김성룡 사범.
타이틀홀더, 김성룡 사범. ⓒ 이동환
바둑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김성룡 사범을 모르지는 않을 터. 그렇다면 그가 조훈현, 이창호 사범들처럼 세계가 알아주는 타이틀홀더냐? 그렇지는 않다. 그런데도 그는 조훈현, 이창호 사범들 못지않게 유명하다.

KBS의 <바둑왕전> 해설가로 전국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해 지금은 <바둑TV>와 <바둑ch>는 물론, 바둑포털사이트 <사이버오로>와 <타이젬>을 통해 명해설가로 입지를 굳혔기 때문이다.

내가 그를 명해설가로 조심스럽게 지칭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올해 우리 나이로 서른인 그는, 작고한 왕년의 명해설가 김수영 사범처럼 확고한 신념과 뚝심으로 자신을 바둑보급기사로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20일(일), 한국기원 3층 사무국에서 그를 만나보았다. 21세기형 바둑해설가로서 면모를 보여주기 시작한 그를 통해 2006년 한국 바둑계 전망과 향후에 대한 생각, 분석을 듣기 위해서였다.

"이래봬도 작년에 큰 타이틀 하나 땄습니다"

운이 좋았다고 겸손하게 표현하지만 세계 정상인 한국 바둑계에서, 그것도 대형 타이틀을 아무나 점령할 수는 없다.
운이 좋았다고 겸손하게 표현하지만 세계 정상인 한국 바둑계에서, 그것도 대형 타이틀을 아무나 점령할 수는 없다. ⓒ 사진제공 : 김성룡미니홈
2004년 10월 18일 밤 9시 20분. <바둑TV> 스튜디오에서는 해설가로만 알려진 김성룡 사범이 스타로 우뚝 서는 순간이 연출되고 있었다. 1기 전자랜드배 왕중왕전(우승상금 4천만 원) 결승에서 김주호 사범을 물리치고 우승하는 쾌거를 이룬 것이다. 아무도, 심지어 그 자신조차도 우승하리라고는 예상 못했다. 하지만 운은 아니었다. 준결승에서 당시 국내 기전 3관왕이었던 최철한 사범을 누르며 옹골진 실력을 보여주었으니까.

수읽기 삼매경
수읽기 삼매경 ⓒ 사진제공 : 김성룡미니홈
그는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생애 첫 우승! 한 살 위인 이창호, 그 큰 벽이 버티고 있는 한 정상에 서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일찌감치 승부사의 길을 포기했다. 바둑보급기사로, 해설가로 차라리 이름을 얻으리라 다짐했지만 우승의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는 망설임 없이 다시 해설가로 나섰다. 그의 본령은 냉엄한 승부의 세계가 아니라 그 언저리에서 바둑 팬들을 만나는 일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명실상부한 타이틀홀더로서 입신(入神, 九段)에 이르렀지만 그는 여전히 소탈하면서도 질박한, 정곡을 찌르는 해설가로 거듭나고 있다.

"저를 아껴주시는 팬들도 계시지만 싫어하는 분들도 많아요. 해설이 너무 직설적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사실 저는 꾸미거나 숨기는 거 싫어하거든요. 팬들 취향에 따른 호불호라고 생각합니다(웃음)."

자신의 말마따나 그는 거침없는 해설로 유명하다. 다른 해설가라면 "흑이 어렵겠는데요?" 할 말을 그는 "흑이 쫄딱 망했네요. 해 볼 데가 없어요. 끝났네요"라고 한다. "흑이 마지막 승부수를 두었네요" 할 말을 그는 "어차피 이판사판이니 끝장을 보자 이거죠? 아, 저 수! 독한 수입니다. 꼼수는 아닙니다만 잘못 응수하면 백이 거꾸로 망하겠는데요?" 하며 절대로 거르지 않고 쏟아낸다. 표정까지 대국자보다 더 '리얼'하다.

바둑 관련 사이트라면 어느 곳이라도 김성룡 사범의 해설은 인기다.
바둑 관련 사이트라면 어느 곳이라도 김성룡 사범의 해설은 인기다. ⓒ 사진제공 : 김성룡미니홈
김성룡 사범이 그토록 자신 있게, 어쩌면 일부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오만해(?) 보일 정도로 솔직한 해설을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느낌만으로 대충 해설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사전 연구와 그에 따른 자료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32명의 정예 멤버가 참가한 '한국바둑리그' 해설을 맡았을 때 그는 A4 용지로 500여 장에 이르는 방대한 자료를 만들었다. 그런 철저한 분석과 연구로 임하니 해설이 날카롭고 정확할 수밖에.

내가 그를 21세기형 해설가로 부르는 이유를 더하자면, 대국자의 심리까지 분석해내는 치밀함 때문이다. 축적된 자료와 새로운 수에 대한 연구가 바탕이 되어있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한, 평소에 동료 기사들을 면밀히 관찰하고 습관까지 연구해둔 끝에, 예상 되는 변화도를 한 번에 그려내는 명쾌함에 반해서다.

올림픽 종목에 바둑이 들어간다면 모를까

김성룡 사범이 심혈을 기울여 엮어낸 <충암대연구> 3 권.
김성룡 사범이 심혈을 기울여 엮어낸 <충암대연구> 3 권. ⓒ 이동환
우리나라 바둑이 세계 정상급 기사들을 계속 배출해낼 수 있었던 바탕에는 '충암연구회'가 있다. 충암고등학교 출신 기사들이 모여 만든 충암연구회는 1987년, 최규병, 유창혁, 양재호, 김승준, 그렇게 몇 명의 기사가 모여 만들었다. 이른바 공동연구회인 셈인데 바둑 분야에서 특히 비기(祕技) 전수를 꺼리는 일본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시스템이다.

