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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준 전 교장선생님과 모친, 그리고 이모님이 시골 휴게소에 앉아 과일과 음료수를 들고 계시는 모습.
김석준 전 교장선생님과 모친, 그리고 이모님이 시골 휴게소에 앉아 과일과 음료수를 들고 계시는 모습. ⓒ 김두헌
오전 10시 30분쯤이나 되었을까요. 아침 일찍 공복에 나선 길이라 배도 고프고 화장실도 가야할 것 같아 화순군 청풍면 곰치휴게소에서 차를 멈췄습니다. 그런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세상만사 모든 일이 사실, 알고 보면 그리 호들갑 떨 일이 아니라는 건 그동안의 경험으로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사롭지 않은 장면이 제 눈 앞에 펼쳐졌습니다.

머리가 온통 서리를 맞은 듯한 남자 노인 한 분과 여자 노인 두 분이 화장실로 가는 길 한편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음료수를 드시고 있는 겁니다. 급기야 제 불온한 사고는 금방 가지를 쳐서 '아, 저 양반들 나이가 드셨어도 멋진 로맨스를 하고 계시는 구나' 하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유가 어떻든 간에 그렇게 보기 좋은 장면을 연출하고 계신 분들이 어떤 분들이신지 궁금해 저는 화장실 가는 것도 잊고 노인분들이 계신 곳으로 성큼 성큼 걸어갔습니다.

"어른신들, 안녕하세요. 아침 일찍 소풍이라도 나오신 모양입니다?"

시골 휴게소 한쪽의 아름답고 고적한 장면 속으로 결례를 무릅쓰고 뛰어든 저는 어디에서 사시는 분들이며, 세 분이 어떤 관계인지 용감무쌍하게 물었습니다. 백발이 성성하고 온화한 인상의 남자 분이 "예, 유람 갔다 옵니다" 하시더군요. 무례한 젊은이의 당돌한 질문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거부감이나 불쾌한 표정없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하셨습니다.

"제가 장흥 가는 길에 휴게소에 들렀는데, 세 분이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사진이나 한 장 찍을까 해서요?"
"사진이요? 그러시죠,뭐"

세분의 노인양반들이 드시고 계시는 간식.
세분의 노인양반들이 드시고 계시는 간식. ⓒ 김두헌
세 명의 노인분들은 서로 손을 잡고 사진 촬영 제의에 기꺼이 응해주셨습니다. 사진을 몇 장 찍고 나서 곱게 늙어가시는 분들의 사연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남자 노인분은 김석준(63, 광주 서구 농성동)씨로, 광주서광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을 하시다가 올 2월 말에 정년퇴직하셨고, 곱디 고운 백발을 비녀로 쪽지고 계신 분은 김 교장선생님의 모친이신 김소래 할머니(85)라고 합니다. 김소래 할머니의 옆에 계신 또다른 할머니는 김복래 할머니(80)이신데, 김 전 교장선생님의 이모이시자 김소래 할머니와는 자매지간이라고 합니다.

김 교장선생님은 모친이 피부가 가렵다고 하셔서 지난 17일(월) 광주를 출발, 장흥 안양에서 해수찜을 하며 1박을 하고 낙안읍성에서 음식축제를 구경한 뒤 선암사를 거쳐 화순 도곡온천에서 또 1박을 하고 광주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그동안의 일정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주셨습니다. 이어 김 교장선생님은 화순도곡온천에서 신새벽부터 사우나를 하는 통에 아침식사를 부실하게 해서 이곳 휴게소에 앉아 음료수와 과일을 먹고 있는 중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김 교장선생님의 모친인 김소래 할머니는 "사방 안 가려운 데가 없었는데 해수찜하고 온천에 갔다오니 말짱해졌다"면서 수줍게 웃으셨습니다. 저는 그렇다면 이모님의 동행은 어떻게 된 거냐며 마치, 있지 않아야 할 분이 옆에 계시는 것처럼 김 교장선생님께 물었습니다.

"우리 아들이 나를 제주도도 데려가고 중국도 데려가고 그러는데 그런 좋은 곳에 갔다 올 때마다 나중에는 느그 이모도 데려가자 하고 내가 막 졸랐네요."

