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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협 양산지부장 서춘식
사협 양산지부장 서춘식 ⓒ 전영준
인생 고개 육십 중턱에 들어선 양산의 사진작가 서춘식. 지난 1988년 한국사진작가협회(이하 사협) 양산지부 설립위원장을 맡아 양산사협 탄생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그 후 96년 사협 양산지부의 제4대 지부장을 거쳐 올 2월 또 다시 제7대 지부장을 맡음으로써 두 차례나 양산 사진예술의 지휘봉을 잡은 인물이다.

이제는 사진을 아는 이든, 그렇지 않은 이든, 양산바닥에서 사협 양산지부 지부장 이름 석자 '서춘식'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지만, 오늘날 양산시민 대부분이 그렇듯 서춘식 지부장 역시 본시부터 양산사람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안태고향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면. 그런 그가 양산사람이 된 것은 1969년 말께부터였다. 경주 문화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몇 곳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양산여중ㆍ고 교무과장으로 부름을 받아 오면서 그의 양산살이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때가 바로 사진작가 서춘식의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이었다.

"사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때부터였지요. 무엇이든 카메라만 갖다 대면 사진이 되어 나오는 것이 하도 신기해서 나도 사진을 찍어보고 싶었지만, 그 당시 카메라 한 대 값이 논 서 마지기는 팔아야 할 정도였으니, 내 손에 카메라를 든다는 게 어디 가당키나 했겠어요. 부모님께 말씀드리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아 속앓이만 하다가 꿈을 접을 수밖에…."

그러다가 양산에 와 안정된 직장을 갖게 되어서야 비로소 이녁이 번 돈으로 카메라 한 대를 장만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사진작가 서춘식의 사진인생이 시작된 셈이지만, 당시 낚시에도 한창 심취해 있던 그는 처음 얼마간은 무거운 낚시도구와 카메라를 둘러메고 낚시터를 다니다가, 차츰 카메라가 거추장스러워지면서 한동안 카메라를 손에서 놓아 버렸다. 그러나 고교시절부터 그토록 하고 싶었던 사진이었는데 어찌 쉬이 포기할 수 있었으랴….

"학교 서무과장을 한 8, 9년쯤 한 다음에 '서림문구'라는 자영업을 하면서 다시 카메라를 잡았습니다. 그 무렵에 양산에서 첫 출범을 한 라이온스클럽의 창단멤버로 참여하였는데, 마침 회원 중 한 분이 일본에 다녀올 일이 있어 그분께 귀로에 카메라를 한 대 사오시라고 부탁을 했어요. 꽤 쓸 만한 고급 카메라였지요. 그때부터 낚시는 버리고 오직 사진에만 매달렸습니다."

그에게 낚시는 잠시 동안의 외도였을 뿐, 본격적으로 사진에 빠져들고 보니 다른 것은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고 애오라지 사진밖에 모르겠더란다. 문구상은 아내에게 맡겨놓고 부지런히 이곳저곳을 쫓아다니며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사람 사는 모습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러면서 이녁이 뿌리를 내려 살고 있는 양산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싹트고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들이 마냥 좋았다. 이 무렵부터 그는 양산의 문화예술 전반에 대한 관심의 폭을 넓혀갔다.

왼쪽 <목동> 제1회 대한민국사진전람회 입선작(1982년) 84~85 한국사진연감 수록. 한낮, 소 먹이던 아이들이 풀밭에 엎드려 얘기를 나누는 사이 소들은 저들끼리 장난질에 빠져있다. 이 기가 막한 구도를 포착한 작가의 안목이 놀랍다. ▲오른쪽 <바라밀다> 경남사진대전 추천작가상 수상작(2000년 5월)
왼쪽 <목동> 제1회 대한민국사진전람회 입선작(1982년) 84~85 한국사진연감 수록. 한낮, 소 먹이던 아이들이 풀밭에 엎드려 얘기를 나누는 사이 소들은 저들끼리 장난질에 빠져있다. 이 기가 막한 구도를 포착한 작가의 안목이 놀랍다. ▲오른쪽 <바라밀다> 경남사진대전 추천작가상 수상작(2000년 5월) ⓒ 전영준
양산의 역사기록자로 활약

1985년 6월에 양산문화원 발기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을 때, 위원회 간사로 양산문화원 발족에 깊이 관여했던 그는 그해 12월 양산문화원이 창립된 뒤로 양산문화원 이사 겸 사무국장을 9년여 맡아 일했고, 이 기간 동안 삽량문화제(1~12회) 사무국장도 겸임했다.

