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그림
ⓒ 강우근
강제추방을 반대하는 이주노동자들의 농성에 한동안 가담했던 어떤 네팔 청년이 농성을 끝내고 전에 근무하던 공장을 찾아갔다. 공장장은 “운동가 오셨네”라면서 그를 비웃었으나 일꾼이 필요했는지 다행히 그를 다시 받아주었다.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했다. 확인만 해보고 돌려주겠다던 여권을 공장장이 도무지 돌려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행여 도망갈까 보아 여권을 압수해 두는 일은 흔한 일 중의 하나였지만 명백히 불법행위였다. 농성을 통해 비교적 학습이 잘 된 네팔 청년은 공장장을 찾아가 여권을 돌려달라고 요구했고, 그 바람에 옥신각신하게 되었다. 네팔 청년의 대거리도 자연 곱게 나갈 수가 없었다.

“이 빨갱이 새끼!”
공장장이 소리치며 발길질을 했다. 네팔 청년은 ‘빨갱이’가 무슨 말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공장장에겐 농성과 데모에 가담하느라 한동안 일터를 벗어난 네팔 청년을 ‘빨갱이 새끼’라고 부르는 게 조금도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데모하는 자는 빨갱이다’라는 식의 학습을 젊은 날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세상이 비록 많이 달라졌지만 공장장의 머릿속에 젊은 날 받은 학습 내용은 아직도 완강히 남아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빨갱이새끼는 때려 죽여도 되는 거야.”
공장장은 소리치면서 이윽고 사무실 구석에 있던 각목을 주워들었다. 공포에 질린 네팔 청년이 공장장의 양손을 움켜잡았다. 밀고 당기는 힘싸움이 벌어졌고, 그러다가 공장장이 뒤로 넘어지면서 책상모서리에 뒤통수를 찧게 되었다. 피를 본 공장장의 눈동자가 홱 돌아갔다.

“이 빨갱이 외국놈이 사람 쥑인다. 뭣들 하냐, 외국놈 때려잡지 않고!”
공장장의 비명을 듣고 쫓아 들어온 한국인 직원들에 의해 네팔청년은 이내 피투성이가 됐다.

한 방글라데시 청년이 처음 입국했을 때 공항에서 택시를 탔다. 택시운전사는 서툰 영어로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청년이 방글라데시에서 왔다고 하니까 택시운전사는 대뜸 “이거 완전 쌩촌놈이 걸렸네”하고 중얼거리더니 속사포로 묻기 시작했다.
“어이, 촌놈, 니네 나라 택시 있냐?”
“어이, 촌놈, 니네 나라 텔레비전 있냐?”
“어이, 촌놈, 니네 나라 해 뜨냐?”

방글라데시 청년은 그래서 ‘촌놈’이란 말이 한국말로 방글라데시 사람이란 뜻인 줄 알고, 어디서 왔냐고 누가 물으면 한동안 ‘아이 엠 촌놈’이라고 대답해서 웃음거리가 되곤 했다.

위의 두 가지 삽화는 이주노동자를 주인공으로 쓴 나의 졸작 <나마스테>에 나오는 삽화인데, 내가 창작해 쓴 것이 아니라 취재 과정에서 이주노동자들한테 직접 들은 이야기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 일부의 편견을 보여 주는 삽화는 이것 외에도 얼마든지 더 열거할 수 있지만, 그 야만적 편견의 바탕에 깔려 있는 이해할 수 없는 정서는 대략 두 가지다.

첫째는 피부색이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상대편에게 모멸감을 주려 하거나 심한 경우 증오심까지 보이는 사람이 아직도 우리 주변에 많이 있다는 것은 놀랍고 끔찍한 일이다. 이를테면 얼굴색이 거무튀튀하거나 흑인이면 무조건 낮추어보려는 경향이다. 배타적 민족주의의 발로라고 해도 좋겠지만 이런 사람일수록 백인에겐 큰 거부감을 갖지 않으니 민족주의 어쩌고 하는 것조차 우습다. 극단적인 경우 얼굴이 검은 동남아인이나 흑인을 보면 “무조건 패주고 싶다”라고 말하는 사람까지 본 일이 있다.

두 번째는 자본이다. 앞의 두 번째 삽화에 등장하는 택시운전사 같은 사람에게는 세상엔 가난한 사람과 부자, 두 종류의 인간밖에 없다. 자신보다 가난한 사람은 무조건 열등하고 모자라니 무시하고 천대하는 게 당연지사다. 그는 상대편이 어느 나라 사람인가 하는 것만으로도 재빨리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를 구별해 낸다. 이런 사람일수록 자신보다 명백히 부자 나라에서 온 사람에겐 열등감 때문에 오히려 비굴한 과잉 친절을 베풀기 쉽다.

같은 민족끼리도 그렇거니와 피부색이 다른 타민족을 대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인권의 존재와 그 타당성은 별 속에 씌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경험에서 저절로 우러난 것이다. 모든 인간이 다 존귀하다고 느끼고 그렇게 대할 때, 상대편의 삶보다 더 앞서 나의 삶이 편안하고 깊어진다. 인권 존중이란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절에서 나온다. 내가 바른 대접을 받기 바란다면 나부터 먼저 예의를 지키는 것이 옳은 순서다. 수십만 이주노동자에 대해서 아직도 기본예절조차 지키지 않는 사람이 많고, 그 기반을 이루고 있는 것은 예절 없는 정부 정책 때문이라면 과장일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에 실려 있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행하는 <월간 인권>의 주요기사를 오마이뉴스에 게재하고, 우리 사회 주요 인권현안에 대한 인권위의 의견 등을 네티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꾸벅...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