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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큰 바둑 조훈현 사범
여전히 큰 바둑 조훈현 사범 ⓒ 이동환
바둑이 취미가 아닌 사람이라 할지라도 세계바둑황제 조훈현(53) 사범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국바둑의 위상을 세계 정상에 올려놓은 공로도 공로지만, '권불십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20년 이상 철권을 휘둘렀으며, 독수리보다 매서운 행마로 중국과 일본의 기사들이 여전히 어려워하는 1순위 승부사인 까닭이다.

아홉 살에 프로에 입단해 세계 최연소 기록을 갖고 있는 천재 조훈현의 여정은 화려하다 못해 기록으로 옮기는 일조차 버거울 정도다. 그의 근황과 한국바둑의 향후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나는 지난 17일(목), 바둑TV 휴게실에서 그를 만나 보았다.

다시 음미하는 1989년 9월 5일 '싱가포르 대첩'

80년대 한국바둑의 위상은 중국과 일본에 의해 처절할 정도로 무시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대만의 거부 '잉창치'가 파격이라 할 우승상금 40만 달러를 흔쾌히 내걸고 세계바둑대회를 개최한 데는 중국이 우승할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네웨이핑'이라는 걸출한 중국의 스타! '중일수퍼대항전'을 통해 일본의 프로 강호들을 차례로 무릎 꿇린 그는 우승후보 0순위였다.

한국에서는 조훈현만이 출전자격을 얻었을 뿐이었다. 그가 혼신을 다 쏟아 부은 결과, 결승에서 네위이핑과 맞붙게 되었다. 네웨이핑이 결승에 오르자 중국은 당연한 결과라는 듯 벌써부터 잔치 분위기였다. 결승은 5판 3선승제. 2:2 팽팽한 접전을 이룬 두 영웅은 이제 마지막 판 승부를 가리기 위해 72층을 자랑하는 싱가포르의 웨스턴스탠포드 호텔 특별대국실에 마주 앉았다.

1989년 9월 5일(화) 싱가포르 웨스턴스탠포드 호텔 특별대국실.
1989년 9월 5일(화) 싱가포르 웨스턴스탠포드 호텔 특별대국실. ⓒ 사진제공 : 조훈현닷컴
흑이 한 수 두면 흑이 유리해 보이고, 백이 한 수 두면 백이 유리해 보이는 접전 끝에 조훈현이 흑 145수째 돌을 반상에 드리우자 침통한 표정의 네웨이핑이 돌을 던지고 말았다. 경천동지! 드디어 세계 바둑계 정상에 조훈현이 우뚝 서는 순간이었다. 당시 한국기원에는 200여 명의 팬들이 모여 명해설가 김수영 사범의 해설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나 역시, 학원 강의를 미루고 그 자리에 초조하게 서 있었다.

"조훈현이…, 조훈현이 드디어 이겼습니다. 팬 여러분 기뻐해주십시오. 네웨이핑이 결국 돌을 던졌답니다. 만세! 만세!"

오후 네 시. 김수영 사범(지난 5월 20일 작고)이 조훈현의 우승 소식을 전하며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해설장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따라 만세를 불렀고 감격에 겨운 나머지 울음을 터뜨렸다. 나도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고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그 역사의 현장에 서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자랑스러워 아무나 부둥켜안은 채 길길이 뛰기까지 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때의 감정이 다시 북받쳐 올라 심장을 떠받든 탕갯줄이 마냥 뛴다.

'잉창치배' 우승 이후 조훈현은 유창혁, 서봉수, 이창호 같은 불세출의 기사들과 함께 세계바둑대회를 독식하다시피 하며 한국 바둑을 무시하던 중국과 일본의 오만한 고수들을 차례차례 무릎 꿇렸다. 2005년 현재, 중국과 일본은 오히려 한국 바둑을 연구하고 있다. 20여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한국바둑의 위상이 여기까지 이르게 된 들머리에 조훈현이 당당하게 서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싸움의 신(戰神) 조훈현, 그는 여전히 승부사다

일본에서 공부하던 소년 시절
일본에서 공부하던 소년 시절 ⓒ 사진제공 : 조훈현닷컴
"요새는 성적 잘 못내요(웃음). 젊은 친구들이 워낙 강한 탓에 단칼에 나가떨어질 때가 많아요. 바둑황제요? 그거 옛날 얘기죠, 하하하! 옛날에는 '제비'다 '전신(戰神)'이다 하면서 꽤나 두려워들 했는데 요즘에는 저를 만나면 오히려 반가워한다니까요?"

