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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 옛 통시. 까치밥으로 남겨 놓은 주홍빛 감이 등불이 되어 세상을 밝히고 있다.
실상사 옛 통시. 까치밥으로 남겨 놓은 주홍빛 감이 등불이 되어 세상을 밝히고 있다. ⓒ 이승열

해가 서쪽으로 꼴깍거리는 사이, 천지간을 달빛이 채우기 시작했다.
해가 서쪽으로 꼴깍거리는 사이, 천지간을 달빛이 채우기 시작했다. ⓒ 이승열
아줌마들이 늦가을 여행을 떠난다하면 모두들 팔자 좋은 여편네들이라고 부러워한다. 생각하니 팔자가 좋긴 하다. 이 계절에 이렇게 떠날 수 있음은 어찌됐든 행운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 떠남을 여행이라 부르지 않는다. 연수라고 부른다. 투쟁하듯이 사십 년을, 오십 년을 주부로 직장인으로 살았다. 여행은 늘 유희가 아니라 다시 견뎌내야할 힘을 얻는 담금질의 시간이다.

실상사를 처음 갔을 때부터 난 실상사가 좋았다. 귀농학교, 도법과 수경스님, 인드라 생명 공동망 그런 것들을 몰랐을 때도 좋았다. 그들의 실천불교를 보고 실은 더 좋다. 유명세에 비해 사하촌이라 부를만한 거리가 없는 것도, 변변한 음식점 하나 없는 것도 좋다. 기껏 돗자리나 광주리에 직접 수확한 농산물을 펴놓고 팔고 있는 촌아낙들이 몇 있을 뿐이다.

힘들게 걸어 올라가야 닿을 수 있는 절집은 그 나름대로 운치와 분위기가 있지만 어쩐지 실상사는 만만하다. 그런데 그 만만함은 깔봄이 아닌, 100% 편안함이다. 다리가 불편한 우리 엄마도, 여든 다섯 시엄니도 옆집 마실 가듯이 편안이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이다.

지금은 화강암의 돌다리로 세심천을 건너지만, 예전에는 징검다리였다 한다. 80년대 초반에는. 지금도 다리 아래 징검다리가 있다하니 다음에는 덕지덕지 쌓인 세속의 먼지를 세심천에 툴툴 털어 버리고 징검다리를 건너 실상사에 닿아야겠다.

보광전 앞에서 천왕봉을 바라보는 순간 가슴이 뻥 하고 뚫렸다.
보광전 앞에서 천왕봉을 바라보는 순간 가슴이 뻥 하고 뚫렸다. ⓒ 이승열

천왕봉에서 해가 떠 올랐다. 빛이 너무 밝아 천왕봉이 보이지 않았다.
천왕봉에서 해가 떠 올랐다. 빛이 너무 밝아 천왕봉이 보이지 않았다. ⓒ 이승열
실상사 요사채에서 하룻밤을 꿈꾼 것은 절대 실현 불가능한 발칙한 생각이 아니었다. 올 1월 실상사 산문을 들어서는 순간 범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사위는 온통 어둠뿐이고 종소리만 들렸다. 종을 치는 스님의 실루엣만 보였다. 타종이 끝나자 법당에서 목탁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어렴풋한 지리산의 능선이 하늘과 만나 형체만 보일 뿐이었다. 종소리는 넓고 깊었다. 오래 아주 오랜 시간 난 화석이 되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동행한 후배 H가 고백했다. 고등학교 때 딱 두 번 본, 자신의 존재를 잘 모르는 삼촌이 실상사 스님이라고… 언니 두 살 때 교복과 책가방을 아궁이에 쳐 넣고 그 길로 산으로 들어간 삼촌이라고 했다. 산을 좋아하더니, 시를 좋아하더니 결국 산으로 갔다고 했다.

그때부터 실상사 요사채를 꿈꿨다. 그리고 열 달 동안 H를 채근했다. 얼마나 어려운 일 인 줄 알면서도 실상사에서의 하룻밤이 간절했다. 결국 H는 아주 힘들고 어색하게 전화를 했다. 종무소에 미리 전화하면 내치지 않고 기꺼이 잠자리와 공양을 제공하는 실상사의 풍속을 미리 알았던들, 이미 흔적조차 희미해진 오래된 핏줄에 기대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나무는 오랜시간 달과 별을 바라보았다.
나무는 오랜시간 달과 별을 바라보았다. ⓒ 이승열

연못가에는 꽃이 피어있고, 연못 안에는 감이 달려 있었다. 달은 감나무 사이에 걸려 있었다.
연못가에는 꽃이 피어있고, 연못 안에는 감이 달려 있었다. 달은 감나무 사이에 걸려 있었다. ⓒ 이승열

