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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 가는 길. 아침 강가에 물안개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양구 가는 길. 아침 강가에 물안개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 이승열
국토의 정중앙에서 변방 오지로 바뀐 양구군 방산면 거리 풍경
국토의 정중앙에서 변방 오지로 바뀐 양구군 방산면 거리 풍경 ⓒ 이승열
5분이면 거리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곳이다. 늙은 창녀처럼 생기 없는 전방의 작은 마을이 어젯밤부터 돌연 생기를 띠기 시작했다. 개구리 무늬 군복을 입은 젊은 군인들이 공중전화에서, 혹은 피시방에서 사정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명통구리' 잡화점이 있고, '왕족발'도 있고, '부자노래장'도 있다. 그리고 '서울식당'도 있다.

'명통구리(明通求利), 세상의 이치에 맞게 이익을 구한다.' 전방 잡화점에 먹물이 과하게 배었다. 마지막 글자의 한 획이 바람에 날렸는지 세월을 견디지 못한 채 사라져 버렸다. 오래 전, 이곳이 국토의 정중앙이었을 때는 금강산 가는 길목이었다 한다. '양구군 방산면 송현리.' 평화의 댐이 준공 18년만에 비로소 완공되었다는 현수막만이 이곳이 철책에 가로막힌 국토의 북쪽 끝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할 뿐이다.

'박수근 미술관' 가는 길. 아직도 피어 있는 미국쑥부쟁이 위에 서리가 내려 앉아 쉬고 있다.
'박수근 미술관' 가는 길. 아직도 피어 있는 미국쑥부쟁이 위에 서리가 내려 앉아 쉬고 있다. ⓒ 이승열
맨드라미 위에도 어김없이 서리가 내려 앉았다.
맨드라미 위에도 어김없이 서리가 내려 앉았다. ⓒ 이승열
양구에는 토요일 정오쯤 도착했다. 겨울철 소주병이 얼어 터질 만큼 추운 국토의 오지, 약간 더하면 서민 화가 박수근이 밀레를 꿈꾼 곳, 그것말고는 기억도 추억도 전무한 곳이었다. 언젠가 동해에서 서울로 돌아오다 폭우로 막힌 도로 때문에 잠깐 우회한 곳, 기억을 떠올려 박수근 미술관을 물었으나, 그곳 사람들조차 박수근을 전혀 몰랐던, 특색 없는 전방의 소읍이었다.

거리에는 노란 은행잎이 떨어져 쌓이고 있었다. 세상이 온통 다 노랗다. 학교 운동장도, 군청 가는 길도, 기와 지붕의 떡집 앞도 온통 다 은행잎 천지다. 밤을 지샌 오토바이 위에도, 막 시동을 켜고 어디론가 떠나는 차의 지붕 위에도 은행잎이 날리고 있다.

지난 18일 완공된 '평화의 댐' 가는 길. 벌써 가을이 땅까지 내려와 있었다.
지난 18일 완공된 '평화의 댐' 가는 길. 벌써 가을이 땅까지 내려와 있었다. ⓒ 이승열
자작나무 잎이 한 폭의 수채화같다. 금강산 가는 길목, 민통선 입구는 온통 자작나무숲이다.
자작나무 잎이 한 폭의 수채화같다. 금강산 가는 길목, 민통선 입구는 온통 자작나무숲이다. ⓒ 이승열
절정의 단풍은 이제 개울 물가까지 내려와 앉아 숨을 고르고, 아직도 빛을 발하는 맨드라미 붉은 꽃 씨앗에는 밤새 내린 서리가 물방울로 변해 가까스로 버티고 있었다.