요즘 어찌 지내시냐고 묻자 특유의 엄살(?)과 입담이 쏟아진다. 원래 조훈현 사범의 엄살은 정평이 나 있다. 그의 엄살에 녹아 잘 짜놓은 바둑을 놓쳤다는 일화는 부지기수다.

제비라는 별명은 그의 행마가 워낙 화려해 '물 찬 제비'보다 더 날렵하다고 해서 붙었다. '싸움의 신'이라는 별칭은, 전투에 관한 한 그를 따라올 사람이 없다고 해서 붙은 경우다. 그는 여전히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주요 대국에 임하고 있는 최고의 승부사다.

그는 서울 평창동에 살고 있다. 아내(정미화씨)와 함께 일남이녀를 두고 있는 평범하면서도 다복한 가장이기도 하다. 늘 산에 오르며 건강을 다지는 그는 지천명이 넘은 나이에도 뱃살이 없다. 90년대 중반까지 대국할 때마다 담배 '장미'를 서너 갑씩 피워댔던 그는 이후 담배를 딱 끊고 등산으로 체력을 기른다. 술은 체질상 단 한 잔도 못 마신다.

- 못 드시는 술 때문에 일화도 꽤 있죠? 조치훈 사범이 일본에서 성적 내고 금의환향했을 때 그 기념 대국에서 패하고 술 몇 잔에 기절(?)까지 하셨다는 얘기도 유명한데요.
"술은 원래 못 마시니까요. 그때 포함해서 평생 한 세 번 정도, 못 마시는 술 두어 잔 마시고 쓰러진 적이 있어요(웃음)."

- 과거와 비교하는 일이 조금 우습기는 하지만, 요즘 젊은 기사들에 대해 굳이 평을 하신다면 어떻습니까?
"글쎄요. 기도(棋道)가 좀 부족하다 할까요? 승부세계라는 게 결국 처절한 싸움인 만큼 이기는 것이 능사지만 너무 인간미가 부족한 면도 가끔 보여요. 세태가 그러니까 딱히 뭐라 꼬집을 일만은 아니지만 과거에 비하면 참 아쉽지요. 돈만이 전부는 아니거든요."

예전과는 달리, 어린 학생들이 바둑보다는 인터넷 게임에 더 몰두하는 이즈막 바라보게 되는 한국 바둑의 미래, 가까이는 내년부터 향후를 어찌 보느냐 하는 질문에 그는 단호하게 "아직은 걱정 없다"고 말한다. 일본은 쇠퇴기를 벗어날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고, 중국은 국가 차원에서 바둑을 지원하고 인재들을 양성하고 있지만, 이창호를 넘어설 기재를 가진 기사가 아직은 보이지 않는다고 냉정하게 평한다.

- 국내에서 이창호 사범을 뛰어 넘을 기재가 보이는 기사들을 굳이 꼽는다면 누구를 들 수 있습니까?
"어려운 질문이군요. 너무 많아요. 권갑룡 바둑도장을 비롯해 프로사범들이 지도하는 각 도장에서 배출되는 신인들의 실력이 프로 입단만 하면 바로 본선멤버가 될 정도로 강합니다. 가장 가까운 시기에 이창호를 훌쩍 넘어설 기재를 굳이 꼽는다면 이세돌, 최철한, 박영훈을 들 수 있지요. 주목할 만한 친구들이에요."

