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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중턱은 붉게 물든 단풍으로, 그 아래에는 운해로 뒤덮인 산자락이 있어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산 중턱은 붉게 물든 단풍으로, 그 아래에는 운해로 뒤덮인 산자락이 있어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 유영수
명지산에서 우리 둘은 처음 만났습니다
북한산에서 처음 고백했고
월출산 또는 드넓은 지리산에서
우리 사랑 키워가며 데이트했고
설악산에서 청혼을 했습니다…(중략)


한 신혼부부 청첩장에 담긴 문구 중 일부이다. 두 사람 모두 지독히도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게 마련인데, 청첩장을 읽어 내려가다 보니 이게 웬일인가. 피로연 장소가 지리산 노고단이라는 것이다. 혹시 잘못 읽은 것은 아닌가 싶어 다시 보아도 결혼식 피로연을 지리산에서 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잠시 입가에 웃음이 머금어지면서 뒤이어 '참 멋있다. 누가 이런 아이디어를 냈을까?'라는 궁금증이 생긴다. 얼마 전 북한산 인수봉 정상에서 칠순상을 받았다는 어느 산사나이의 얘기를 신문보도를 통해 들어보기는 했지만, 다른 것도 아닌 결혼식 피로연을 지리산에서 한다니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동양화를 그리는 민중예술가인 신랑 위종만(33)씨와 종로3가 보석도매상에서 판매업무를 하고 있다는 신부 박영숙(27)씨의 결혼식이 지난 토요일(5일) 오후 상암동 한 웨딩홀에서 열렸다.

여느 신혼부부의 결혼식장에서처럼 화기애애하게 예식이 진행되는 듯했으나, 다른 사람이 아닌 신랑 본인이 축가를 부르기 시작하자 예상치 못한 순서에 하객들이 약간 당혹스러워 하는 분위기가 연출됐다. 하지만 신랑 위씨가 '사랑의 서약'을 떨리는 음성으로 신부에게 불러주는 모습에 지켜보던 많은 하객들이 감동스러워 했다고 한다.

웨딩홀의 뷔페에서 식사를 마친 하객들 중 신랑신부 측에 미리 피로연 참석을 신청한 사람들 28명이 대기하던 관광버스에 올라 지리산으로 가기 위해 이동한다.

원래는 신랑과 신부가 활동하는 인터넷 동호회인 '주말여행(http://home.freechal.com/
weekend)의 회원들과 신랑신부 친구들까지 40여 명이 동행할 예정이었지만, 갑작스런 개인사정 등으로 인원이 축소됐다고 한다.

숙소인 민박집에서는 삼겹살파티로 신랑신부의 앞날을 축복해 주는 피로연이 열렸다.
숙소인 민박집에서는 삼겹살파티로 신랑신부의 앞날을 축복해 주는 피로연이 열렸다. ⓒ 유영수
'주말여행'의 오프라인 모임에서 만나기 시작해 사랑을 싹틔운 두 사람이 동호회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결혼식 하객들 중 원하는 사람을 모시고 지리산의 운해를 내려다보며 낭만을 즐길 수 있는 피로연을 준비하게 된 것이다.

보통 결혼식 피로연은 예식장 인근의 주점이나 카페를 통째로 빌려, 술을 마시며 다소 짓궂은 게임을 하면서 신랑신부를 곤란케 만드는 시간들로 채워지기 마련이다. 이런 통념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지인들과 영산(靈山)의 맑은 공기를 함께 마시며 체력단련의 효과까지 볼 수 있는 이번 피로연이야말로 의미있는 시간이 아닌가 싶다.

예식과 폐백까지 모두 마친 오후 7시를 조금 넘긴 시각. 드디어 지리산을 향해 버스는 신랑신부와 지인들을 태우고 출발을 한다. 차 안에서는 방금 혼인의 예를 치른 신랑신부를 축하하기 위해 축배를 외치기 시작한다. 인생 최대의 경사에 이어 우리 나라의 명산 중의 하나로 꼽히는 지리산으로 산행을 간다는 것에 모두들 꽤 들뜬 분위기다.

자정이 지나 숙소인 전남 구례의 어느 민박집 앞에 버스가 선다. 신랑신부가 미리 이 민박집 3층 전체를 예약했고, 일행은 각자 방에 짐을 푼 후 제일 큰 방에 모여 본격적인 피로연 1부를 시작한다. 서울에서 공수해 온 먹음직스런 삼겹살 파티로 시작된 피로연은 어느새 새벽을 지나 동이 터오는 시각 직전까지 이어진다.

신혼 첫날밤을 치러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랑 위씨와 신부 박씨는 자신들을 위해 멀리 지리산까지 동행해 준 지인들을 위해 함께 술잔을 기울인다. 창밖에서는 일기예보에서 말했던 것처럼 밤새 이슬비가 대지를 촉촉히 적신다.