지금은 변방이 되어 버린, 국토의 정중앙 양구는 온통 안개였다. 통행을 금지한 옛다리 위에는 검은콩이 도리깨질을 기다리며 가지런히 서 있고, 다리 아래 늪지 갈대 사이로 물안개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국방의 의무를 이 곳에서 보내고 있는, 젊음 때문에 괴로운 스물두 살의 조카녀석이 두고두고 고맙고 또 미안할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양구를 둘러싼 아침 안개. 물안개가 양구를 몽환적으로 바꾸었다.
양구를 둘러싼 아침 안개. 물안개가 양구를 몽환적으로 바꾸었다. ⓒ 이승열
안개에게는 신비한 힘이 있다. 아무리 남루한 일상이라도 피어오른 안개를 보면 나는 또 삶에 속고 만다. 그래도 견디어 내면 좋은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자꾸 내 삶을 위로하고 싶어진다.

젊은 군인들은 순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 스물두 살 청춘도 아직 보송보송한 솜털이 날리는 저 순한 얼굴과 닮았었을까? 군인들은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생이 변방의 철책선 앞에서 부서지고 있다고 자책하고 있었다. 스물두 살 때는 내가 내 생의 희망을 발견하지 못한 채 그저 세월을 견디면서, 빨리 어른이 되기를 염원했던 것처럼...

안개가 빠르게 걷히고 있었다. 남루한 변방 마을이 사는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토방에 수북히 쌓인 늙은 호박도, 일용농기구 수리점에서 열심히 끌을 갈고 있던 촌로의 구리빛 얼굴도 세상에 드러난다. 도시에서는 이미 사라진 가을이, 이곳 양구에서는 벌써 깊어 있었다. 모습을 드러낸 개울가 갈대도, 가을걷이를 끝내고 바닥이 드러난 논에도 깊어진 가을이 떠나려 하고 있었다.

평화의 댐에서 본 붉나무와 벚나무. 모두 제 자리에서 묵묵히 세월을 견디고 있다.
평화의 댐에서 본 붉나무와 벚나무. 모두 제 자리에서 묵묵히 세월을 견디고 있다. ⓒ 이승열
핏빛으로 물든 저 단풍도 봄날 싹을 틔우고 비바람을 견딘 후, 삶의 자양분을 짜내어 낙엽을 떨굼으로 혹독한 겨울을 준비하리라. 새 봄의 움틈을 위해서... 나는 젊은 군인들의 빛나는 얼굴을 바라보며 그들의 청춘을 부러워하고 있는가? 아니다. 결단코, 네버!

돌아가고 싶지 않다. 마흔이 갖는 세월의 무게가 내 삶의 중심이 되어 날 지탱하고 있다. 국경이 되어버린 철책선 앞의 양구의 가을처럼... 다만 스물 몇 살 즈음 내 얼굴도 젊은 군인의 구릿빛 얼굴처럼 빛났던 시절이 있었음을, 그 아름다운 시절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허비한 내 어리석음이 아쉬울 뿐이다.

양구 읍내는 온통 은행나무뿐! 거리가 온통 노란빛이다.
양구 읍내는 온통 은행나무뿐! 거리가 온통 노란빛이다. ⓒ 이승열
노란 양구에서 만난 학교 담벼락의 담쟁이. 계절이 공존한다. 우리네 삶처럼...
노란 양구에서 만난 학교 담벼락의 담쟁이. 계절이 공존한다. 우리네 삶처럼... ⓒ 이승열
안개가 걷힌 시각, 여전히 양구는 노란빛이다. 이젠 부석사의 은행나무 길을 그리워하지 않아도 되겠다. 바닥에 노란빛이 쌓여가고 있다. 벌써 해는 중천이고 나는 작년 마나님을 잃은 중풍 노인이 홀로 지키는 '춘천민박'으로 돌아가 그들의 청춘을 위해, 양구에서 보낸 내 가을밤을 위해 황태채를 풀고, 파를 썰고, 마늘을 넣고, 간을 맞추며 다만 북어해장국을 끓일 뿐이다.

 

덧붙이는 글 | '시월의 여행 이벤트 응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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