귀국해 공군에서 복무하던 시절.
귀국해 공군에서 복무하던 시절. ⓒ 사진제공 : 조훈현닷컴
한국 바둑을 일으킨 조남철 선생(맨 왼쪽)과 함께, 은관문화훈장을 받으며.
한국 바둑을 일으킨 조남철 선생(맨 왼쪽)과 함께, 은관문화훈장을 받으며. ⓒ 사진제공 : 조훈현닷컴
- 선생님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일, 혹은 가장 좋았던 일 세 가지 정도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역시 제 1회 잉창치배바둑대회에서 우승한 일이 제일 좋았던, 잘 한 일 같아요. 두 번째는 이창호를 제자로 키워냈다는 사실이고요. 세 번째는 정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받은 일이 되겠군요."

- 부인 정미화씨와 만난 일이 빠졌네요?
"아, 그런가요? 이거 큰일 났네! 아내가 이 기사 보면 잔뜩 삐치겠는데요(웃음)?"

- 30년이 넘게 한국 바둑 정상에서 늘 외로우셨을(?) 텐데요. 그간 타계한 프로 사범들도 많이 계시고요.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분들도 있지요?
"그럼요. 한국 바둑을 위해 애쓰셨던 많은 분들이 떠났지요. 특히 강철민, 정창현 사범 같은 분들이 늘 생각납니다. 정창현 사범께서는 제가 젊었을 때 늘 '우리 사위 조훈현' 하시면서 아껴주셨지요. 그때 따님이 중학생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민망하게도 저만 보면 '사위, 사위' 하고 부르시는 통에…(웃음), 지금도 많이 기억납니다."

- 제가 감히 볼 때 조훈현 사범께서는 프로기사로서 이룰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이루셨는데요. 아직도 바라는, 원하시는 게 있습니까? 또,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바둑을 두시겠습니까?
"특별히 무엇을 원한다기보다 승부사로서 바둑에 임할 때만큼은 아직도 절대 지고 싶지 않습니다. 나이도 들었고 젊은 강자들이 워낙 많아 그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는 횟수가 많지만 분명히 말하건대 승부사는 항상 승리만을 염원합니다. 승부 외에, 이제는 바둑계를 위해서 다른 할 일도 많지요. 그런 면에 더욱 치중하려고 합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글쎄요. 그건 그때 가봐야 알겠는데요? 하하하!"

바둑돌을 놓는 모습을 보여 달라는 청에 주저 없이 빠른 손놀림을 보여주는 조훈현 사범. 자신의 손끝을 노리는 눈매가 여전히, 독수리는 저리 가라다.
바둑돌을 놓는 모습을 보여 달라는 청에 주저 없이 빠른 손놀림을 보여주는 조훈현 사범. 자신의 손끝을 노리는 눈매가 여전히, 독수리는 저리 가라다. ⓒ 이동환
한 시간 넘게 그와 인터뷰를 하는 동안 내가 주목한 것은 그의 눈빛과 손이었다. 돌을 쥐고 바둑판에 놓는 손끝은 제비라는 별명과 달리 평범하면서도 뭉뚝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손끝을 노리는 눈매는 먹이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수직강하 하는 독수리처럼 서슬이 여전했다.

헤어지며 한국기원 들머리에서 한 컷. 승부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한국바둑의 미래를 위해 여러 일을 하고 싶다고.
헤어지며 한국기원 들머리에서 한 컷. 승부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한국바둑의 미래를 위해 여러 일을 하고 싶다고. ⓒ 이동환
한국기원 들머리에서 사진 몇 장 더 찍고 그와 헤어지면서 나는 지난 30여 년 동안 팬으로서 그에 대하여 갖고 있었던 내 생각이 맞았음을 확인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는 여전히 한국바둑을 이끌고 있는, 그림자만 수십 리에 이르는 큰 나무, 큰 바둑이었던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에 이어 바둑해설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김성룡 사범의 인터뷰까지, 두 꼭지로 2006년 한국 바둑에 대한 전망과 이런저런 바둑계 이야기를 한 번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조훈현 선생 홈페이지 바로 가기 ☜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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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커서 '얼큰샘'으로 통하는 이동환은 논술강사로, 현재 안양시 평촌 <씨알논술학당> 대표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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