축하케이크의 예상치 못한 움직임에 신랑이 저지해 보려 하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축하케이크의 예상치 못한 움직임에 신랑이 저지해 보려 하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 유영수

결국 케이크를 온 몸으로 맛보게 된 신랑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옆에 있던  여자 동호회원은 그 모습에 웃음을 참지 못한다. 엉망이 된 신랑의 얼굴은 차마 공개하지 않는다.
결국 케이크를 온 몸으로 맛보게 된 신랑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옆에 있던 여자 동호회원은 그 모습에 웃음을 참지 못한다. 엉망이 된 신랑의 얼굴은 차마 공개하지 않는다. ⓒ 유영수
새벽 5시 반까지 이어진 술자리에 술에는 유난히 약한 필자가 계속 자리를 지킨 것은 신랑신부의 연애담을 들어보고픈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꽤 취기가 도는 듯한 신랑은 진지하게 삶과 사랑에 대해 열변을 토한다. 인생을 치열하게 그리고 진지함으로 살아가는 이 땅의 젊은이 중의 한 사람이리라.

오전 6시가 되자 우렁찬 '기상!' 소리가 온 민박집에 울려퍼진다. 다음날을 위해 조금씩 눈을 붙이던 몇몇 사람들이 하나 둘씩 일어나고 잠시 후 일행은 버스에 오른다. 산행이 시작되는 성삼재의 주차장까지 한 시간 정도 차가 이동한다.

여자 동호회원 두 명과 함께 포즈를 취한 신랑 위씨. 온화한 성품으로 주변의 어느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듯하다. 특유의 썰렁함으로 때론 진지한 인생 철학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위씨는 지인들에게 '행복발전소장'이란 닉네임으로 불리기도 한다.
여자 동호회원 두 명과 함께 포즈를 취한 신랑 위씨. 온화한 성품으로 주변의 어느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듯하다. 특유의 썰렁함으로 때론 진지한 인생 철학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위씨는 지인들에게 '행복발전소장'이란 닉네임으로 불리기도 한다. ⓒ 유영수
원래 지리산의 기품을 제대로 느끼려면 2박3일 혹은 아무리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 내더라도 1박2일은 필요하지만, 결혼식에 이어진 스케쥴상 시간 부족으로 인해 성삼재에서 노고단까지 한 시간의 간소한 산행을 하게 된 것이다.

혹자가 '지리산을 날로 먹으러 간다'고 표현할 정도로 참 싱거운 산행코스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전날 꼬박 밤을 새우며 과음한 상태에서는 이 1시간짜리 코스마저도 결코 만만치 않아 보였다. 항상 산행을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평소 운동이 부족하다는 걸 새삼 절감하게 된다.

이날 신입회원으로 지리산에 동행한 두 젊은이. 20대 초반의 건장한 체격 덕분인지 많은 동호회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날 신입회원으로 지리산에 동행한 두 젊은이. 20대 초반의 건장한 체격 덕분인지 많은 동호회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 유영수
어떤 이는 판초 우의를 걸치고 다른 이는 우산을 받쳐들고, 빗물에 약간은 미끄러워진 산행길에 나선다. 빗발은 더 거세지고 있어 노고단에 도착해도 산 아래의 멋드러진 풍경을 감상하기란 어려울 듯하다. 지리산의 운해와 일출까지 카메라에 담아가리라 벼르고 온 필자는 실망감을 감추기 힘들었다.

안개가 짙게 드리워져 10m 전방도 명확히 보기 힘든 산행을 계속하다 섬진강과 화엄사 쪽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에 다다른다. 다행히 잠시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더니 아래쪽이 조금씩 보이는 게 아닌가. 다시 안개가 자욱하게 낄세라 셔터를 눌러대는 손이 빨라지고 그 바쁜 와중에도 탄성이 계속 터져나온다.

노고단에서 천왕봉으로 가려면 이 길을 통과해야 한다. 짙게 드리운 안개가 운치를 한껏 자아내고 있다.
노고단에서 천왕봉으로 가려면 이 길을 통과해야 한다. 짙게 드리운 안개가 운치를 한껏 자아내고 있다. ⓒ 유영수
산 중턱은 온통 단풍으로 물들어 예쁜 수채화를 그려내고, 그 아래쪽은 야트막한 산자락 위로 운해가 병풍을 치고 있어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순간 밤샘과 과음으로 인한 피로는 사라지고, 까칠했던 얼굴에는 미소가 듬뿍 머금어진다.

다시 노고단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데 아름다운 빚깔의 단풍나무 사이로 다람쥐가 노닐고 다닌다. 마치 거센 빗줄기를 뚫고 아름다운 지리산을 찾아온 등산객들을 반기기라도 하는 것 같다.

안개 낀 노고단 산장의 모습
안개 낀 노고단 산장의 모습 ⓒ 유영수
안개가 자욱하게 드리워 멀리서는 형체도 분간하기 힘든 노고단산장에 도착하자, 일행은 간단한 아침식사를 위해 분주히 움직인다. 아침메뉴는 컵라면과 식은밥, 그리고 각자 준비해 온 여러가지 먹을거리들이다.

