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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가 피어가는 황금들녘
억새가 피어가는 황금들녘 ⓒ 김규환
황금물결이 출렁이는 가을이다. 나들이 가기에 참 좋은 날씨다. 간단히 밥을 싸들고 아이들 차에 태워 밖으로 나가보자. 너른 들판이 바둑판처럼 펼쳐진 김포평야로 갈까, 벌써 가을걷이가 끝나가는 계단 논을 볼 수 있는 산골 마을로 떠날까.

모르겠다. 일단 서울을 빠져나가자. 갈대가 한강 둔치에서도 춤을 추고 있다. 간간히 올림픽도로를 달리다보면 하얀 억새꽃을 구경할 수 있으니 벌써 도착이라도 한 듯 마음이 풀어진다.

부천 중동에서 약대동을 바라보면 김포공항이 있다. 아직까지는 논이 있지만 언제 모두 사라질 지 모르겠다.
부천 중동에서 약대동을 바라보면 김포공항이 있다. 아직까지는 논이 있지만 언제 모두 사라질 지 모르겠다. ⓒ 김규환

해강: "아빠 우리 오늘 어디 가요?"
아빠: "응, 아무 들판에나 가보자."

해강: "거긴 뭐가 있는데요?"
아빠: "우리가 먹는 밥은 뭘로 하지?"

해강: "음…. 아빠는 그것도 몰라요 쌀로요."
아빠: "쌀을 잘 씻어서 물을 붓고 끓이면 밥이 되지? 아빠 엄마가 어릴 때는 불을 때서 가마솥에 했단다. 지난번에 가마솥 봤잖아. 추어탕 끓일 때 썼던 까맣고 큰 솥단지 말야."

해강: "알아요. 왜요?"
아빠: "응, 거기다 밥을 하면 훨씬 맛있거든. 누룽지도 긁어먹고. 근데 쌀은 어디서 나오는 거지?"

해강: "벼에서요. 그것도 아빠가 가르쳐 주셨잖아요. 벼가 익어야 쌀이 열린다고 했어요."
아빠: "그럼, 벼는 어디서 자라는데?"

해강: "잘 모르겠는데요."
아빠: "지난번에 우리 밭 밑에서 봤잖아. 한 글자인데."
엄마: "해강아 우리 밭 밑에 있는 논에서 나는 거야."

탱글탱글 익은 벼
탱글탱글 익은 벼 ⓒ 김규환
아내가 끼어들어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해강: "나도 알아요."
아빠: "그럼 왜 말하지 않았어?"

해강: "잊어먹었어요."
아빠: "그렇구나. 논에다 어린모를 심으면 자라서 벼가 되고 방아를 찧어 껍질을 벗기면 쌀이 되는 거야. 그러니까 할머니 할아버지하고 삼촌들이 힘들여서 농사지었으니까 한 톨도 남기지 말고 잘 먹어야겠지?"

해강: "아빠 아빠 그럼 서울에도 논이 있어요?"
아빠: "그럼 논이 있고 말고."

해강: "아파트만 보이는데요?"
아빠: "아냐 지금도 서울에 논이 있어. 부천에 사는 단비 언니네 가다보면 양쪽으로 쌀을 만드는 논이 있잖아."

해강: "희서 오빠 사는데요?"
아빠: "그래. 왼쪽은 서울이고 오른쪽은 인천 계양구란다. 우리가 지나왔던 뒤쪽은 김포시 고촌면이고 앞쪽은 부천 셋째 이모네 가는 곳이야."

아파트에 갇힌 논. 부천 중동에서 인천 계양을 바라보았다.
아파트에 갇힌 논. 부천 중동에서 인천 계양을 바라보았다. ⓒ 김규환
여기서 솔강이도 끼어들었다.

