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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갠 비타하이의 모습, 이곳이 이상향일까?
비 갠 비타하이의 모습, 이곳이 이상향일까? ⓒ 최성수
버스가 샹그리라에 들어선다. 고원지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샹그리라는 덩그마니 놓여 있다. 바라보니 그 도시는 마치 어린 날 풀숲에 몰래 놓여있던 새 알 같다. 아무도 모르는, 나 혼자만 감춰두고 몰래 찾아가 들여다보는 그 가슴 뛰던 설렘처럼, 마침내 샹그리라에 온 것이다.

샹그리라는 해발 3천m가 넘는 고원에 형성된 작은 도시다. 우리로 치면 읍 정도나 될까 말까 한 작은 그 도시의 원래 이름은 중띠엔[中甸]. 중국 정부는 이곳의 명칭을 샹그리라라고 바꾸고 대대적으로 관광지화하고 있다.

샹그리라는 영국의 소설가 제임스 힐턴(James Hilton:1900-1954)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에 나오는 중국의 지명이다. <굿 바이 미스터 칩스>라는 작품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그의 이 작품은 바스쿨의 영국 영사관 직원인 콘 웨이의 기이한 경험담이다.

그는 폭동이 일어난 바스쿨을 비행기로 탈출하게 되는데, 몇 사람만이 탄 그 비행기가 납치당해 히말라야의 산중 도시에 불시착하게 된다. 그곳이 바로 샹그리라다. 샹그리라의 라마교 사원에서 묵게 된 일행이 겪게 되는 기이한 일을 그린 이 소설은 신비하고 이상한 사람들의 삶을 담아내, 많은 호응을 얻은 작품이다.

그 샹그리라에 도착한 첫 날, 내가 제일 먼저 겪은 것은 '숨 가쁨'이었다. 몇 걸음을 걷다 갑자기 숨이 차 심호흡을 하고, 밤에는 자다 서 너 차례 깨어 가쁜 숨을 내쉬어야 했다.

샹그리라, 이상향에 사는 것은 이처럼 숨 가쁘고 힘든 일이구나 하는 것이 샹그리라에 대한 첫 느낌이었다.

샹그리라는 공사 중

샹그리라[香格里拉]는 장족(藏族)의 자치구다. 티베트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사는 이 곳은 히말라야의 한 부분이다. 샹그리라는 티베트 말로 '내 마음의 해와 달'이라는 뜻이란다. 그래서일까? 샹그리라에서는 시린 하늘 위로 눈부신 해와 달이 한꺼번에 보인다. 가로등 위의 장식도 해와 달이다. 해와 달이 달린 가로등 위로 밤이면 발갛게 불이 켜진다. 그리고 샹그리라, 내 마음의 해와 달에 또 다른 세상이 시작 된다.

샹그리라 사방루에는 밤이면 축제가 벌어진다. 사방루에서 춤추는 장족 사람들.
샹그리라 사방루에는 밤이면 축제가 벌어진다. 사방루에서 춤추는 장족 사람들. ⓒ 최성수
샹그리라 고성의 골목을 돌아 들어가면, 제법 넓은 광장이 나온다. 어디서 몰려들었는지, 밤이 되면 그 광장이 사람들로 꽉 찬다. 스팡로우[四方樓]. 리지앙의 스팡지에[四方街] 같은 그 광장에는 티베트 음악에 춤이 한창이다.

흐릿한 불빛 속에 티베트 음악이 흐르고, 사람들은 그 음악에 맞춰 광장을 돌며 춤을 춘다. 동네 사람들도 있고, 파란 눈의 관광객도 있다. 서로 생김새는 다르지만, 함께 어울려 추는 춤은 같다. 품새가 틀리고, 미처 음악을 따라가지 못해 옆 사람의 발을 밟으면 또 어떠랴. 흥에 겨워 어울리는 샹그리라의 밤이 좋으면 그 뿐이다.