코펠에 물을 데워 조금 잦아든 비를 맞으며 야외에서 먹는 컵라면은 맛이나 운치 면에서 한강유람선 고급레스토랑의 그것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다른 일행의 어떤 이들은 집에서 준비해 온 불고기와 즉석에서 요리한 계란찜까지 선보이며 옆사람들의 후각을 자극하기도 한다. 물론 산장 옆에 마련된 공동취사장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성삼재 주차장에서 단체로 사진촬영을 하는 모습
성삼재 주차장에서 단체로 사진촬영을 하는 모습 ⓒ 유영수
아침식사 후 간단한 휴식을 취한 후 기념으로 단체사진을 찍으려 하는데 또다시 굵어진 빗방울에 사정이 여의치 않다. 일단 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성삼재 쪽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주차장 한 켠에서 기념사진을 몇 장 찍은 후 피로연 일정을 모두 마치고 다시 서울로 향한다.

신혼여행을 떠나는 신랑신부의 비행기 시각에 맞춰야 하기에 서둘러야 하는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오가는 데 쓰인 시간에 비해 지리산에 머무는 시간이 너무 짧아 더욱 허망하게 느껴지는가 보다. 영험스럽기까지 한 지리산의 정취를 제대로 느끼기 위해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다.

서울로 돌아와 두 손 꼭잡고 신혼여행길을 떠나는 신혼부부를 보며 이런 기대를 해 본다. 언제 찾아와도 늘 온화함으로 사람들을 반겨주는 지리산의 그 변함없는 온화한 모습처럼, 결혼 전에 서로에 기대했던 것과 혹시 다른 모습이 보일지라도 늘 같은 마음으로 묵묵히 지켜보며 살아가라고, 그리고 뜨겁게 사랑하라고...

신랑신부, 그것이 알고 싶다

▲ 한없이 성격 좋을 것 같은 신랑 위종만씨와 신부화장을 지운 맨얼굴에도 자신감을 잃지 않는 당당한 성격의 신부 박영숙씨의 다정한 모습

신랑신부의 속깊은 사연을 듣기 위해 오가는 길 버스 안에서, 그리고 밤을 새우고 만 술자리에서 그들과 함께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다음은 그들에게 들은 알콩달콩 사랑 이야기다.

- 어떻게 만났나요?
"동호회에서 처음 만나게 됐고 그때부터 서로에 대한 좋은 감정을 키워 나갔던 것 같습니다. 1년 6개월 전의 일이지요. 하지만 본격적으로 사귀게 된 건 1년 전부터였습니다."

- 산에서 만난 커플의 특별한 점이 있다면?
"사회에서 만나게 되면 서로의 외적인 모습을 판단하고 선입견을 가지게 되는 게 인지상정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산에서는 모든 허물을 벗어버린 상대방의 존재 그 자체만으로 서로를 파악할 수 있는 이점이 있습니다."

- 프러포즈는 누가 먼저 그리고 어떻게 하셨나요?
"물론 신랑인 제가 먼저 했습니다. 지난 여름 설악산에 둘이 여행을 갔었고 미리 준비해간 조화를 건네며 정식으로 청혼을 했지요. 바로 승낙을 얻어냈고 바쁘게 결혼준비를 한 끝에 드디어 결혼에 골인하게 된 겁니다."

- 여러 좋은 산들도 많은데 굳이 지리산을 선택한 이유가 있다면
신랑 : "지리산은 제 삶의 모태와도 같습니다. 살아가면서 지치고 힘들 때 지리산 천무동 계곡에 발을 담그고 책을 읽고 있노라면, 지리산은 항상 저에게 새로운 힘과 삶의 지혜와 용기를 선사하곤 했죠. 설악산에서는 느낄 수 없는 포근함이 너무 좋아 그동안 수없이 이곳을 찾게 됐고, 그 좋은 느낌을 우리 결혼을 축하해 주는 이들과 공유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 마지막으로 서로를 평생의 반려자로 삼은 결정적인 이유를 한 가지씩 꼽아 주시죠
신부 : "잘 생겨서요."
신랑 : "저도 예뻐서요."

같은 대답에 어떻게 된 거냐고 신랑에게 묻자, 교제하는 동안 이런 질문을 받으면 꼭 이렇게 대답하라고 교육을 철저히 시켰다며 호탕하게 웃는다. 서로를 사랑하고 그 사람과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데 굳이 무슨 이유가 필요할까마는, 거기에 우문(愚問)을 던진 필자를 탓하고 만다.

덧붙이는 글 | 기자는 '주말여행' 동호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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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사랑하고 대자연을 누리며 행복하고 기쁘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서울에서 평생 살다 제주에서 1년 반,포항에서 3년 반 동안 자연과 더불어 지내며 대자연 속에서 깊은 치유의 경험을 했습니다. 인생 후반부에 소명으로 받은 '상담'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더 행복한 가정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꿈꾸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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