솔강: "아빠 아빠 그럼 서울에 논 많아요?"
아빠: "응, 옛날에는 참 많았지. 우리집 안암동 가까운 곳에 선농단이 있거든 거기서 임금님도 절을 하고 농사를 지었었어. 그보다 먼저 암사동에선 사람들이 조와 피, 수수, 벼를 심어서 먹었고 고기도 잡았어. 제기동, 전농동, 왕십리, 답십리, 청량리가 모두 논이었다.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청문까지 동서남북에 4대문을 만들어 성곽을 조성하였는데 그 뒤로도 성밖은 농사를 지었단다. 누에를 치는 뽕밭은 잠원동, 잠실동 일대에 넓게 펼쳐져 있었지."
엄마: "와 대단하군요."

아빠: "그런데 논이 많이 없어져서 이젠 얼마 남지 않았단다. 왜 그러냐 하면 1949년엔 은평구 일부가 1973년엔 북한산 서북부 지역 너른 들판이 서울이 되어 집이 많이 들어섰단다."

김포평야 장지동엔 대형 콤바인에 트랙터로 손쉽게 수확을 한다. 가마니가 무척 컸다.
김포평야 장지동엔 대형 콤바인에 트랙터로 손쉽게 수확을 한다. 가마니가 무척 컸다. ⓒ 김규환
해강: "왜 그렇게 집을 많이 지어요?"
아빠: "응, 삼촌이랑 고모, 이모, 아저씨들이 시골에서 농사를 짓다가 서울로 올라오자 집이 부족하잖아. 그래서 영등포구(永登浦區) 동(東)쪽도 본격 개발하게 되었지. 한 글자씩 따봐 그러면 지금 테헤란로가 있는 영동(永東)이라고 하는 강남구 서초구 일대가 되는 거야. 강동과 송파구를 합치면 서울 면적의 1/4에 해당하는 너른 들에 높은 건물이 들어선 것이란다."

해강: "그럼 우리가 먹는 쌀이 없어지잖아요."
아빠: "그러게 자꾸 농사짓는 땅이 좁아지잖아 고속도로, 기찻길도 만들어야 하고…."
솔강: "아빠 우리 노래 불러요."

아이들은 기찻길 이야기만 나오면 여전히 노래를 부른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아기 잘도 잔다. 칙폭 칙폭 칙칙폭폭 칙칙폭폭 기차소리 요란해도 아기아기 잘도 잔다. 기찻길 옆 옥수수밭 옥수수는 잘도 큰다. 칙폭 칙폭 칙칙폭폭 칙칙폭폭 기차소리 요란해도 옥수수는 잘도 큰다."

내 고향 화순에도 이토록 아름답게 익어가고 있겠지. 경지정리 되지 않은 들녘이라 더 아름답다.
내 고향 화순에도 이토록 아름답게 익어가고 있겠지. 경지정리 되지 않은 들녘이라 더 아름답다. ⓒ 김규환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빠: "그 때 맞춰 농사에도 기계가 도입되고 북진통일 계획을 숨기지 않던 정부가 육종개량에 힘써 수확량이 서너 배 많은 통일벼를 만들었지. 굶주림에 허덕이던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 서울이 만원이 되었지만 다수확 품종 덕에 차차 주곡이었던 쌀에서만큼은 걱정을 덜었다. 식량 문제가 단번에 해결되었지만 '유신벼'라는 이상한 것도 나오더니 결국 대통령이 경호실장 총에 맞아 죽고 말았어."

해강: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아빠: "그래 서울에도 논이 있다는 것만 알아도 얼마야. 얼마 있으면 강서구 쪽에도 아파트단지가 크게 들어서 아마도 도시 속 들판을 보기는 힘들게 될 거야. 아빠는 콱 막힌 서울에도 우리나라 역사를 배우는 차원에서라도 논이 남아 있으면 좋겠다. 할머니 할아버지 또 그 위 어른들과 이순신 장군이 살았던 때보다 더 오래된 시절에도 여기서 농사를 지었다는 걸 알 수 있게 말이야."

