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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염한 교정의 단풍
농염한 교정의 단풍 ⓒ 유성호
큰 아이의 학예발표회를 보러 가는 길, 가을은 잘 익은 술처럼 농염한 빛을 띠면서 어느덧 겨울에게 엉덩이 한쪽을 양보하고 있었습니다. 잘 다듬어진 교정의 수목은 노랑과 빨강, 그리고 고집쟁이 사철 푸른 나무들이 제각기 색을 뽐내며 저무는 계절을 위로하는 듯 얌전히 도열하고 있습니다.

올해 초등학교를 보내고 큰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는 입학식, 과학특기부서 참관수업에 이어 세 번째 방문입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한 번씩 찾아 간 셈입니다. 아담하고 단정한 교사(校舍)와 그것을 에워싼 울창한 숲은 매번 색다른 얼굴로 낯선 방문객을 반깁니다.

이번은 학년을 결산하는 의미의 학예발표회가 있는 날입니다. 유치원에나 있는 줄 알았던 학예회를 초등학교에서도 한다는 것을 알고는 내심 깜짝 놀랐습니다. 역시 초보 학부형임을 속일 수 없습니다. 아이가 1학년이니 저도 학부형 1학년인 셈입니다.

오케스트라 연주로 학예회가 시작됐다
오케스트라 연주로 학예회가 시작됐다 ⓒ 유성호
학예회는 정시에 시작됐습니다. 짧은 순간 무대 뒤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마음은 어떨까하고 생각합니다. 스산한 가을 날씨와 차례가 다가올수록 저려오는 오금, 그로인한 원치 않는 요의(尿意)…. 꽤나 분주할 것이라는 상상을 하던 차에 오케스트라의 첫 연주곡이 시작됩니다.

아늑한 조명 아래 까만 연미복을 입은 소년소녀 악사들이 손놀림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면서 하모니를 만들어냅니다. 보면대 위의 악보와 지휘 선생님의 손끝을 번갈아 가며 응시하는 눈망울들이 초롱초롱 빛납니다. 오케스트라의 선율은 장내의 어수선함을 어느새 잠재우고 부모님들을 학예회의 세계로 아련하게 이끌고 갑니다.

바이올린부 - 앙증맞은 손끝에서 울려 퍼지는 선율
바이올린부 - 앙증맞은 손끝에서 울려 퍼지는 선율 ⓒ 유성호
학예회는 크게 각 학년 단체, 특기부서로 나뉘어 1년간 저마다의 갈고 닦은 실력을 선보였습니다. 태권도부는 절도 있는 기본 품새와 화려한 격파 시범으로 부모님들의 탄성을 자아냈습니다. 송판 뒷면에 폭죽을 붙여 격파할 때마다 폭음과 비닐테이프가 날리는 등 굉장한 눈요기였습니다.

음악 특기부서는 바이올린, 첼로, 플루트, 가야금, 성악부로 나뉘어 저마다의 소리로 자신들을 표현했습니다. 가을 정취가 물씬 풍기는 어느 날 공짜로(?) 바이올린 선율에 취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것은 각별한 행운입니다.

3학년들의 수화 노래
3학년들의 수화 노래 ⓒ 유성호
하얀 장갑을 낀 3학년생들이 굳게 입을 다물고 무대에 오릅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하얀 장갑이 성호를 그리듯 허공에서 움직이며 수화 노래를 합니다. '사랑'이란 단어는 왼손 주먹 위에 오른 손을 펴서 둥글게 돌리는 것인 줄 처음 알았습니다. '아빠 힘내세요'를 수화로 할 때는 언제나 그렇듯이 가슴이 뭉클하고 목이 멥니다. '아빠'는 오른손 검지손가락을 코 옆에 찍고 나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웁니다. 최고라는 의미로 만들어진 듯해 감사함과 역할의 막중함을 동시에 느낍니다.

무용부 - 요정들의 외출
무용부 - 요정들의 외출 ⓒ 유성호
무용부 어린이들이 안무한 '요정들의 외출'은 무대 의상과 분장의 화려함, 그리고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앙증맞게 걷는 '파 드 부레'를 할 때면 귀여움에 소름이 돋을 정도입니다. 아직 자식들이 어려서 그런지 저학년 어린이들의 2% 부족한 몸짓에 더 열광합니다.

이번엔 4학년들이 단체로 나와서 필리핀 민속춤인 '티니클링'을 선보였습니다. 일명 뱀부댄스라고도 하는 이 춤은 3박자 리듬에 맞춰 두 개의 긴 대나무 막대를 두 사람이 양쪽에서 잡고 바닥을 두드리면 다른 사람들이 대나무 막대를 피하면서 대나무 안팎으로 뛰며 춤을 추는 것입니다. 대나무가 꽤 무거워 보이는데도 막대를 쥐고 있는 학생들은 흥에 겨워 힘겨운 줄도 모릅니다. 춤이 끝나고 나서야 혀를 내물며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닦습니다.

