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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이야기를 하며 조금씩 예전의 표정을 찾는 아이들. 가을 저녁 노을만큼 아이들의 표정도 곱다.
옛 이야기를 하며 조금씩 예전의 표정을 찾는 아이들. 가을 저녁 노을만큼 아이들의 표정도 곱다. ⓒ 이승열
백 마디 말보다 더 진한 아이들의 몸의 부딪힘. 농구를 끝으로 다시 오랜 이별을 했다.
백 마디 말보다 더 진한 아이들의 몸의 부딪힘. 농구를 끝으로 다시 오랜 이별을 했다. ⓒ 이승열
아들의 어린 시절 별명은 '마스크 맨'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 학년에서 가장 작았던 키,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았던 가냘펐던 몸, 9월쯤 쓰기 시작한 마스크를 그 다음 해 5월쯤 벗어서, 몇 달을 빼고 일년 내내 하얀 마스크를 쓰고 있어 생긴 별명이었다.

아이가 여섯 살이던 95년 10월 1일. 신혼 때부터 살던 곳을 떠나 처음 이사를 했는데 그때도 아이 입에는 어김없이 하얀 마스크가 씌워져 있었다.

"몇 살이니? 뭐 여섯 살, 근데 왜 이렇게 작니?"
"어머 벌써 마스크하고 다니면 겨울은 어떻게 나니?"

어른들은 아이에게 이런 질문을 마구 던졌다. 내가 어린 시절 가장 스트레스를 받았던 질문들이 아이에게 무차별하게 쏟아져 고스란히 상처가 되고 있었다.

아이는 이사를 간 후 '유치원 종일반' 원생이 되었다. 80명 정도의 아이들 중 오후에 남는 아이는 대여섯 명뿐이었다. 엄마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부럽게 바라보며 유치원에서 점심을 먹고, 유치원 앞 놀이터에서 모래 장난을 하거나 뒷뜰 날바닥에 앉아 레고 놀이를 하면서 엄마가 데리러 올 때까지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약하고 잘 앓던 아이가 환경이 바뀌면서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악화됐다. 종일반에 다닌 지 한 달 후쯤 기침이 심하던 아이의 귀에 이상이 있음을 발견했다. 큰 소리로 불러야만 한 박자 늦게 대답했던 것은 심한 기침으로 귀에 물이 고여 중이염이 심해져 잘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신 마취를 통해 귀에 가는 관을 박고, 그 관을 통해 물을 밖으로 빼내 치료하지 않으면 듣는 기능에 영영 문제가 생길 거란 의사의 진단이 내려졌다. 그래프에 그려진 아이의 청력 테스트는 내가 보기에도 정상은 아니었다. 나이 든 어른들 중에 가는 귀 먹은 사람이 많은 이유도 감기로 인한 합병증을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 생긴 결과라고 했다.

채 20kg도 되지 않는 연약한 아이를 전신 마취를 시킬 수는 없었다. 우선 수술하지 않고 치료할 수 있는 병원으로 바꾸고 오랜 기간 약물 치료 후 아이의 청력은 간신히 제 상태로 돌아 왔다. 하지만 따뜻한 봄이 올 때까지 누군가 아이를 돌보지 않는 한 재발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결국 지방에 계시는 아이 할머니의 두 집 살림이 시작되었다. 할머니는 찬바람이 가실 동안만이라는 전제를 달고 아이를 돌보러 서울로 오셨다. 절대 엄마를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를 내려 보낼 수 없어 가슴 아파한 할머니가 내린 결론이었다. 몇 달 전 위암 수술을 하시고 요양 중인 할아버지가 주말에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다음 해 오월까지 불편함을 참아 주셨다.

할머니가 본가로 내려가고 난 뒤, 내가 직장을 그만두지 않는 한 아이는 다시 종일반에 가야 했다. 그때 아이를 돌봐주겠다고 먼저 어머니께 말한 사람이 찬휘 엄마였다. 사실 나도 찬휘 엄마가 오후에 우리 아이도 함께 돌봐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하지만 내 쪽에서 먼저 부탁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었다. 내 아이 하나 돌보기도 힘든데 찬휘, 찬영 두 아들에 우리 종혁이까지 맡는다는 것은 개인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인생을 통째로 아이에게 쏟아 부음을 의미했다.

96년 혹는 97년 가을 서울랜드. 종혁, 찬휘, 찬영, 성원, 찬휘의 첫사랑 수진, 그리고 끝이 영주.
96년 혹는 97년 가을 서울랜드. 종혁, 찬휘, 찬영, 성원, 찬휘의 첫사랑 수진, 그리고 끝이 영주. ⓒ 이승열
2005년 10월 슈퍼 모델 같은 영주, 강한 눈빛의 성원. 그리고 만남이 어색한 두 친구 종혁, 찬휘.
2005년 10월 슈퍼 모델 같은 영주, 강한 눈빛의 성원. 그리고 만남이 어색한 두 친구 종혁, 찬휘. ⓒ 이승열
E대 영문과를 나와 과외 강사로 한참 명성을 날리던 찬휘 엄마는 모든 활동을 접고 세 아이를 돌봤다. 우리 아이는 외동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찬휘네 집의 2-1번 아들이 되어 그 집 식구들과 모든 것을 함께 했다. 어른이 되면 결혼하고 싶었던 예쁜 수진이와 성격이 맞는 종혁이 둘 사이에서 고민하던 찬휘도 결국 사나이들의 우정을 택해 동네를 주름 잡는 개구장이가 되어 갔다. 아이들의 얼굴은 햇빛에 그을려 반짝반짝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텅텅 빈 아파트 놀이터는 세 형제의 독무대가 되었다. 놀 친구가 없어 할 수 없이 학원에 다녀야 하는 안타까운 현실에서 셋은 너무 좋은 형제이자 놀이 친구가 됐다. 내가 가끔 종혁이 손을 잡고 아파트를 거닐면 날 보고 "어머, 종혁이 엄마세요? 종혁이 엄마가 이렇게 생겼구나"하며 인사를 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모든 아파트 사람들에게 종혁이는 그 집의 새로 생긴 아들쯤으로 인식됐다.

