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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가장 좋아하는 국화는 감국, 소국, 산국입니다. 차와 술로 담가 먹으면 추위를 이길 수 있죠. 방에 걸어두면 향기로 진동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국화는 감국, 소국, 산국입니다. 차와 술로 담가 먹으면 추위를 이길 수 있죠. 방에 걸어두면 향기로 진동합니다. ⓒ 김규환
가을 쑥이 다시 파르라니 기지개를 켰다. 고추밭엔 냉이도 움을 틔웠다. 고들빼기도 빠지지 않고 코빼기를 내밀었다. 문 걸어 놓고 먹는다는 가을 상추 보드랍게 춤을 추고 시어머니 몰래 문고리 잡고 먹는다는 아욱이 맛난 계절이다.

배추 포기가 알차게 차며 단맛을 풍기는 요즘 무 뿌리도 뒤따라 수분을 덜어내고 맛을 들이느라 바쁜 철이다. 봄엔 수십 종류 나물을 찾아먹느라 입이 즐거웠다. 그 덕인가 여름을 잘 났다.

가을로 접어들어서는 호박쪼가리, 가지 쪼개 널고 피마자 잎과 토란잎 고구마순 말리느라 볕을 찾아 나날을 보냈다. 이제 싸늘함을 살갗이 먼저 알아차리는 진짜 가을이다. 땅속 물이 수돗물보다 따뜻해지면 내 마음도 덩달아 덩실덩실 춤을 춘다.

벌개미취가 아마 제일 일찍 필 겁니다. 오대산 월정사 근처 <한국자생식물원>에 7, 8월에 가면 몇 만평 이 꽃이 피어있답니다. 그 때부터 국화는 피기 시작했습니다.
벌개미취가 아마 제일 일찍 필 겁니다. 오대산 월정사 근처 <한국자생식물원>에 7, 8월에 가면 몇 만평 이 꽃이 피어있답니다. 그 때부터 국화는 피기 시작했습니다. ⓒ 김규환
꽃과 만날 생각 때문이다. 춘천 가는 기차 타고 북한강을 거슬러 오르면 물 속에 산 그림자 퐁당 빠져 같은 풍경 두 장을 포개놓았다. 흐리멍덩하던 물빛이 이내 멸치 떼가 뛰놀 듯 반짝거리다가 노란 물감을 짠 듯 물들어 간다. 수정보다 더 값진 속삭임엔 곧 국화꽃잎 낱장 흘러 내 마음에 박히겠다. "칙칙폭폭" 굉음을 울리며 서두르는 건 어서 오라는 전갈이 와서겠지.

가을을 부르는 국화(菊花)는 수십 종이 있다. 코스모스와 과꽃, 개망초가 먼저 피었다 아쉽게 지고 말았다. 도시 거리엔 밤이슬 마다않고 국화 한 송이 들고 두근두근 누군가를 찾아가는 그리운 향기가 퍼진다. 이런 파문은 시작에 불과하다.

마타리 꽃 앞에 선 여인들.
마타리 꽃 앞에 선 여인들. ⓒ 김규환
청평역에 내려 버스로 갈아타고 들로 나가면 들깨 터는 소리에 실려 온 애잔한 스침에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호수를 끼고 굽이굽이 돌아 언덕배기 올라 산으로 접어들면 벌을 끌고 나그네 발길을 잡는다. 다가가 멈춰 서자 들꽃처녀 가을잔치가 한창 무르익고 있다.

끼리끼리 화전놀이라도 나온 건가. 참취, 쑥부쟁이, 구절초, 마타리, 곰취, 엉겅퀴, 수리취, 씀바귀, 미역취, 우산나물, 삼잎국화, 참나물, 감국, 고들빼기, 단풍취, 바위취…. 오십 가지가 넘는다는데 또 뭐가 있더라? 곤드레도 있고 씀바귀도 갖가지다. 가을에 피는 꽃은 거개가 국화다. 그래 또한 국화는 나물이지.

이 아가씨는 쑥부쟁이인가 구절초인가?
이 아가씨는 쑥부쟁이인가 구절초인가? ⓒ 김규환
봄 처녀는 어느새 키가 크지는 않지만 큰아기 어여쁜 모습으로 단장하였다. 볼엔 노란병아리 털 마냥 보송보송한 곤지를 찍었다. 판에 박은 듯 꽃잎 한 장 한 장 엇비슷한 듯 하면서도 낱낱이 제각각이다.

"저분 우리에게 다가오나 봐."
"아냐, 모양새가 그냥 지나칠 것 같은데. 서울 사람이잖아."
"꼭 땅꾼 닮았지만 그래도 쉬었다는 가지 않을까?"

마치 나를 놀리는 듯 했다. 겉으로 보기엔 이래봬도 지게 3단에 나물과 꽃, 나무 5단이니 합이 8단 아닌가.

