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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영수

사실적 접근이 돋보이는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

준공 20년이 얼마 남지 않은 역사 때문일까? 매헌기념관은 다른 기념관처럼 화려하거나 장중함을 드러내진 못했다. 하지만 실제 사진을 중심으로 매헌 윤봉길 선생의 일생을 잔잔하게 그려냈다.

혹여 사진으로도 미흡한 부분은 스케치를 통해 묘사했다. 이런 부분이 약간은 어설퍼 보일 수는 있으나 훨씬 정감 있어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매헌기념관의 전체적인 느낌은 시골에 있는 할머니 댁에서 받았을 법한 '푸근함'이라 하겠다.

ⓒ 유영수

기념관이 소재한 양재동 시민의 숲을 전에 한번 다녀간 적은 있었다. 그럼에도 그 안에 매헌기념관이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으니, 기자의 무심함을 탓해야 할 지 기념관의 홍보부족이 문제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바로 옆에 두고서도 잠간의 시간과 아주 약소한 입장료를 지불할 성의를 보이기 싫어하는, 아니 그 존재조차 간과해 버리는 현대인의 역사불감증을 한번 꼬집어 주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다.

윤봉길 의사가 1928년 창건한 부흥원의 대들보가 전시되어 있다.  민중에게 문맹퇴치운동 등 신문화 활동을 전개한 부흥원은 '조국 광복의 집'이란 뜻으로 윤봉길 의사가 직접 명명했다고 한다.
윤봉길 의사가 1928년 창건한 부흥원의 대들보가 전시되어 있다. 민중에게 문맹퇴치운동 등 신문화 활동을 전개한 부흥원은 '조국 광복의 집'이란 뜻으로 윤봉길 의사가 직접 명명했다고 한다. ⓒ 유영수

매헌기념관과 함께 시민의 숲을 제대로 만끽하고 싶다면 혹시 자가용을 이용하더라도 기념관 앞 주차장이 아닌, 강남대로 쪽에 마련된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오시라 권하고 싶다. 그리고 천천히 4.8km에 이르는 산책로에서 산림욕을 하고 맨발공원에서는 피로에 지친 발바닥에게 잠시 자유를 허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기념관은 매헌 선생에 대한 강좌나 각종 행사가 열리는 3층의 강당을 제외하곤, 선생의 유물 전시실과 생애도실이 있는 1층과 독립운동 사진 전시실이 있는 2층으로 구분된다.

윤봉길 의사의 생애도는 윤의사의 생애를 수학기와 농민운동기, 그리고 상해의거기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으며 전시실에는 수학기의 서책류와 문방구류 및 농민운동기 시절의 저서들과 의거 당시의 소지품들을 고루 전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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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당시 윤보선 대통령이 수여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건국공로훈장증은 누렇게 빛이 바래 있었지만, 윤봉길 의사의 정신만은 여전히 빛나는 금빛훈장처럼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었다.

특히 2층 독립운동 사진 전시실에서는 구체적인 사진과 도표 등을 통해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독립운동사에 대해 깊이 이해할 수 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보통 역사적 위인들의 기념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친의 사진뿐만 아니라 모친과 함께 찍은 자손들의 사진이 전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궁금해지는 것이 있다. 왜 인물기념관에서는 모친의 사진은 쉬 찾아볼 수 있는데,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부친의 사진이나 초상화는 흔적조차 없는 것인지...