나도 그들 틈에 들어가 춤을 따라 춰 본다. 춤은 그리 빠르지 않다. 그저 발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앞 뒤로 움직이면서 조금씩 진행하면 된다. 처음 보는 사람의 손을 잡았다 놓았다 하고, 팔을 치켜 올려 우리네 보릿대 춤처럼 흔들흔들 해 댄다.

춤이 빠르지 않은 것은 이곳이 고산지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너무 빠르면 숨이 가빠 금방 지칠 테니까 말이다.

사람들에 섞여 광장을 한 바퀴 돌고 나니 숨이 차다. 아직 샹그리라에 적응하지 못한 내 몸 탓이리라. 사방을 둘러보니, 모두들 한 바퀴 춤판에 흥이 가득하다.

샹그리라는 공사중.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향은 늘 우리 생각에 맞게 공사중인 것은 아닐까?
샹그리라는 공사중.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향은 늘 우리 생각에 맞게 공사중인 것은 아닐까? ⓒ 최성수
체력 때문에 춤판에 끼지 못한 할머니들은 스팡로우 구석에서 박수로 흥을 돋운다. 그 할머니의 얼굴에 세월이 가득 담겨 있는 것 같다.

춤이 끝나고, 모두들 어두운 길을 디뎌 제 갈 곳을 찾아 간다. 나도 온통 파헤쳐놓은 고성의 길을 걸어 나온다. 나오면서 보니 고성 안 곳곳이 공사 중이다. 고풍어린 집을 수리하는 곳도 있고, 어떤 곳은 아예 건물을 부수고 새로 짓고 있다.

이튿날 보니, 도로에도 돌을 까는지, 망치로 대리석 같은 돌을 자르고 부수느라 어수선하다. 샹그리라는 온통 공사 중이다. 몇 해 후 이곳에 다시 온다면, 전혀 다른 샹그리라를 보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의 샹그리라가 정말 이상향 샹그리라일까?

인간은 어쩌면 늘 찾을 수 없는 이상향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인간에게 이상향은 어쩌면 늘 공사 중일지도 모른다. 상황에 따라, 시간에 따라 조금씩 조금씩 공사를 해 가며, 늘 새로운 이상향을 마음속에 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상향에 있는 한국 음식점, 야크바

샹그리라 고성 거리 입구, 큰 길 건너편에는 야크바라는 이름의 한국 음식점이 있다. 이 먼 곳, 어쩌면 세상의 끝 같은 땅에서 한국 음식점을 발견한다는 것은 신기하기까지 한 일이다.

샹그리라의 한국 식당 야크바. 이상향에서도 한국 음식은 이상적인 음식?
샹그리라의 한국 식당 야크바. 이상향에서도 한국 음식은 이상적인 음식? ⓒ 최성수
식당 주인은 올해 스물일곱 살의 장샤오펀[張曉芬]이라는 한족 아가씨다. 배시시 웃으며 맞아주는 샤오장(少張: 그를 아는 사람들은 이런 애칭으로 그를 불렀다)의 얼굴이 곱다. 그는 따리[大理]의 한국 게스트 하우스 '넘버 쓰리' 문 이장으로부터 한국 음식을 배웠다고 한다.

몇 해 넘버 쓰리에 있으면서 한국 요리를 배워 이곳 샹그리라에 와 새로 한국 식당을 연 것이 4년째. 이제는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외국 관광객들 덕에 좀 나아졌다며 환한 얼굴이다. 몇 마디 한국말도 할 줄 알고, 온갖 여행 정보도 찾아볼 수 있는 이 야크바가 머지않아 여행자들의 만남의 장소로 요긴하게 자리 잡을 것이다.

저녁, 야크바에서 삼겹살을 먹는다. 가지런히 썰어 내 온 삼겹살을 가스 불판에 굽고 상추에 고추장을 듬뿍 얹으면, 이곳이 중국인지 한국인지 구분이 안 간다. 샤오장이 미리 준비 해 둔 자연산 송이도 같이 굽는다. 자연산 송이 1kg에 중국돈 280원. 송이의 향이 입 안에 가득 감돈다. 어디서 이렇게 마음껏 송이를 먹어 볼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 연신 송이버섯에 손이 간다.