아파트와 농지가 싸우면 어김없이 논은 자리를 내주고 만다.
아파트와 농지가 싸우면 어김없이 논은 자리를 내주고 만다. ⓒ 김규환
해강: "논이 없어지면 어떻게 되는데요?"
아빠: "여기서는 수확은 얼마 되지 않지만 의미가 남다르지. 아빠 생각엔 농업박물관도 이런 자리로 옮겨와 건물 안에서는 생활유물을 보고 밖에선 한 해 동안 씨를 뿌리면 싹이 트고 김매기를 하여 가을이 되면 꽃이 피어 이삭이 고개를 숙여 누렇게 수확을 앞둔 풍요한 들판 구경을 할 수 있게 하면 좋겠다. 수확하는 장면도 돌에 그냥 털고 개상에 털고 홀테에 잡아당기고 도리깨로 후려치는 걸 지나서 발로 밟아 탈곡하던 70년대도 보고 거대한 발동기 바퀴도 설치하면 그게 공부 아니야. 요즘 콤바인으로 하는 방식도 보여주고 말야."
엄마: "아빤 논 이야기 하면서 왜 그리 말이 많아요? 여보 우리 지금 어디까지 온 거예요."

아빠: "오늘은 큰 도로 말고 좁은 지방도를 따라 한번 가봅시다."
엄마: "왜요?"

아빠: "국도도 요즘엔 왕복 4차선 이상인 곳이 많아서 한적한 시골 분위기를 맛볼 수 없어요. 게다가 운전하다가 멋진 곳을 그냥 지나치기 일쑤라니까요."
엄마: "아침을 먹고 왔어도 출출해지네요."

아빠: "아 그렇지. 맞아요. 이런 길을 택한 이유가 바로 나오네. 요즘엔 들에 새참을 내오는 집이 없을 것 같지만 혹 알아요. 논배미에서 새꺼리 몇 술 얻어먹을지?"
엄마: "정말 맛있겠네요."

인천 계양산에서 새참을 얻어먹었다. 작은 길로 가다보면 이런 푸짐한 인심이 살아 있어 좋다.
인천 계양산에서 새참을 얻어먹었다. 작은 길로 가다보면 이런 푸짐한 인심이 살아 있어 좋다. ⓒ 김규환
솔강: "아빠 그럼 누가 논을 만들었어요?"
아빠: "누가 만들었을까?"
해강: "할머니 할아버지가요."

아빠: "그래 맞았다. 처음에는 돌과 모래투성이였지. 그런데 큰 돌과 잔돌을 주워내고 풀을 뽑고 좋은 흙을 파다가 들이고 물을 끌어오니까 논이 된 거야."
솔강: "아 그렇구나."

엄마: "처음부터 논이 아니었다는 거네요?"
아빠: "당연하죠. 어렸을 때 나도 밭과 논을 만들어봤어요. 그 큰 돌 하나 빼려고 하루가 갔던 적도 있다니까요. 빼고 나서는 옮기려는데 다리가 후들거려.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오지. 그 때 생각하면…."

은평구 진관외동 북한산 자락에 밭이 곳곳에 있는데 7~8년 전까지는 논농사를 짓다가 지금은 명목만 논일 뿐 밭으로 쓰고 있는 곳이 보인다.
은평구 진관외동 북한산 자락에 밭이 곳곳에 있는데 7~8년 전까지는 논농사를 짓다가 지금은 명목만 논일 뿐 밭으로 쓰고 있는 곳이 보인다. ⓒ 김규환
서울은 2천 여 가구가 논농사를 짓는다. 면적은 총 730여 ha(1헥타르는 3천평)이니 220만평 정도가 남아 있다. 지목 상 답(畓)인 논으로 되어 있지만 나대지로 내버려둔 은평뉴타운 예정지구에도 논이 있다.

덧붙이는 글 | 가을걷이 철을 맞아 예전에 농사법과 풍경을 몇 차례로 나눠 그려나갈 예정입니다. 농사변천사도 한번 나오면 좋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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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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