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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방을 차지하고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있는 해강이와 솔강이는 내 세대와 다른가 보다. 참 편한 느낌에 쏙 빨려들어 간다.
노래방을 차지하고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있는 해강이와 솔강이는 내 세대와 다른가 보다. 참 편한 느낌에 쏙 빨려들어 간다. ⓒ 김규환

못 말리는 노래방과의 악연 15년

노래방이 서울에 한창 뜨기 시작하던 1990년대 초 복학생 친구들과 나는 노래방문화의 유해성에 대해 대학에서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이유인즉 나는 노래방이 청소년에게 유해하다고 했고 다른 사람들은 자정기능을 가지면서 차차 대중문화의 핵심으로 자리 잡을 것이라 했다.

내가 그리 노래방을 달갑지 않게 여긴 데는 화면에 나오는 그림이 거슬렸기 때문이다. 선정적인데다 삑삑거리는 기계음 그리고 가락과 가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외워 사람마다 각기 다른 음색과 창법으로 부르는데 방해가 될 뿐이라고 했다.

음정이 틀리는 게 미덕이며 술 한잔 걸치고 돼지 멱따는 소리로 부르는 것이 참맛 아니겠느냐고 했다. 기계가 대신 불러주는 노래는 창조성을 갉아먹고 나중엔 의존이 심해져 노래방 기계가 없으면 한곡도 제대로 부를 수 없는 사태가 올지도 모른다며 우려했다.

반격이 만만치 않았다. 자신들은 여자친구와 함께 다니고 가족과 다녀보니 아무렇지도 않더라고 했다. 새 문화 창조에 익숙한 그들과 꽤나 신진문화를 받아들이는데 보수적이었던 내가 벌인 격론과 우려는 단란주점으로 옮겨갔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면서 내 생각이 맞지 않았다는 걸 대중은 증명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2차로 노래방 가자는 이야기만 나오면 슬슬 꼬리를 빼고 기피하게 되었다. 마이크 잡는 체질이 아니라 주눅 든 내 모습이 싫었다. 마지못해 따라가면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술이나 축냈고 안에서 어울리지도 못하며 밖으로 들락거리는 신세가 되었다.

아이들 등쌀에 일단 노래방 앞에까지 가는 데는 성공했다. 맨 정신으로는 들어갈 수 없어 좀 마시고 갔다.
아이들 등쌀에 일단 노래방 앞에까지 가는 데는 성공했다. 맨 정신으로는 들어갈 수 없어 좀 마시고 갔다. ⓒ 김규환
참으로 딱하기 그지없었다. 이방인으로 주변인으로 자꾸 내몰리는 모습이 싫어졌다. 한 번 잡으면 1시간 넘게 마이크를 놓지 않는 선후배를 핀잔하는 1등 공신이었다. 나를 배려한답시고 메뉴판을 건네주는 사람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아는 노래는 많은데 마땅히 히트곡이나 딱히 이거다고 내세울만한 즐겨 부르는 목록 찾는데 20~30분을 헤매다가 마지못해 구닥다리 한 곡을 골라서 부르고는 얼굴이 화끈거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휘파람으로 다져진 실력에 곧잘 흥얼거리기도 하고 맨 노래를 즐겨 불렀던 내가 노래를 기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 많은 세월, 잃어버린 세월이 10년 하고도 5년이나 흘렀다.

노래방과 담쌓고 살던 모진 시련기에 맨송맨송한 상태로 노래를 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고역이었다. 무엇이든 적극적이었던 내가 이 방면에서만큼은 숙맥이었으니 사람들은 내 이중적 태도에 대해 못 마땅히 여겼던 것도 사실이다.

아이들은 성인 노래와 어린이 노래를 가리지 않고 부른다. 어린이집에서 좋은 노래나 인기곡을 금방 배워 나에게 가르쳐주기도 한다. "가까이 가면 TV 속으로 빨려들어간다"고 하면 알아듣는다.
아이들은 성인 노래와 어린이 노래를 가리지 않고 부른다. 어린이집에서 좋은 노래나 인기곡을 금방 배워 나에게 가르쳐주기도 한다. "가까이 가면 TV 속으로 빨려들어간다"고 하면 알아듣는다. ⓒ 김규환

"아빠 노래방 가자! 노래방" 자나 깨나 노래방 타령

한 달 전 나물밥 방송프로그램을 동생네 집에서 찍고 우리 가족과, 맛을 찾는데 열심인 한 명까지 총 6명이 해질 무렵 맥주 몇 잔씩 마시고 노래방엘 갔다. 무슨 배짱으로 갔느냐 하면 술김에 따라간 것뿐이다.

아이들과 애 엄마와 고모는 어린이집에서 유행하는 노래에 '어머나'와 각각 한 곡씩을 골라 재미나게 부른다. 노래방에 들어가자 나는 술이 깨고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부끄러움이 앞선다. 고르는 척하다가 미적거렸다.