"이곳에서는 갓이 활짝 퍼진 송이가 더 비싸요. 이런 송이는 중간급이지요."

우리를 안내하는 병규씨가 불판에 송이를 얹어주며 설명한다.

갓이 채 퍼드러지지 않은 이런 송이가 우리나라에서는 최고급인데, 하는 생각을 하며 또 송이를 집는다. 송이에 삼겹살, 백주와 맥주로 배를 불리니, 정말 이곳이 샹그리라다.

야크바의 라오반 샤오장. 따리 넘버 쓰리에서 한국 요리를 배운 그의 음식 솜씨는 한국 사람 뺨을 칠 정도다.
야크바의 라오반 샤오장. 따리 넘버 쓰리에서 한국 요리를 배운 그의 음식 솜씨는 한국 사람 뺨을 칠 정도다. ⓒ 최성수
"나는 먹을 때 배가 부른 게 제일 싫어. 이렇게 맛이 있는데 배가 부르면 어쩌란 말이야."

일행인 병철이 형이 그런 말로 좌중을 웃긴다. 정말 먹다가 배가 불러 안타까운 일이 일생에 몇 번이나 될까? 송이 삼겹살이야말로 그런 음식 중의 하나리라. 특히 그곳이 샹그리라라면.

알딸딸한 기운으로 나선 샹그리라의 밤거리에는 인적조차 드물고, 때때로 불빛을 번쩍이며 택시들만 지나간다. 그 날, 내 마음 속에 해나 달 하나쯤 떠 있었을까?

송이. 향긋한 솔내음이 입 안에 가득한 송이 맛을 보는 것만으로도 샹그리라는 샹그리라다.
송이. 향긋한 솔내음이 입 안에 가득한 송이 맛을 보는 것만으로도 샹그리라는 샹그리라다. ⓒ 최성수
오월, 비타하이에 철쭉꽃은 지고

비타하이[碧塔海]로 가는 아침, 비가 내린다. 우산을 쓰고, 우비까지 입고 비타하이로 가는 길은 어둑어둑하다. 흐린 하늘 저편으로 눈 시린 초록이 펼쳐진다. 꽤 굵은 나무들이 숲을 이룬 곳도 있다.

비타하이는 샹그리라 서쪽에 있는 호수다. 해발 3500m 정도 되는 고산에 형성된 호수 물은 맑기 그지없다.

셔틀 버스에서 내려 호수 근처로 가는 길은 아름답다. 넓게 펼쳐진 초지에 온갖 야생화들이 피어 있다. 고산의 야생화가 다 그렇듯이 낮게 땅에 엎드려 바람에 맞서고 있는 야생화들은 짙은 색으로 한여름을 맞이하고 있다.

노란색, 분홍색, 진 붉은 색의 그 꽃들은 짧은 여름을 견뎌내며 씨를 맺고, 또 길고 긴 겨울을 땅 속에서 숨쉬리라. 여린 숨결이 다시 봄이 오면 여린 꽃으로 피어나리라. 누가 보지 않아도 피어나 제 세상을 살아가는 그 꽃들의 질기고 순한 모습을 보며 호수 가까이로 걸어간다.

비타하이 가는 길에 지천으로 핀 들꽃. 꽃이 세상을 열고, 그들이 연 세상이 바로 샹그리라다.
비타하이 가는 길에 지천으로 핀 들꽃. 꽃이 세상을 열고, 그들이 연 세상이 바로 샹그리라다. ⓒ 최성수
호수 주변은 온통 나무들이다. 가만히 보니 철쭉 같다. 그런데 잎이 조금 다르고, 크기도 우리나라 철쭉보다 훨씬 크다. 아름드리나무도 있다.

"철쭉 맞아요. 이 호수가 철쭉으로 유명하잖아요."

병규씨가 웃으며 설명을 한다.

철쭉꽃이 필 무렵이면 호수 주변이 온통 붉은 빛이리라. 나는 호수를 빙 둘러 자라고 있는 철쭉들을 보며 그런 상상을 한다. 철쭉이 지고 난 자리에 야생화가 다투어 피어나리라. 그리고 계절은 서로에게 손 내밀어 자리를 나누어 주리라. 내 상상 속에 호수는 오월, 진홍빛 철쭉으로 가득하다.