그 뒤로 양산사협 설립에 이어 예총 양산지부 설립위원장으로 양산예총 설립에도 팔을 걷어붙였고 예총 양산지부 초대 지부장을 맡는 등 양산의 문화예술 중흥을 위해 남다른 열정을 불태웠다. 뿐만 아니라 양산시선거관리위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양산문화원 사무국장을 할 때 양산의 수많은 문화재와 유물들, 그리고 각종 민속자료들을 부지런히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하다 보니 내가 양산역사의 기록자라는 사명감이 생기더군요. 문화원 사무국장으로의 기본업무는 주로 밤에 하고 낮에는 카메라를 들고 역사의 현장을 찾아 헤맸습니다. 그러자 주위에서 더러는 사진에 미쳤다며 빈정거리기도 했지만, 그런 주위의 평판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어요."

<노 부부> 부산일보사진콘테스트 금상 수상작(1982년). 원동면 화제리 범서마을의 한 농가에서 노부부가 메주콩을 절구에 찧는 장면이다. 원래는 영감님은 툇마루에 걸터앉아 있고 할머니 혼자서 방아를 찧고 있었지만, 작가가 영감님더러 할머니 옆으로 오시라고 청을 해 이 장면을 연출했는데, 때마침 어디선가 거위 두 마리가 나타나 뜻하지 않은 구도가 잡혔다고.
<노 부부> 부산일보사진콘테스트 금상 수상작(1982년). 원동면 화제리 범서마을의 한 농가에서 노부부가 메주콩을 절구에 찧는 장면이다. 원래는 영감님은 툇마루에 걸터앉아 있고 할머니 혼자서 방아를 찧고 있었지만, 작가가 영감님더러 할머니 옆으로 오시라고 청을 해 이 장면을 연출했는데, 때마침 어디선가 거위 두 마리가 나타나 뜻하지 않은 구도가 잡혔다고. ⓒ 전영준
덕분에 그의 기록물들이 지난해 8월에 발간된 '양산시지(市誌)'의 사진자료로 유용하게 활용되었고, 또 올 2학기부터 양산 관내 초ㆍ중ㆍ고생들이 사용하게 될 양산교과서(양산사랑 재량활동 교재)에도 그의 사진자료가 여러 편 수록되었다. 특히 양산의 민속과 유물 사진들은 학계에서도 그 사료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장승 찾아 전국 일주

"몇 해 전부터 전국의 장승을 찾아 카메라에 담고 있습니다. 현재 전남의 일부 도서지방만 빼고 전국 90여 곳의 각종 기기묘묘한 장승들을 다 담았어요. 나머지 장승들의 촬영을 끝내면 사진집으로 출간하려 합니다. 이런 사진집을 돈 주고 사 볼 사람은 없을 터라 자비출판을 해 전국의 도서관이나, 학교 등에 기증을 할 생각인데 출판비용이 만만찮을 것이니 정작 책이 되어 나오는 것은 언제가 될지 모를 일입니다. 이 사진집이 완성이 되어 세상에 빛을 보게 되면 제 개인적으로도 매우 보람된 일이겠지만, 사료적으로도 큰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의 장승 사진취재는 울산 MBC와 KBS(여섯 시 내 고향) 등의 방송을 통해서도 널리 알려진 바 있다.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거짓 없이 전달해 주는 사진의 매력에 빠져 내일이면 다시 되돌릴 수 없는 흘러간 역사가 될 오늘의 역사 현장을 찾아 부지런히 발품을 팔고 있는 그는 앞으로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손에서 결코 카메라를 놓지 않겠단다.

