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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사로 들어가는 5리 숲길.  숲이 우거져서  낮에도 어둑어둑 합니다.
갑사로 들어가는 5리 숲길. 숲이 우거져서 낮에도 어둑어둑 합니다. ⓒ 김유자
걷다보면 어느덧 마음이 고요해지는 오릿길

대전에 산 지 십 년, 해마다 가을이면 갑사로 들어가는 오릿길을 걷곤 했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이 길을 걷습니다. 11월을 훌쩍 넘겼으니 단풍이 가장 고울 시기야 지났지만 저는 이 시기를 오히려 좋아한답니다. 단풍이 한창일 때는 결코 느낄 수 없는, 낙엽 밟는 정취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산길마다 수북이 쌓인 낙엽을 살포시 즈려 밟으면, 잎들은 저마다 다른 소리를 냅니다. 아주 시들어버려 돌돌 말린 잎들은 사각사각 소리를 내고, 조금 덜 마른 잎들은 부스럭 부스럭 소리를 냅니다.

골짝기가 깊을수록 물소리가 맑고, 숲이 우거질수록 산빛이 그윽합니다. 간밤에 갑작스런 추위가 닥쳐오고, 그 바람에 잎들이 우수수 떨어지기도 했지만, 이 오리숲이 자아내는 고요한 정취는 여전합니다. 오릿길을 걷는 동안 어느새 마음이 고요함으로 충만해집니다.

갑사에서 개울을 건너면 보물 제 257호 갑사부도가  나옵니다.
갑사에서 개울을 건너면 보물 제 257호 갑사부도가 나옵니다. ⓒ 김유자
부도탑 기단부에 새겨진 사자의 모습. 양지 쪽에 털썩 주저앉아서 쿨쿨 잠자고 있는 듯 보이지요?
부도탑 기단부에 새겨진 사자의 모습. 양지 쪽에 털썩 주저앉아서 쿨쿨 잠자고 있는 듯 보이지요? ⓒ 김유자
갑사 경내를 둘러보고 난 다음 개울을 건너 대적전으로 향합니다. 갑사에 몇 번 와 본 사람은 알게 됩니다. 이곳이야말로 갑사라는 절집이 숨긴 보석같은 곳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대적전 앞에는 보물 제 257호 갑사부도가 있습니다. 부도의 기단을 들여다보면 잠자는 사자, 으르렁거리며 포효하는 사자의 모습 등 여러 가지 사자상들이 보입니다.

부도 옆 시누대 숲 사이로 터널같이 열린 길을 내려가면 길이만 해도 15m가 넘는 철 당간지주가 나옵니다. 아마 예전에는 저 깃대의 끝에 갑사를 알리는 깃발이 나풀거렸을 테지요. 쓸모를 잃어버린 당간지주가, 가을을 상징하는 쓸쓸한 오브제가 되어 묘한 슬픔을 자아냅니다.

계곡 옆에 자리한 전통찻집입니다. 무척 고즈넉해 보이지요?
계곡 옆에 자리한 전통찻집입니다. 무척 고즈넉해 보이지요? ⓒ 김유자
다시 계곡을 건너갑니다. 계곡 옆에 자리한 커다란 단풍나무가 눈이 시리도록 붉습니다. 찻집 지붕까지 드리운 붉은 빛이 바라보는 이의 마음마저 황홀하게 합니다.

세상에는 혼자만 바라보기 아까운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런 제 마음을 눈치챘던지 지나가던 개 한 마리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단풍나무 잎을 바라봅니다.

신흥암 산신각을 에워싼 단풍이 갑사댕기처럼 아롱다롱 고왔습니다.
신흥암 산신각을 에워싼 단풍이 갑사댕기처럼 아롱다롱 고왔습니다. ⓒ 김유자
우선은 삼불봉까지를 목표로 삼고 산길을 올라갑니다. 3km가 약간 못되는 길입니다. 갑작스럽게 닥쳐온 추위와 바람이 떨어트린 잎들이 길섶마다 수북하게 쌓여 있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먼저 지나간 바람의 꽁무니를 따라서 가고 있는 셈이지요.

용문폭포를 지나갑니다. 위용을 뽐내는 저 폭포도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소리를 베고 깊은 겨울잠에 들 겁니다. 한참을 걸어 올라가자 부처의 진신사리가 들어 있다는 천진보탑이라는 바위가 있는 신흥암에 당도했습니다.

산신각을 에워싼 단풍이 아직도 아름답습니다. 산봉우리가 머리에 이고 있는 하늘은 왜 저리도 파랗게 투명한 것인지요? 오래 바라보고 있노라면 왈칵 울음이 날 것만 같아 살며시 고개를 돌립니다.

산 중턱에서 만난 딱따구리.  겨울에 살 거처를 마련이라도 하는 것인지 제법 바쁘게 나무를 쪼아댑니다.
산 중턱에서 만난 딱따구리. 겨울에 살 거처를 마련이라도 하는 것인지 제법 바쁘게 나무를 쪼아댑니다. ⓒ 김유자
삼불봉 고개를 거의 다 올라섰을 무렵, 어디선가 딱, 따악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고개 들어 바라보니 딱따구리 한 마리가 부지런히 구멍을 파고 있었습니다.

따악 따악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 왔습니다. 소리가 유난히 큰 것은 가을산이 비어 있는 탓일 겁니다. 참 이상하지요? 비어 있는 것만이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게 말입니다.

