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김준
ⓒ 김준
ⓒ 김준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

부안군 위도는 40여 년 전까지 영광군에 속했다. 정치적 흥정 속에 생활권과 무관하게 족보를 가져야 했던 섬들은 위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위도가 영광군에 속하기 전에는 부안현에 속한 적도 있기 때문에 제대로 찾아온 점도 있다. 행정구역상 어느 쪽에 속하든 위도 주민의 생활권과 뱃길이 부안이었던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다만 부안이라고 해서 지금의 격포나 부안읍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고 정확하게는 줄포였다. 당시 줄포는 정읍과 가까워 기차를 통해 서울로 열린 길이 위도 섬사람들에게 최적의 한양 길이었다. 이런 탓에 위도 사람들에게 부안읍이나 격포는 딴 동네나 마찬가지였다. 줄포가 뻘이 쌓여 포구기능을 잃어가면서 18~19세기의 위도파시의 화려한 영화도 점점 사라졌다.

갯벌이 좋은 줄포만에서 생산되는 자염은 18~19세기 품질이 좋아 최고의 상품으로 인정받았다. 여기에 위도를 중심으로 칠산바다에서 잡힌 생선과 어우러지면서 최고의 젓갈과 굴비가 만들어 질 수 있었다. 여기에 내륙과 연결되는 편리한 교통은 당시 위도가 영화를 누릴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줄포가 포구의 기능을 잃었고 고기잡이 배들도 동력화, 규모화되면서 부안의 중심포구가 곰소로 그리고 격포로 이동하면서 위도는 새로운 선택을 해야 했다.

역사로 보나 생활문화로 보나 위도는 줄포 생활권이었기 때문에 격포에 새로운 포구가 열렸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격포나 부안읍에 동화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난 핵폐기장 후보를 둘러싼 위도 주민과 부안읍(격포) 주민들 간의 차이 혹은 갈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측면도 고려되어야 한다.

ⓒ 김준
ⓒ 김준
위도의 치도리나 대리에서 바라보면 곰소만과 함께 영광 원자력발전소가 한눈에 들어온다. 위도의 앞 바다를 영광원자력 발전소에 내준 탓에 주민들은 늘 핵발전소의 망령에 시달려왔다. 주민들은 지난 영광원자력발전소 건설과정에서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앞마당을 내줘야 했다. 그리고 온배수 피해를 비롯한 어족자원 고갈의 원인일 수 있다는 환경론자들의 무성한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그 바다에서 잡은 조기를 '영광굴비'라고 했다. 당시 위도가 영광군에 속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같은 바다의 생태환경에 기대어 살아가는 생태공동체와 같았던 것이다. 이들 어민들에게는 영광, 부안, 고창의 경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지만 바다건너 이웃마을들은 영광원자력 발전소 건설로 어업 피해보상을 보상을 받았지만 같은 어장에서 고기를 잡던 위도 주민들은 고려도 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최근 부안군에서도 벌어졌다. 새만금 사업이 그것이다. 모두들 새만금사업 이야기를 하면 방조제 안쪽만 주목하지만 사실 방조제 밖의 피해도 만만치 않다. 이미 격포에서는 물길이 바뀌었고 쭈꾸미를 비롯해 가을전어가 철을 잃고, 어획량도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위도에서 그물질을 하는 어민들은 철이 되면 일주도로에 그물을 널고 도리깨질을 하는 것이 일이다.

과거에는 한철 내내 바다에 넣어두어도 그물에 '떼꼽'이 끼는 일이 없었지만 지금은 새만금 방조제로 인해 유속이 느려지면서 바닥에 뻘이 쌓이고 그물코에 부유물들이 붙어서 한사리를 버티기도 힘들다. 뿐만 아니라 서해에 서식하는 고기들의 70%가 산란하고 자라는 갯벌이 파괴되면서 위도를 지나던 고기들도 보이질 않는다. 이래저래 위도 주민들은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진 꼴이 되고 만 셈이다.

ⓒ 김준
ⓒ 김준


안 나는 생선이 없던 곳, 요즘은 멸치도 안 잡혀

위도에서 지금 잡히는 조기가 아니라 멸치이다. 위도 띠배놀이로 유명한 어촌마을 대리로 들어서는 길 양쪽에는 멸치 건조대가 자리를 잡고 반긴다. 장승이 내려다보는 앞 바다에는 멸치배들이 닻을 내리고 휴식을 취하고 있다. 멀리 보이는 영광원자력발전소는 하얀 모자를 눌러쓰고 위도를 바라보고 있다. 그 사이에는 형제봉이 사이좋게 마주보고 있다.

4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위도 어민들은 멸치를 잡지 않았다. 멸치를 잡으면 큰 고기들이 오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당시에는 위도 근처에서 명태와 큰 오징어를 제외하고는 조기, 갈치, 고등어, 아지, 삼치, 병어 등 안 나는 생선이 없었다. 특히 조기철이 지나고서도 고등어보다 맛이 훨씬 좋은 아지를 잡는 배들이 팔도에서 몰려왔었다고 한다. 지금은 멸치그물에 작은 갈치새끼들이 들어올 뿐이다.

ⓒ 김준
멸치도 위도 근처 어장에서 잡히지 않기 때문에 더 먼 바다로 나가야 한다. 이렇다 보니 과거에 작은 배로 작업을 하던 어민들이 좀 큰 배를 건조하지 않으면 조업이 어려워지게 되었다. 근데 어디 어민들이 곳간에 돈을 쌓아두고 살던가. 모두 빚이다. 배를 건조하던 10여 년 전에는 수입도 되지 않고 멸치 값이 최고 호황을 누리던 때였다.

혹자들은 당시 대통령과 연관시켜서 이야기를 하지만 어민들의 입장에서는 멸치 값이 좋다보니 너도 나도 투자해서 큰 배를 짓고 성능이 좋은 어탐기도 설치했다. 이러다 보니 지난해처럼 해파리의 출현으로 제대로 그물질 한번 못하고 철을 넘긴 해에는 빚을 갚기 위해 빚을 내야 하는 실정이었다.

당장이라도 어장질을 작파하고 싶지만 바로 들어오는 차압이 무서워서 그짓도 할 수 없다고 한다. 여기에 과거 멸치값이 좋아 돈을 물 쓰듯 했던 어민들의 씀씀이도 한 몫을 했다.

ⓒ 김준
지난 핵폐기장 유치와 관련 몸살을 앓을 때 일부 선주들이 찬성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이 놈의 빚과 무관하지 않다. 빚을 갚기 위한 '현금보상'이라는 유혹 때문이라는 것이 주민들의 이야기이다. 늘어가는 빚 청산하고 고향을 떠나면 된다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멸치가 많은 것도 아니다. 먼 바다로 밤새 헤매며 어탐기로 멸치를 찾아 다녀야 한다. 여기에 드는 식구미(배에서 먹고 생활하는 비용)며 선원들 인건비를 제하면 그렇게 남는 것도 없다. 그래도 쳐다볼 곳이라고는 바다 밖에 없다는 것이 위도 사람들의 실정이다.

덧붙이는 글 | 위도 관련 내용을 몇 차례로 나누어 연재합니다. 이 기사는 <신황해시대>에도 제공됩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