"참 아가씨들도 지나가는 과객 마음 흔들어 놓아 뭐할 겁니까? 한참 처자들이 즐기기에 방해하지 않으려 했거늘 이렇게 수작을 걸어주시니 잠시 쉬었다 가도 되겠소이까?"

우리 밭에 피어 있는 국화의 한 종류
우리 밭에 피어 있는 국화의 한 종류 ⓒ 김규환
싫지 않은 표정이다. 아이에게 즐겨하던 코뽀(뽀뽀는 입 박치기라면 코뽀는 코를 마주대고 사랑을 나누는 방법이다)를 했다. 짐짓 놀란 척 한다. 나그네는 곧 그 자리에 목석처럼 마음을 뉘였다. 시중도 들고 여흥을 돋우려고 꽃 잔치 세계에서 통하는 휘파람을 불어줬더니 즐거워라 한다.

냇가, 바위틈, 자갈밭, 밭가, 들길과 나무 그늘 아래 무수히 은근히 숨어 있어 더 고고하다. 설악산 바위 난간에 핀 솜다리나 독일 방향 알프스에 있는 에델바이스보다 더 위험한 곳에 턱 자리를 잡고 있으니 내 몸마저 흔들리는 듯 갈피잡기 힘겹다.

뻐꾹채 씨가 영글고 있네요. 수리취, 분대나 마찬가지인데 쑥떡을 하면 참 쫄깃쫄깃 맛이 끝내줍니다.
뻐꾹채 씨가 영글고 있네요. 수리취, 분대나 마찬가지인데 쑥떡을 하면 참 쫄깃쫄깃 맛이 끝내줍니다. ⓒ 김규환
매화가 추위와 함께 찬란한 봄을 노래했듯 국화는 창공의 빛을 모아 쓸쓸한 가을을 따스하게 한다. 오밀조밀 반은 가을하늘 빛을 닮고 나머지는 공기와 산천이 남긴 빛을 담았다.

누가 더 빼어나다 다투지 않았다. 사이좋게 자리를 나눠 앉은 품새가 그저 그런 동무들과 다르다. 측백나무 향기는 모질어서 오래 가까이 있고 싶지 않다. 그는 단풍보다도 초라해 보이지만 가을 산천 들길 일부가 되어 그냥 하얗고 파르랗고 노랗다. 자줏빛이며 우유로 목욕을 한 듯 말끔할 뿐이다.

밭에 산부추 꽃도 피었습니다. 아래 하얀 것은 취나물 꽃입니다.
밭에 산부추 꽃도 피었습니다. 아래 하얀 것은 취나물 꽃입니다. ⓒ 김규환
촉촉이 맑은 이슬을 한 모금씩 머금고 있으니 내 마음 갈증이 싹 가신다. 계곡도 여름내 들이친 비로 깔끔하게 씻겨졌으니 엎드려 졸졸 흐르는 물 한 모금을 마셔본다. 여기 안에도 도란도란 배있던 그리움이 녹아 있어 그윽하니 하루쯤은 국화차인들 생각이 날까 보냐.

행여 함께 나온 아이가 추울까봐 노란 이불을 미리 준비하는 세심한 마음 씀씀이에 한없이 넉넉해졌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바삭거리는 낙엽을 깔고 포근한 양지바른 산비탈에 앉아 뉘엿뉘엿 지는 해를 바라보노라니 눈시울과 꽃엔 어느새 눈물이 한 모금씩 고인다.

보통 취나물이라고 하는 참취꽃입니다.
보통 취나물이라고 하는 참취꽃입니다. ⓒ 김규환
곧 들판이 텅 비어가겠지. 마른 잎, 갈대, 억새가 옷깃을 스치면 살을 도린 듯 서글프다. 바람만 휭 하니 불면 누군가 붙잡고 싶어진다. 가없이 허전한 마음을 채워주려 가을향기 잔뜩 머금은 그대들 덕분에 맘 붙일 데라도 있는 거다.

이 공활한 가을 하늘 아래 있다는 게 얼마나 다복인가. 손에 대지 않아도 정신이 혼미하도록 씁쓰레한 향이 박히고 세상 만물은 열매와 씨를 머금어 풍요한 천국에서 보낸 한철을 마련하다니. 잡 냄새 없이 처절하고 눈부시게 좋은 날이 언제까지 이어지려나.

고려엉겅퀴 또는 곤드레라고 하는 나물 꽃이 퍽 예쁩니다. 밭에 있습니다.
고려엉겅퀴 또는 곤드레라고 하는 나물 꽃이 퍽 예쁩니다. 밭에 있습니다. ⓒ 김규환
한 송이 꺾어 꽃핀 꽂아주면 사랑하는 이도 아이처럼 내내 싱글벙글 환히 웃으리라. 취한 듯 비틀비틀 내려오던 산길에 쉬어도 그 향 그 품위가 쉬 사라지지 않는다. 아이고나 품자 가슴에 품어.