모친과 이모님을 모시고 장흥, 순천, 화순 등지를 여행하신 김석준 전 교장선생님.
모친과 이모님을 모시고 장흥, 순천, 화순 등지를 여행하신 김석준 전 교장선생님. ⓒ 김두헌
김 교장선생님의 모친이 또 수줍게 웃으시며 대신 답변을 해주셨습니다. 김 교장선생님은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셨다고 합니다. 눈으로 보진 않았어도 김 교장선생님, 모친 그리고 이모님이 그동안 겪어야 했을 신산했을 세월이 한눈에 보이는 듯 했습니다. 세 분의 나이를 합하면 228살이니, 그 까마득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을까요?

"우리 어머니는 아직도 당신 딸들의 대변인 노릇을 하고 계십니다. 아야, 아범아 누구네가 어쨌다고 그래야? 혹시 니가 뭐 도와줄 방법은 없겄냐?"

김 교장선생님은 "우리 어머님은 아직도 당신이 고기를 직접 잡아 당신 자식들의 입속으로 집어 넣어드려야 신간이 편하신 분"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저는 그렇다면 김 교장선생님은 자녀분을 몇이나 두셨냐고 물었습니다. 2남 2녀를 두었는데 둘은 결혼시키고 둘은 아직 결혼을 안했다고 하시더군요.

"저는 그렇습니다. 잘 자라줘 고맙다, 고맙다. 자식들을 볼 때마다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이 험한 세상 반듯하게 자라준 것만도 정말로 고마운 일이지요. 그리고 저는 고기를 잡아주는 방법을 가르쳐야지 고기를 잡아서 먹여주는 교육법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고 또 그동안 그렇게 해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 교장선생님은 교장선생님 답게 저와 당신의 모친께 들으라는 소리는 아니겠지만 일장훈시를 하셨습니다. 그 표정이 어찌나 진지하고 엄숙한지 저도 돗자리 한쪽에 무릎을 꿇게 되더군요. 저는 이제 실례를 아주 많이했지 싶어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다 이모님께는 한 마디도 어쭙지 않은 것 같아 "이모님, 조카가 이렇게 이모님을 모시고 온천에도 가고 그러시니 좋으시겠습니다?" 하고 인사치레를 했습니다.

"우리 조카, 참 효자지요. 정년퇴직을 하고도 뭐 무슨 회관에선가 발 관리 교육을 받고 나랑 언니랑 발에다 안마도 해주고 그럽니다."

김 교장선생님은 얼마 전부터 금호교육문화회관에서 실시하는 사회교육 프로그램의 하나인 발관리 교육 수강생이 되셨다고 합니다. 퇴직후 집안에 가만히 있기도 뭐하고 해서 그런 거라도 배워 어머님과 이모님 발 마사지를 해드리고 싶다는 이유에서 라네요.

그분들의 사진을 찍어놓곤 그동안 잊고 있다가 얼마 전 신문에 미국 타임지에서 우아하게 늙어가는 미국인 10인을 선정했다는 보도를 보고 김 교장선생님이 떠올랐습니다. 선정된 인물들의 면면이 화려했는데요, 남자로는 폴 뉴먼(80), 콜린 파월(68) 전 미국 국무장관, 영화배우 로버트 레드퍼드(68),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작가 필립 로스(72)가 선정됐다고 합니다. 또 여성은 ‘살림의 여왕’ 마사 스튜어트(64), 1993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토니 모리슨(74), 영화배우 로런 배콜(81), ‘포크의 여왕’ 존 바에즈(64), 샌드라 데이 오코너(75) 전 미국 연방대법원 판사가 포함됐구요.

그래, 김 교장선생님이 생각나 제가 찍은 사진을 클릭해서 자세히 들여다 보니 김 교장선생님 오른편에 놓인 낡은 구두가 선명하게 보이더군요. 또 김 교장선생님의 맞은편에 선 낡은 소나타2 자동차도 기억납니다. 모친과 아들이 어찌 그리 닮았을까 싶어 빙그레 웃음까지 나왔습니다. 그래,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 세 양반들 돈 많은 나라 미국의 우아하게 늙어가는 사람들 못지 않게 참 곱게 늙어 가시는구나 싶어 여기에 이렇게 소개할 용기를 내게 됐습니다.

김 교장선생님의 모친과 이모님! 오래 오래 사시면서 젊었을 때 못 가보신 좋은 곳 많이 다니시면서 재미있게 사세요! 그리고 김 교장선생님! 지나던 길가에서 마주친 무례한 젊은이에게 좋은 가르침 주셔서 감사합니다. 장흥 정남진 바닷가에는 갈매기떼들이 한가롭게 날고 있었습니다.

전라남도 장흥의 정남진 바닷가.
전라남도 장흥의 정남진 바닷가. ⓒ 김두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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