종소리가 댕댕 울리고 난 뒤 법당에서 다시 종소리가 났다. 그리고 목탁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종소리가 댕댕 울리고 난 뒤 법당에서 다시 종소리가 났다. 그리고 목탁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 이승열

내 몸에서 종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H는 떠나기 3주전쯤 스님과 통화했다는 메모를 남겼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뭐라고 말해야할지 몰라 '저는 ○○○의 여식이고, ○○의 동생입니다. 삼촌이 출가한 뒤 태어난 아이지요. 친구들과 십일월 둘째 주에 실상사에 가려고 하는데 요사채에서 하룻밤 묵을 수 있는지요?' 달 때문이었다. 십일월 둘째 주에 떠난 것은. 끝없이 이어지는 지리산의 능선에, 천왕봉에 달빛이 뿌려지는 풍경을 실상사 산문에서 보고 싶었다.

실상사에 가서 실상을 찾아 헤맬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아니 꿈도 꾸지 않았다. 실상사에 간다 하니 누군가 그랬다. 애써 실상을 찾지 말라고. 가만히 가슴을 열어 놓으면, 오감을 그곳에 맡기면 언젠가는 실상이 내게로 올 것이라고….

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가 그곳에 서 있고, 어둠 속에서 범종이 울리고, 그 종소리가 내게 오면 그만이었다. 종소리가 깊게, 아주 깊게 울림이 되어 내게로 왔다. 오랜 동안 내 몸 속에서 종소리가 났다. 종이 내 육신인지, 내 육신이 종이 되었는지 난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알 필요조차 없었다.

날 닮은 약사전 부처님. 내 코랑 똑같이 생겼음을 옛친구도 인정했다.
날 닮은 약사전 부처님. 내 코랑 똑같이 생겼음을 옛친구도 인정했다. ⓒ 이승열

나를 닮은 붓다 실상사 약사여래

약사전의 붓다는 앞에서 보면 콧대가 약간 죽고, 콧망울만 튀어나와 그다지 잘 생겨 보이지는 않는다. 약사전에서 한 발자욱도 움직이지 않고 내내 앉아 있는 J가 감탄한 입술도 실은 아랫입술에 비해 윗입술이 조금 더 두툼해 그리 균형 있게 잘 생긴 얼굴은 아니다. 철불의 가장 빛나는 부분은 넓고 두터운 가슴이다.

남편은 그토록 납작하고 작은 코로 숨쉬고 사는 것이 용하다고 매일 놀려댄다. 그런데 넓은 가슴의 붓다가 내 코처럼 생겨 기분이 아주 좋다. 정면에서는 그리 미남으로 보이지 않는 붓다를 살짝 틀어 얼짱 각도에서 보면 세상에, 그보다 더 잘 생긴 부처는 이 세상에 아직 없다. 그는 불단 높은 곳에서 중생을 내려다보지 않고 맨 바닥에 앉아있다. 눈높이에 맞춰서….

마음이 아픈 사람, 그리고 육신이 아픈 사람을 위해 그는 존재한다. 난 불교도도 아니면서 무릎을 대고 팔꿈치를 대고 오체투지의 자세로 엎드려 한 가지 염원만을 말한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 모르는 사람, 그들의 건강한 정신과 육신을 기원한다. 그리고 말미에 살짝 끼워 넣는다. 나와 남편과 아이를 잘 보살펴 달라고….

횃대에 옷을 가지런히 걸고, 횃대보에 수를 놓아 혼수를 장만하던 시절을 생각했다.
횃대에 옷을 가지런히 걸고, 횃대보에 수를 놓아 혼수를 장만하던 시절을 생각했다. ⓒ 이승열

메주를 쑤어 방이 좀 부족한 날이라고 했다.
메주를 쑤어 방이 좀 부족한 날이라고 했다. ⓒ 이승열
저녁 공양을 하러 밖으로 나오니 유성이 빠르게 노고단 쪽으로 떨어지고 있다. 삼십 년 만에 보는 유성에게 소원을 빌지 못했다. 별똥별을 주워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쫀득쫀득한 맛이 주전부리로 최고라는 어른들의 말을 믿고, 별똥별을 주우러 다닌 적이 있었다. 별똥별이 떨어지고 얼마 안 있어 스님이 도착하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H는 돌연 긴장하기 시작했다. 어찌 떨림이 없겠는가? 의식을 갖고는 태어나서 거의 사십 년 만에 처음 만나는 핏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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