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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원
입동이 지난지도 벌써 일주일이 다 되어갑니다. 겨울 문턱에 서서 지는 가을이 아쉽다고 매달리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 알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그렇다고 그 아쉬움을 쉽게 버릴 수 없습니다.

강 건너 갈대가 무리지어 흔들리고 있습니다. 더러는 꺾이고 더러는 상했어도 부는 바람 따라 가을 한 철 넉넉히 흔들리며 살았습니다. 아침이슬 젖은 몸 흔들어 말릴 때와, 따가운 햇살 받아 넉넉히 흔들릴 때면 싱그러운 아름다움이 함께 묻어났습니다.

ⓒ 이기원
가을이 간다는 건 그런 싱그러움이 함께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아쉽고 서운합니다. 저 갈대들도 사나운 겨울 바람 앞에 서면 사시나무보다 더 심하게 요동치며 흔들리겠지요. 제 앞에 닥칠 시련을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들은 안개비에 젖은 몸 살랑살랑 흔들고 있습니다.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하게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 고정희, <상한 영혼을 위하여> 중에서


ⓒ 이기원
갈대숲 지나 한참을 오르다보니 마른 풀잎에 주렁주렁 빗방울이 달려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하얀 열매처럼 보입니다. 가까이 가서 눈여겨보면 맑고 투명한 구슬처럼 보입니다. 마른 풀 다시 살아나 눈부신 열매 맺은 것처럼 여겨집니다. 빗방울 열매가 바짓가랑이에 지천으로 묻어 금방 촉촉하게 젖기 시작했습니다. 낙엽이 되어 떨어진 잎도 많지만 떨어지지 않은 단풍은 여전히 고운 가을 색깔입니다.

ⓒ 이기원
산을 오르다 문득 내려다보니 갈대 하나가 빗방울을 머금고 있습니다. 오를 땐 몰랐는데 돌아서 내려다보니 길을 막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 갈대 너머로 펼쳐진 풍경도 여전히 가을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대로 세상을 사는 사내의 눈에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가을의 풍경입니다.

하지만 저 길 너머 강 건너에 사는 이들은 보이는 세상보다 한 걸음 먼저 일어나 한 걸음 먼저 준비하며 살아갑니다. 입동 지나면서 힘겹게 농촌을 지키며 살아오신 허리 굽은 할머니들은 김장 준비, 그 곁을 지키고 서 계신 할아버지들은 메주 쑤어 매달 준비를 하십니다.

그렇게 가을은 가고 겨울이 한 발 두 발 다가섭니다.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에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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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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