충암고 출신이 아니더라도 문호를 개방해 프로기사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도록 한 결과 이창호 사범은 물론, 현재 80여 명의 기사들이 활동하고 있다. 새로운 수에 대한 연구가 끊임없이 이어졌고, 공동 연구로 진행되다 보니 참여 기사 모두의 실력을 향상시키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김성룡 사범 역시 충암연구회 출신이다.

"2006년 뿐 아니라 앞으로 당분간 한국 바둑은 여전히 세계 정상 자리를 쉽게 놓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만큼 열심히 바둑 공부하는 나라가 없어요. 여기저기 바둑도장마다 열 살도 안 된 아이들이 하루 15시간씩 공부하는데 당하겠습니까? 일본은 논외로 치고, 중국이 한국을 넘어서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난리도 아닙니다만, 시스템이 경직되어 있는 사회라 그런지 우리나라 아이들만큼 열심을 내지 않습니다."

- 구체적으로, 여전히 정상권에 있는 기사들과 특징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A그룹과 B그룹으로 나눌 수 있겠네요. A그룹이라면 이창호, 이세돌, 최철한, 박영훈 사범들을 들 수 있지요. 현재 이 4강 체제가 균형이 잘 잡혀 있습니다. 국내외 대회를 통틀어 여전히 강한 이창호 사범, 세계대회에 유독 강한 이세돌 사범, 국내대회에서 무서운 힘을 보여주는 최철한 사범, 그리고 속기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박영훈 사범이 막강한 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B그룹으로는 영원한 바둑황제 조훈현 사범과 유창혁 사범을 비롯해 조한승, 원성진, 송태곤 같은 기사들을 꼽을 수 있단다. 그 뒤를 이어 특히 1989년생 기사들 가운데 천재가 많다고 한다. 김지석, 강동윤 같은 어린 기사들이 바로 그들인데 1987년생 가운데 두각을 나타냈던 이영구, 고근태 같은 기사들을 앞서고 있단다. 2006년에, 87년생 기사들이 도약 못하면 그대로 89년생 신예들에게 자리를 내줄 판이라고 진단한다.

방송녹화를 앞두고 한국기원 3층 사무국에서 인터뷰에 응해준 김성룡 사범. 꿰뚫어보는 듯 직시하는 눈빛과 앙다문 입술, 그리고 날렵한 손끝에 강한 자존심이 묻어난다.
방송녹화를 앞두고 한국기원 3층 사무국에서 인터뷰에 응해준 김성룡 사범. 꿰뚫어보는 듯 직시하는 눈빛과 앙다문 입술, 그리고 날렵한 손끝에 강한 자존심이 묻어난다. ⓒ 이동환
"우리나라 바둑이 세계 정상이라고 해서 언제까지나 희희낙락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막힘없이 특유의 달변으로 인터뷰에 응하던 김성룡 사범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 우리 바둑계에 걱정하실 만한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걱정이라기보다, 아직도 여전한 소위 '천재만들기' 프로그램을 전국의 바둑도장들에서 행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조심스러움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세요. 기재가 있다고 판단되면 열 살도 채 안 된 아이들을 시험 때 말고는 학교도 보내지 않은 채 하루 10시간 이상, 또는 15시간씩 공부를 시킨다 이 말입니다. 과연 문제가 없을까요?"

아무리 재능이 있다 해도 모두 이창호가 될 수는 없다. 현재 한국기원 소속으로 200여 명의 프로기사들이 있는데 솔직히 말해 정상권에 속하지 않고는 바둑만으로 먹고 살기는 힘들다고 한다. 따라서 나중에 프로가 못 되더라도, 또는 정상권에 진입하지 못했을 때 다른 방향으로 충분히 사회 생활할 수 있는 교육을 시켜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문제란다. 바둑이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된다면 지금의 천재 만들기 시스템에 대해 할 말 없다고.

"그렇지 않다면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재능 있는 자녀를 둔 부모들부터요. 순전히 제 개인 생각인데요. 최소한 고등학교 졸업 정도의 학력을 취득하지 않으면 입단시키지 않는 시스템도 고려해야 합니다. 이창호 사범 같은 기재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어려서부터 바둑 말고는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채 나이 서른쯤 해서 바둑으로 두각 내지 못한다면 뭐 해 먹고 살 거냐고요. 다른 어떤 사회 조직에 적응할 수 있겠느냐 이 말입니다."

연구와 분석에 능한 사람답게 김성룡 사범은 단호했다. 그의 말대로, 꾸미거나 숨기는 사람이 아니라는 인상이 강하게 느껴졌다. 세 살 된 딸 '다은'이에게 나중에 바둑이야 가르쳐 주겠지만, 혹 재능이 보인다 할지라도 현재의 천재 만들기 시스템 같은 데는 내몰고 싶지 않다고 강한 어조로 얘기한다. 자신감과 당당함으로 거침없이, 꾸밈없는 해설로 사랑받아온 김성룡 사범. 그의 솔직한 입담에 귀 기울이는 팬이 많아졌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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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커서 '얼큰샘'으로 통하는 이동환은 논술강사로, 현재 안양시 평촌 <씨알논술학당> 대표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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