오상고절(傲霜孤節)을 따를 수 있을까 모르지만 집 앞에 모셔와 첫눈 내릴 때까지 두고두고 보리라. 말려서 찻물에 띄우고 몇 모금 마실 술 한 병은 준비해야지. 누군가 지금 당장이라도 함께 떠날 마음만 있다면야 내 굳이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화전(花煎) 부칠 만반의 준비를 하겠다.

지난 주말 코스모스, 맨드라미잎, 구절초와 감국을 넣고 화전을 부쳐 먹었습니다. 집으로 가져올 땐 꽃병에 꽂아야 시들지 않습니다.
지난 주말 코스모스, 맨드라미잎, 구절초와 감국을 넣고 화전을 부쳐 먹었습니다. 집으로 가져올 땐 꽃병에 꽂아야 시들지 않습니다. ⓒ 김규환


산나물꽃동산
산채원에 있어야 할 존재 하나

<산채원>은 그저 그런 채마밭이려니 여기던 사람들도 내가 유난히 가을엔 미친 듯 들로 산으로 나가면 뭔가 일을 내려고 잔뜩 웅크린 호랑이 같다고 한다. 그래 잠자는 호랑이든, 먹잇감을 노려보는 짐승이든 간에 내 목표물은 산과 들에 있다.

정원 하나 만들기야 식은 죽 먹기다. 나물 농사 지어 도회지로 내보내 입에 풀칠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내 계획은 여기까지가 아니다. 개인이 사는 문제에 집중하다보면 소탐대실 할 것은 불 보듯 뻔 하지 않은가.

450여 가지 식용 나물동산에 원두막 하나 지으면 벌과 나비 떼 몰리듯 아이와 연인 손잡고 와서 산부추, 두메부추 듬성듬성 썰고 참나물 뜯고 꽃잎 몇 장 올려 향기를 부치고 고기 구워 제대로 누리도록 돕는데 있다.

산마늘 장조림 꺼내고 곰취나물 장아찌 꺼내서 꽃을 만지작거리며 흥에 취하고 향기에 몸을 맡기는 즐거운 상상을 해보라. 손때 묻지 않은 자연 그대로에 산나물만 옮겨놓은 정원이라니. 먹는 게 살로 가니 절로 몸에 유익하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입으로 먹고도 아쉬우면 봄에 다시 와서 산채비빔밥이나 쌈을 즐기는 어른과 아이들 놀이터고 학습 터다.

가을엔 꽃동산이다가 월동을 한 사이 잠시 쉬고 있노라면 제들끼리 씨가 튀고 날며 뿌리가 뻗어 이른 봄엔 나물동산으로 바뀌니 이 얼마나 고마운가.

곳곳을 다녀 봐도 수목원, 휴양림, 식물원은 그리 많지만 나물과 꽃이 주제이면서 현장에서 싸게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곳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여기에 고향의 맛, 전통조리법을 활용한다면 금상첨화겠다.

욕심 부리지 않고 마을 어귀에서부터 양쪽으로 꽃길을 넉넉히 만들어 기분 좋게 산나물꽃동산에 이르면 여름과 가을에 나눠 흐드러지게 피어 장폭의 산수화를 감상케 하리라. 소나무와 활엽수가 어우러진 아래 키 큰 것과 올망졸망 밑에 있는 작은 꽃이 있는 풍경 그립지 아니한가.

제 아무리 아름답고 몸에 좋은 꽃이라 한들 깊은 산에 가야 있다면 우리가 그 존재를 알아차리기 전에는 다가오지 않는다. 산에 일부러 들락거려 파괴하느니 누구나 접근이 쉽도록 어느 시골 마을에 집중적으로 씨를 퍼트리는 일이야말로 21세기형 농사꾼, 귀농과 귀향을 꿈꾸는 사람이 서둘러 조성해할 농촌체험 프로그램의 핵심이다. 꽃도 보고 나물도 먹으니 일석이조 두 배 효과를 거두는 것 아닌가.

3년에서 길게는 5년이면 내 고향 화순 백아산에 마음의 뿌리를 박고 들국화와 산나물 친구들과 함께 보낼 날이 올 것이다. 산 감국이 서리를 맞는 내 생일 쯤엔 굳이 국화를 꺾지 않아도 되겠다. 마당에서 국화잔치를 열기 위해 나는 가을만 되면 방랑자가 되어 떠돌아다닌다.

바라지도 않지만 횡재는 아직껏 없었다. 다니다보니 차곡차곡 들꽃을 만지는 작업은 벌써 꽤나 진척되어 있다. 집단적 참살이인 로하스엔 환경뿐만 아니라 문화와 교육이 추가되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 김규환

덧붙이는 글 | 주말 계획 미리 짜시기 바랍니다. 골짜기마다 들국화가 만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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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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