오늘, 저 딱따구리는 계룡산을 하나의 악기로 만들어 연주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계룡산 산봉우리. 중계탑이 보이는 곳이 계룡산에서 가장 높은 천황봉(845.7m)입니다.
계룡산 산봉우리. 중계탑이 보이는 곳이 계룡산에서 가장 높은 천황봉(845.7m)입니다. ⓒ 김유자
산을 오르면서 깨우친 사랑의 아득함

마침내 삼불봉 고개에 다다랐습니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200여m 가량 더 올라가야 삼불봉입니다. 숨가쁘게 철제 계단을 올라갑니다. 철제 계단을 다 올라서자 계룡산의 위용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계룡산은 산행객들에게 가장 왼쪽에 있는 천황봉부터 시작해서 쌀개봉→관음봉→문필봉→연천봉 순으로 제 모습을 소개합니다. 멀리 바라다 보이는 천황봉이 아득해 보입니다.

사실 산에 오르면 모든 것이 아득해 보입니다. 산 아래 마을도 아득해 보이고 산 밑에 두고 온 사람들도 아득해 보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아득하다는 것은 절실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절실하다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속성이 아닐는지요? 어느 시인은 "그대가 곁에 있어도 그대가 그립다"고 했지만, 저는 그 말을 "그대가 곁에 있어도 절실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고 바꾸어 말하고 싶습니다.

산에 올라 보면 아득함을 알게 되고, 그렇게 아득한 사랑을 알게 됩니다. 그 아득함이 가슴 속에서 "야호~" 소리가 되어 터져 나옵니다. 저 산 아래 사는 누군가가 제 아득함에 대답해 주었을까요?

속칭 남매탑이라 부르는 청량사지 쌍탑입니다.
속칭 남매탑이라 부르는 청량사지 쌍탑입니다. ⓒ 김유자
삼불봉 고개를 되짚어 내려와 아름다운 전설이 어려 있는 남매탑을 향해서 내려 갑니다.

...한 스님이 수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호랑이가 스님 앞에 나타나 입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입속을 들여다보니 큰 가시 하나가 목구멍에 걸려 있어 스님이 빼 주었습니다. 그리고 호랑이는 한 처녀를 업어와 내려놓고 갑니다. 두 사람의 가연을 바랐던 것이겠지요.

스님은 처녀를 집으로 돌려보냈지만, 처녀의 부모는 다른 곳으로 시집보낼 수도 없는 처지이니 거두어 주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리하여 스님과 처녀는 남매의 의를 맺고 수행에 열중하다가 한 날 한 시에 입적했다고 합니다....


그 두 사람의 사리를 모신 것이 바로 이 두 개의 탑이라고 합니다. 그 처녀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 천년의 시공을 넘어 찾아온 나그네의 마음을 적십니다.

상신리 구룡사터 당간지주. 본래는 한 쪽이 깨어져 있었답니다.
상신리 구룡사터 당간지주. 본래는 한 쪽이 깨어져 있었답니다. ⓒ 김유자
깨끗한 영혼만이 티없는 소리를 낸다

남매탑에서 동학사 쪽으로 하산하는 대신 인적이 드문 상신리 마을 쪽으로 향해 갑니다. 길은 예상했던 대로 호젓합니다. 계룡산 자락 어느 길보다 고요하고,

가을은 이 길에다 제가 가진 음표들을 몽땅 떨어트리고 지나간 모양입니다. 낙엽들을 밟을 때마다 사그락 사그락 티없는 소리를 냅니다.

마른 나뭇잎을 본다.

살아서, 사람이 어떻게
마른 나뭇잎처럼 깨끗할 수 있으랴.

-정현종 시 '마른 나뭇잎' 전문


나뭇잎이 발 아래서 저렇게 소리를 내는 것은 깨끗하게 살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내 영혼도 저렇게 티없이 맑은 소리를 낼 수 있을까요?

남매탑에서 상신리 마을까지는 거의 십리길이 다 되지만, 지루하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낙엽이 내는 소리에 마음을 흠뻑 적시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산행의 끝에 이르자, 마을 한 가운데에 자리한 당간지주가 길손을 반겨줍니다.

신선봉(우)에서 장군봉(좌) 쪽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들. 이곳은 아직도 단풍이 한창이었습니다.
신선봉(우)에서 장군봉(좌) 쪽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들. 이곳은 아직도 단풍이 한창이었습니다. ⓒ 김유자

계룡산, 내 영혼의 노적가리

상신리 마을은 참 고풍스러운 마을입니다. 마을 위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도예촌이 있어 애들과 함께 들러서 도자기 만드는 과정을 실습할 수도 있지요.

여기가 버스 종점이지만, 조금 더 걷다가 버스를 타기로 하고 터덕터덕 아스팔트길을 걸어갑니다. 벼베기를 끝낸 들녘엔 여기저기 노적가리들이 쌓여 있습니다. 이 가을이 가지 전, 저도 저렇게 제 영혼의 양식을 위하여 저렇게 노적가리 몇 개를 쌓아두고 싶어집니다. 아니, 어쩌면 저 계룡산 봉우리들이 알게 모르게 제가 쌓아 놓은 영혼의 노적가리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계룡산도 저를 따라 걷습니다. 처음에는 신선봉이 따라 걷더니 한참 지나니 장군봉이 따라 걷습니다.

 

덧붙이는 글 | '청풍명월 가을명소' 응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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