"사진은 순간포착의 예술입니다. 글은 쓰다가 지치면 쉬었다 쓸 수도 있고, 그림이나 조각 등 다른 예술장르들도 잠시 미뤄두었다 나중에 다시 할 수 있지만, 사진은 '나중에'나 '다음에'를 하락하지 않습니다. 오늘까지 있다가도 내일은 없어질 수도 있는 것이 사진의 피사체입니다. 또 어떤 때는 한 장면의 사진을 찍기 위해 같은 장소를 여러 차례 연거푸 찾아가야 할 때도 있지요. 제 작품 중에는 필름 20롤 30롤을 써서 겨우 한 컷을 건진 것도 여러 편 있습니다."

<우리의 멋> 경남사진대전 대상작(1997년 7월). 양산사찰학춤의 대가 김덕명 선생과 그의 제자들의 학춤을 카메라에 담았는데, 마치 실제로 학이 날아오르는 듯 하다.
<우리의 멋> 경남사진대전 대상작(1997년 7월). 양산사찰학춤의 대가 김덕명 선생과 그의 제자들의 학춤을 카메라에 담았는데, 마치 실제로 학이 날아오르는 듯 하다. ⓒ 전영준
그다지 돈도 되지 않는 사진에 빠져 세상 물정 모르고 사는 남편을 말없이 지켜봐 준 아내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라는 그는 슬하에 아들 둘, 딸 둘을 두었다. 맏이가 아들이고 가운데 둘이 딸, 그리고 막내가 아들인데 막내만 아직 미혼이고 위의 셋은 모두 제 짝을 찾아 일가를 이루었다.

아버지와 장르는 다르지만 다들 디자인, 미술, 연극 등 예술분야의 '끼'를 지니고 있는 것이 신기하고 심지어는 손자 손녀들까지 각종 사생대회에서 상을 받아 오는 것을 보면서 '피는 못 속이는 것이구나' 싶어 새삼 놀랍다는 우리 시대, 우리 양산의 사진작가 사협 양산지부 서춘식 지부장.

양산에서 살아온 세월만큼 그의 양산사랑도 꽤 농익었다.

"양산의 행정을 책임지고 있는 분들이 양산의 문화예술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합니다. 다리 놓고 길 넓히는 일은 당장 눈에 띄니까 쉽게 손을 대지만 문화예술에 대한 투자는 먼 안목을 가지고 접근해야 하기 때문에 자칫 소홀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문화예술에 대한 투자는 그 열매가 자손만대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중앙의 이름난 예술가나 단체를 불러와 시민들의 문화향수욕을 채워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까이 있는 지역예술인들과 예술단체를 지원ㆍ육성하는 데도 힘을 쏟아주기를 바랍니다. 처음에는 다소 역량이 떨어지더라도 지속적인 지원과 후원을 하면 자질과 재능이 향상되게 마련입니다. 현존하는 예술인들은 우리 모두의 크나 큰 자산이라는 인식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입니다."

그동안의 수상기록도 상당하리라 싶은데, 역사적 기록사진에 몰두한 뒤로는 작품사진은 다소 소홀했던 편인데다 본시 제 흥에 겨워 사진을 했기 때문에 수상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았다며 얼른 떠오르는 대로 수상기록 몇 개를 짚어낸다.

"82년도에 제1회 대한민국사진전람회에 입선한 것을 비롯해 부산일보사진콘테스트 금상, 벨지움국제사진사롱전 입선, 경남사진대전 입선과 대상, 경남사진대전 추천작가상 정도가 기억납니다. 그밖에 행정자치부장관ㆍ문화체육부장관ㆍ중앙선관위원장ㆍ경남도지사 등으로부터 표창을 받았고 경남예술인상 공로상을 수상한 게 고작입니다."

현재 사협 양산지부장 말고도 사협 경남도협의회 부회장과 경남사진대전 초대작가로도 활약하고 있는 그의 예술세계가 앞으로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거듭되면서 날로 풍성해 지기를 기대해 본다.

덧붙이는 글 | 전영준 기자는 경남 양산의 풀뿌리신문인 '양산시민신문'의 편집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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