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가인 문간채를 들어서는 앞에는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비까지 커다랗게 세워놓아 발걸음을 더욱 한가롭게 했다. 그렇게 또 하나의 시를 마음에 풀어놓으며 들어서니 바로 좌측으로 우물이 먼저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자 우물에는 ‘새암’이란 표기와 함께 영랑 선생과 가족이 사용하던 우물로, 훼손되었던 것을 복원했다는 설명문이 있었다.
정면으로 보이는 안채에는 영랑의 초상과 목가구들이 방안에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의 큰 방에는 영랑 선생의 부친이 기거했으며, 중마루가 있는 작은 방은 영랑 선생이 결혼 후 기거하던 곳으로 일부 구조가 변형되고 시멘트 기와로 바뀐 것을 1992년에 군에서 초가로 다시 복원하였다고 한다.
그런 바로 옆에는 장독대가 가지런히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곳은 ‘장광(장독대)’ 간장, 된장, 김치, 젓갈 등을 담아두거나 담그는 독을 놓아두었던 곳이라고 한다. 그곳에는 1930년 어느 날 영랑의 누나가 장독을 열 때 단풍진 감나무 잎이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고 ‘오매 단풍들것네’라고 속삭이자 영랑이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라는 시를 지었다는 팻말과 함께 그 시비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그 모습이 마치 영화를 보는 듯이 떠올랐다.
그 상상에 나도 모르게 콧소리를 내며 사랑채로 향했다. 햇살은 여전히 따가웠고 하늘은 맑았다. 사랑채는 본래부터 초가지붕이었고 기둥과 석가래 등의 기본 구조는 원형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그 안에는 영랑 선생이 집필하는 밀랍 인형이 있는데 그 모습이 조금은 낯설었지만 그 옆에 자리한 시비 ‘사개틀린 古風의 툇마루에’ 라는 시비가 나의 마음을 다시 포근하게 해주었다.
그렇게 생가를 둘러보고는 그 앞에 자리한 은행나무 벤치에 앉자 나도 모르게 시심(詩心)이 드는 것 같아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