그런 내 상상을 눈치 채기라도 한 것일까? 병규씨는 철쭉 이야기를 들려준다.

철쭉이 피면, 이 호수 가득 그 꽃잎이 떨어져 물 위에 또 철쭉이 핀 것 같단다. 철쭉꽃의 독이 호수를 적셔, 호수 속의 물고기들이 기절해 물 위로 둥둥 떠오르기도 한단다.

"두견취어(杜鵑醉魚)."

두견화, 즉 철쭉에 취해 물고기가 떠오르는 비타하이. 물 위의 철쭉은 봄바람에 하느작거리고, 물살에 떠다니는 분홍빛 철쭉 잎으로 호수는 붉디붉은데, 떠 있는 철쭉 꽃잎 사이 숨을 할딱이며 펄떡일 물고기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비타하이 호숫가에 늘어진 철쭉. 봄이면 저 철쭉꽃잎 떨어져 호수 위에 하늘거리리라.
비타하이 호숫가에 늘어진 철쭉. 봄이면 저 철쭉꽃잎 떨어져 호수 위에 하늘거리리라. ⓒ 최성수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의 어부는 복숭아 꽃잎이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물을 따라 올라갔다가 무릉도원(武陵桃源)에 가게 된다. 무릉도원은 동양의 유토피아, 이상향을 뜻한다. 샹그리라가 바로 이상향이니, 이곳은 복숭아꽃이 아닌 철쭉꽃이 아득하게 떠 있는 이상향이리라. 문득 이백의 시 <산중문답(山中問答)>이 떠오른다.

그대는 묻네,
무슨 일로 푸른 산에 묻혀 사는가?
빙그레 웃을 뿐,
마음은 한가로워라.
복숭아꽃 물위에 떠
아득히 흐르는 곳
이곳은 별천지,
인간 세상 아니니.

(問余何事棲碧山/笑而不答心自閑/桃花流水杳然去/別有天地非人間)


비 개이고 하늘 맑은 비타하이를 떠나는 내내 나는 자주 뒤를 돌아본다. 뒤 돌아보면 거기 푸른 호수와 고운 야생화와 눈 시린 초원이 있다. 어쩌면 다시 오지 못할 이상향의 모습을 간직해 두고 싶은 마음에서다. 아니다. 이상향은 세상 어느 곳에도 없고 마음속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뒤돌아보는 나의 행동은 눈앞에 보이는 비타하이의 아름다움에 대한 미련 때문일지도 모른다. 초록이 눈부신 비타하이는 그렇게 나와 헤어졌다. 그리고 늘 내 마음에 풍경으로 남았다.

티베트보다 더 티베트 같다는 라마사원, 송찬린스

송찬린스[松贊林寺]는 샹그릴라의 대표적인 사원이다. 티베트 라싸의 포탈라궁에 비견되는 샹그리라의 송찬린스 앞에는 수많은 아이들이 진을 치고 있다. 티베트족 의상을 갖춰 입은 아이들은 관광객과 함께 사진을 찍고 돈을 받는다. 비록 돈을 받고 사진을 함께 찍지만, 그러나 그 아이들이 모습은 곱다.

까마귀 떼 아득하게 떠 사원의 하늘을 빙빙 도는 송찬린스. 티베트사람들은 까마귀가 이승의 영혼을 저승으로 날아다 주는 전달자라고 믿는단다. 그래서 티베트 사람들은 조장(鳥葬)의 풍습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죽은 사람의 시체를 토막 내 새들에게 던져주는 장례 풍습. 까마귀나 독수리 따위가 그 죽은 이의 시체를 먹고, 하늘로 날아올라 이승의 영혼을 하늘나라로 가게 만들어 준다는 조장의 풍습을 책에서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잠시 충격으로 아득했었다.