"힘들어도 웃자" - 4학년들의 티니클링
"힘들어도 웃자" - 4학년들의 티니클링 ⓒ 유성호
영어연극팀은 백설공주를 과감하게(?) 재해석해서 독사과를 먹어도 죽지 않고 일곱 난장이를 코디네이터로 부리는 재미난 연극을 유창한 영어로 성공리에 공연했습니다. 백설공주 역을 맡은 여학생은 배가 고팠는지 소품 사과를 진짜로 먹어버렸습니다.

다음 무대는 어머니들이 채웠습니다. 일종의 찬조출연입니다. 어머니합창단이 오르자 무대가 꽉 차는 느낌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손짓하지 않아도 그들에게서는 보이지 않는 모성애가 번져 나와 아이들을 감싸는 듯했습니다. 어머니들은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로 아이들에게 감사함을 표합니다.

화랑어머니합창단
화랑어머니합창단 ⓒ 유성호
큰 아이와 같은 반인 이슬 어머니도 합창단 일원으로 무대에 오르셨습니다. 바리톤인 지휘자 선생님과 어머니들의 화음 속에 가을 하루가 정말 멋지게 꾸려지고 있습니다. 원제는 '봄의 세레나데'인데 가을로 번안해도 참 잘 어울렸습니다. 음악이 주는 매력인가 봅니다.

올림픽의 꽃이 마라톤이라면 초등학교 학예회의 꽃은 1학년생들의 몫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교정에 첫발을 디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제법 의젓함까지 엿보이지만 그래도 막내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막내둥이 1학년 - 꿈★은 이루어진다
막내둥이 1학년 - 꿈★은 이루어진다 ⓒ 유성호
막내둥이 1학년들은 아빠, 엄마, 아들 등 세 모둠으로 나뉘어 자신들의 꿈을 소리 높여 외치며 온몸을 흔들었습니다. 빨간 치마에 앞치마를 두른 엄마와 나비넥타이의 아빠가 아이들에게 공부나 하라고 하자, 아이들은 스티비 원더, 비지스처럼 노래하고 싶다고 응수를 합니다.

노래는 기성 가수의 것을 빌려 왔지만 아이들의 꿈은 빌릴 수 없습니다. 아이들은 과학자, 의사, 경찰, 운동선수, 법관, 선생님 등이 되고 싶다는 꿈을 영상메시지에 담아 엄마, 아빠에게 보여드렸습니다. 어마, 아빠들은 '브라보'를 연신 외치며 막내둥이의 재롱에 감격스러움을 표현했습니다. 정말 '브라보'입니다.

엄마, 아빠들로부터 '브라보'를 가장 많이 받은 1학년
엄마, 아빠들로부터 '브라보'를 가장 많이 받은 1학년 ⓒ 유성호
6학년 맏이들의 성극 '예수님의 기적'을 끝으로 학예회는 성황리에 막을 내렸습니다. 막과 막 사이에 녹아 있는 아이들의 땀을 생각하자니 가슴이 뭉클합니다. 또한 이를 지도하고 준비한 선생님들의 노고에도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학예회가 있었던 강당에서 나와 아이가 수업을 받는 교사에 들어서자 그간의 학습성과물이 가지런히 전시돼 있습니다. 방학숙제, 일기장, 자신만의 특기를 담은 '내가 최고야', 그리고 교내예술잔치 입상작들이 저마다 뽐내며 벽에 걸려 있습니다.

큰 아이는 미술부문에서 금상을 탔습니다. 금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기적'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미술과는 거리가 있는 줄 알았는데, 아무튼 소 뒷걸음질에 영문도 모르게 쥐 한 마리가 밟힌 게 아닌가 싶습니다.

교내예술잔치에서 금상을 받은 큰 아이의 작품 - 밤따기
교내예술잔치에서 금상을 받은 큰 아이의 작품 - 밤따기 ⓒ 유성호
교정에 떨어진 버즘나무의 커다란 잎사귀들을 모아 만든 천연꽃다발을 아이에게 주자 배시시 웃습니다. 숫기가 모자라고 천성은 여린데 장난이 심해서 번번이 '죄송합니다'(벌칙) 목걸이를 달고 집에 오지만 오늘만큼은 '네가 최고야' 목걸이를 걸어 주고 싶습니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임이 틀림없습니다. 아이들의 1년의 결실이 옹골차게 영글었습니다. 옹골차되 어여뻤습니다. 모두가 제 아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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