때 빼고 광 내고 양복으로 한껏 멋을 부린 형제 같았던 두 사나이. 아직도 서로 어색해 말을 하지 않는 4년 만의 만남.
때 빼고 광 내고 양복으로 한껏 멋을 부린 형제 같았던 두 사나이. 아직도 서로 어색해 말을 하지 않는 4년 만의 만남. ⓒ 이승열
초등학교 입학식 사진. 맨 앞이 종혁, 찬휘는 키가 커서 뒷줄에 있다.
초등학교 입학식 사진. 맨 앞이 종혁, 찬휘는 키가 커서 뒷줄에 있다. ⓒ 이승열
그렇게 오 년을 보냈다. 초등학교 입학 전 학교에 가서 같은 반으로 배정해 달라고 부탁한 것도 찬휘 엄마요, 소풍 때마다 빈 통을 들려 보내면 김밥을 넣어 학교에 보낸 것도 찬휘 엄마였다. 직장 회식이 있어도, 새벽에 출근할 일이 있어도, 출장 갈 일이 있어도 옆에 찬휘 엄마가 있으니까 모든 것이 해결됐다. 갈등하지 않고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학원이 아니라 놀이터에서 보내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들의 덕분이었다.

2001년 2월, 내가 그 동네를 먼저 떠나고 평생 그 동네에 살 것 같았던 찬휘네가 그 해 11월 갑자기 뉴질랜드로 이민을 가 버렸다. 여름에 잠깐 만났는데 "우리 이민 갈까 해" 그러길래 의심 반 경이로움 반으로 "진짜?" 그랬는데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떠나 버렸다. 종혁과 찬휘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그렇게 떠났던 찬휘 모자가 시월 초 조카 결혼식 때문에 서울에 왔다. 불행히도 대한민국의 모든 학생이 중간고사 모드로 들어가 모두들 숨죽이고 시험에 온 생을 걸고 있는 이때 말이다. 찬휘는 종혁이를 비롯한 어떤 친구도 만나보지 못한 채 어른들을 따라 다녔다. 나보다 훨씬 작던 아이가 나보다 15cm가 더 큰 어른이 되어 나타났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정 많던 순한 얼굴 모습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서울에 온 지 일주일 뒤인 10월 8일, 어린 시절을 온통 같이 했던 옛 친구를 만나러 찬휘 모자가 드디어 우리 집에 왔다. 형제보다 더 친하게 오 년을 찰싹 붙어 다니며 모든 것을 함께 했던 아이들인데 서로 내외하듯이 어색해 한다. 어른들에게는 찰나에 불과한 4년 세월 동안 아이들은 어린이에서 어른이 되어 어른들의 주름의 골만큼 변해 있었다.

함께 자면서도 함께 밥을 먹으면서도 서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영 어색해해 어른들을 안타깝게 했다. 찬휘야 어린 시절부터 워낙 과묵하고 정이 많은 아이였지만 종혁이는 까불이였다. 정 많은 찬휘가 조그만 종혁이를 자꾸 껴안고 만지면 아주 질색을 하며 도망을 가면서도 하루라도 못 보면 못 살던 아이였다. 찬휘네 이모네, 고모네, 찬휘 엄마 친구집, 캠프, 여행 모든 것을 함께 한 아이들인데 세월의 간극을 메우지 못하고 있었다.

찬휘를 위해 잠실야구장 플레이오프전에 가려던 종혁이의 계획은 영어학원의 협박 전화로 깨져 버렸다. 그 전날에도 학원을 빼 먹고 친구들과 야구장에 가서 목이 쉬어 왔는데, 한 번만 더 빠지면 제적 시킨다는 말에 아이가 겁을 먹었다. 찬휘도 한국의 청소년들이 얼마나 공부 때문에 시달리고 살고 있는가를 제 눈으로 확인하며 제 자신을 담금질하는 기회가 되었다.

찬휘 엄마의 월남 쌀국수, 내 솜씨의 위창남 기자표 닭튀김. 옛날처럼 난 벌려만 놓고 찬휘 엄마가 마무리했다.
찬휘 엄마의 월남 쌀국수, 내 솜씨의 위창남 기자표 닭튀김. 옛날처럼 난 벌려만 놓고 찬휘 엄마가 마무리했다. ⓒ 이승열
함께 월남 쌀국수와 닭튀김을 만들어 먹고, 올림픽 공원의 몽촌토성 위를 산책하며 찬휘와 종혁이의 옛 표정이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좋은 이웃이 있어 내 삶이 따뜻하고 풍요로울 수 있었던 지난 세월이었다. 종혁의 친구들을 불러내 함께 농구를 하는 것으로 짧은 만남을 끝나고 다시 긴 시간 동안의 이별을 했다.

'찬휘야, 몸도 마음도 건강한 어른이 되어 정말 고맙구나.'
'찬휘맘, 세상을 향해 열렸던 그대의 따뜻한 마음을 나도 주위 사람들에게 전하며 지난 은혜 평생토록 갚겠소. 정말 고마워요. 이번에 함께 못 온 찬영과 찬휘 아빠에게도 안부 전해 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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