송찬린스의 아이들. 세상이 팍팍해도 아이들은 자란다.
송찬린스의 아이들. 세상이 팍팍해도 아이들은 자란다. ⓒ 최성수
그것은 어쩌면 내 관습의 한계였으리라. 죽은 사람은 꼭 땅에 묻어야 한다는, 우리네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 조장이라는 낯선 풍습과 만나 부딪치면서 내는 충격이 그것이었으리라.

그 충격으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실크로드 여행길 둔황의 교외에서 공동묘지를 만난 적이 있다. 그곳의 무덤들은 아무 것도 없이 그저 모래 언덕일 뿐이었다. 무덤 앞에 막대기를 꽂아놓아 무덤이라고 짐작될 뿐, 그것들은 사막에 바람이 불어 만들어진 작은 언덕과 다르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고, 바람이 휩쓸면 그 무덤들도 곧 사막의 일부가 되리라. 자연에서 나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이라면, 장례는 그저 이승을 떠나는 요식 행위일 뿐이다. 타클라마칸의 모래 먼지 속에서 태어난 사람은 사막의 모래먼지로 돌아가고, 나무 한 그루 없는 고산의 팍팍한 땅에서 태어난 자는 새들의 먹이가 되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갈 뿐이다.

그런 점에서 나무가 많은 우리네 삶에서, 죽어 한 그루 나무의 영양분으로 돌아간다는 수목장은 얼마나 아름다운 장례인가, 하는 생각을 송찬린스의 까마귀들을 보며 잠시 한다.

송찬린스는 그 자체로 하나의 절이지만, 또 하나의 마을이다. 가운데에 사원이 있고, 그 주변은 사원과 관계된 일을 하는 일터이면서 동시에 티베트 불교를 믿는 사람들의 집이다.

사원으로 들어가니 오체투지를 하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온 몸을 내던져 기원해야 할 무엇이 저들에게 있을까? 그것이 무엇이든, 저렇게 몸을 던져 기원하는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종교, 신심이 아닐까?

나는 송찬린스의 이곳저곳을 그저 하는 일 없이 걸어본다. 사원 밖의 마을로 가 좁은 골목과 길조차 없는 담을 따라 돌아다녀보기도 한다. 고즈넉하고 한가하다. 풀은 한 길이 넘게 자라 길을 막고, 골목에는 사람 자취 하나도 없는데, 생각은 자꾸 생각의 꼬리를 물고 나온다.

생각의 끝에 하늘을 보면, 눈이 시린 쪽빛과 구름 몇 점, 그리고 절 위를 빙빙 도는 까마귀, 저 까마귀 떼.

마을 높은 곳에서 건너다보는 샹그리라의 들판은 저녁 노을을 받아 붉고도 푸르다. 마음은 한 없이 가라앉는다. 이곳이 이상향? 어쩌면 어느 특정한 곳이 아니고, 내 자신이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곳이 이상향이 아닐까?

그렇다면 내 마음의 샹그리라는 중띠엔이라는 이 곳만이 아니리라. 일상의 삶에서 한없이 지치고 고단할 때, 그 고단한 나를 돌아보는 내가 있는 자리, 거기라 바로 샹그리라리라. 현재 나의 샹그리라는 이곳 중띠엔이지만, 내일의 내 샹그리라는 어디쯤일까?

나는 노을이 지는 샹그리라 들판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한다.

갑자기 찬 바람이 휙 불어온다. 옷깃을 여미며 송찬린스를 내려오는 내 발길을 막 지기 시작한 노을이 가만히 만져주고 있다.

아, 나는 얼마나 먼 길을 돌아 내 삶의 샹그리라를 찾아 헤맨 것일까? 바람은 불고, 노을은 지고, 지는 노을처럼 아득하게 내려앉는 샹그리라의 하루는 그렇게 저물고 있었다.

까마귀 아득하게 하늘을 나는 송찬린스. 전생의 어느 순간 이 곳에서 나도 오체투지를 하고 있었을까?
까마귀 아득하게 하늘을 나는 송찬린스. 전생의 어느 순간 이 곳에서 나도 오체투지를 하고 있었을까? ⓒ 최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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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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