1932년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공원에서 일본군 요인들에게 도시락폭탄을 투척하는 장면을 재현한 미니어처
1932년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공원에서 일본군 요인들에게 도시락폭탄을 투척하는 장면을 재현한 미니어처 ⓒ 유영수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

- 윤봉길 의사의 어록 중에서 -


아이들의 환호성이 메아리치는 도산 안창호 기념관

ⓒ 유영수

우선 이 도산 안창호 기념관을 찾는 이들에게 자동차는 반드시 놓고 가라고 당부하고 싶다. 도산공원 바깥에 유료주차장이 마련되어 있긴 하지만, 빈 자리를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 만큼이나 어려운지라 웬만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특히 휴일에는 근처에 작은 갤러리와 스튜디오는 물론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음식점의 내방객들로 인해 주차장은 만원이기 일쑤다.
1917년 멕시코로 떠나기 전의 가족사진
1917년 멕시코로 떠나기 전의 가족사진 ⓒ 유영수

그런데 이상한 점은 기념관에 다가설수록 어디선가 울리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는 것이었다. 어디서 운동회를 하나 했더니 도산공원 안, 그것도 기념관 바로 앞에서 가을소풍이 한창이다.

인근에 있는 교회 유년부 학생들과 학부형들이 구름 한점 없이 맑은 하늘 아래 각종 놀이를 즐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이상하게 느껴지기는커녕 너무 자연스럽게만 보였다. 혹여 고요해야 할 기념관 앞에서 웬 소란이냐며 개탄하는 이가 있다면, 한참 시대에 떨어진 자신의 고루한 생각을 반성해야 할 것이다.

노란 국화꽃과 잘 어울리는 깔끔한 이미지의 기념관 외관
노란 국화꽃과 잘 어울리는 깔끔한 이미지의 기념관 외관 ⓒ 유영수

어렵고 따분하게만 느껴질 수 있는 역사 속 인물에 대해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알려줄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어차피 조성된 도심 속의 휴식공간을 선생의 후손들이 향유한들 무슨 흠이 된다는 말인가.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그 많은 사람들이 공원 안에 들어와 있었음에도, 입장료조차 받지 않는 바로 옆 기념관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자연스레 기념관에 찾아오게 하는 섬세한 배려가 아쉬운 대목이다.

온화한 분위기가 특징인 아담한 규모의 기념관 내부
온화한 분위기가 특징인 아담한 규모의 기념관 내부 ⓒ 유영수

도산 안창호 기념관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아담한 규모라서 조금 놀랐다. 마치 교외에 나들이 갔다 우연히 마주치곤 했던, 개인 소유의 박물관을 마주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작고 소박한 규모와는 달리 내실 있는 소장품과 전시물을 통해, 이제까지 잘 알지 못했던 선생에 대한 사실들을 깨닫게 해 주는 역할은 충실히 해내고 있었다. 특히 선생이 미국으로 출국할 당시의 집조(지금의 여권)는 흥미로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했고, 다른 위인들의 기념관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여러 장의 오래된 가족사진은 선생의 유품을 소중히 간직해 온 기념사업회의 노고를 엿보게 했다.

1902년 도산 선생이 미국으로 출국할 당시 소지했었던 집조(지금의 여권)
1902년 도산 선생이 미국으로 출국할 당시 소지했었던 집조(지금의 여권) ⓒ 유영수

여타 기념관과 비교해 가장 돋보이는 것은 도산 안창호 기념관의 리플릿이었다. 꽤 두꺼운 리플릿에는 선생의 생애와 민족운동이 상세하게 안내돼 있어,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기에 충분했다.

나는 죽음의 공포가 없다
나는 죽으려니와 내 사랑하는 동포들이
그렇게 많은 괴로움을 당하니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다...
일본은 자기 힘에 지나치는
큰 전쟁을 시작하였으니
필경 이 전쟁으로 인하여 패망하오,
아무런 곤란이 있더라도 인내하시오...

장래를 바라본 선생의 탁월한 식견은 물론 동포에 대한 애절한 사랑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 선생의 글을 보며, 이 시대의 정치가들이 선생의 사상을 천만분의 일이라도 닮았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 부질없는 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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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사랑하고 대자연을 누리며 행복하고 기쁘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서울에서 평생 살다 제주에서 1년 반,포항에서 3년 반 동안 자연과 더불어 지내며 대자연 속에서 깊은 치유의 경험을 했습니다. 인생 후반부에 소명으로 받은 '상담'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더 행복한 가정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꿈꾸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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