아이들도 아빠에게 불러보라고 마이크를 건넨지라 엉겁결에 주워들고 미친 듯 불러댔다. '짠짜라'를 입가심으로 부르고 내친김에 이상번의 '꽃나비사랑'을 몸을 흔들면서 불렀다. 박수소리가 쏟아지니 흥분이 되었다. 아내와 동생, 같이 간 맛객 김용철씨가 의아해 했다. 잘 부르면서 왜 그리 뺐냐는 눈치였다.

마이크를 놓지 않고 "혼자 밭에 오가면서 맘껏 따라 부르다보니 조금 는 것 같다"는 해명까지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아이들은 신기했던지 나보다 더 신이 나서 실실 웃으며 "아빠는 왜 그렇게 노래를 해?"라고 다정하게 묻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그래 여기까지는 좋았다. 얼떨결에 엎질러진 물치고 사람들 기분을 좋게 했으니 그나마 다행 아닌가. 화를 자초한 건가. 아빠인 내가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자긍심까지 심어 놓은 게 잘못이었다면 잘못이다.

그 뒤 날이면 날마다 아이들이 보채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네 살 솔강이는 "아빠 노래방가자" 하고 한 살 위 해강이는 잊었던 듯 한참 놀다가도 "아빠 우리 노래방 언제 가?" 한다. 자기 전에는 둘이서 합창으로 "아빠 우리 내일 노래방 갈 거야?" 하니 궁지에 몰린 쥐 꼴이 되었다.

솔강이는 읽을 수 없으면서도 함께 하려는 자세가 기특했다.
솔강이는 읽을 수 없으면서도 함께 하려는 자세가 기특했다. ⓒ 김규환
어떻게든 구실을 마련하고 차일피일 미뤘다. 웬만한 건 적당히 둘러대면 사나흘 지나 까먹곤 하던 아이들이었다. 급기야 돈이 없어서 갈 수 없다고 하자 사람들만 보면 노래방 가자고 졸랐다. 추석 때는 정도가 극에 달했다.

끈질기게 때도 없이 "노래방 노래방" 노래를 부르며 귀찮게 했다. 시어머니 등살이 이런 건가. 차일피일 미룬다한들 시달림이 끝날 것 같지 않았다. 택일을 하기로 했다. 한가한 주말을 잡아, 아내와 아이들만 데리고 가기가 좀 거북해 동생네에 채소를 갖다 주는 길에 무거운 짐을 부리고 곱창에 술 한잔씩을 걸치고 노래방으로 갔다.

들어서자마자 '어머나' '아기염소' '아빠 힘내세요' '무궁화' '비행기' '캔디' '개똥벌레'를 부르는 아이들은 노래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몰래맥주(?)를 마시며 거들었는데 아이들이 1시간 중 40분을 허비했다.

시간을 다 채우고 일어나려는데 주인이 30분을 더 연장해줬다. 왠지 이젠 싫지 않다. 내 명곡 '꽃마차'도 부르고 다른 사람이 부를 때 거들기까지 했다. 목이 잠기도록 부르고 나자 힘이 쭉 빠졌다. 실로 오랜만에 세상 시름 잊고 흥겨운 날을 보냈다.

"휴-" 이제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뒷문 단속은 철저히 해야 하는 법. 노래가 끝나자 노래방 안에서 아이들을 각각 불러 다짐을 받았다.

"해강아, 우리 눈 오면 다시 노래방에 오자. 알았지?"
"솔강아, 우리 첫눈 오면 또 노래방에 오자."
"예."

둘 다 건성으로 대답을 하는 줄 알았다. 밖에 나와서 다시 확인을 했다.

"우리 눈 오는 날 산타할아버지 오시면 노래방에 가자."
"알았어요."

해방감이랄까. 체증이 밀려내려 간 기분이다. 어떻게 되었을까?

그 뒤로 노래방엘 갔으니 근 한 달 사이 매주 한번씩은 고정출연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젠 노래방이 무섭지가 않다.
그 뒤로 노래방엘 갔으니 근 한 달 사이 매주 한번씩은 고정출연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젠 노래방이 무섭지가 않다. ⓒ 김규환
그 뒤 열흘이 지났건만 아이들은 두 번 다시 노래방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관심사가 다른 데로 옮아갔나보다. 이번엔 퍼즐 맞추기에 흠뻑 빠져 있다. 노래방 이전에는 컴퓨터 게임과 한글타자연습을 자다가 일어나서도 하던 아이들였다. 한번 쏠리면 앞뒤 가리지 않고 덤벼 곤혹스러웠는데 그 때가 언제였더라?

아이들 덕에 노래방 기피증까지 치유가 되었으니 일거양득 소득이 꽤 쏠쏠한 2005년 가을이다. "해강아 솔강아 아빠 그저께 노래방 갔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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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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