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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쭉 냅시다"

▲ 답례 만찬 모임
ⓒ 박도
2005. 7. 24.

20:00 첫날 북측 만찬에 대한 남측의 답례 만찬 모임이 같은 인민문화궁전 연회장에서 있었다. 남측 대표단의 신세훈 문인협회 이사장의 만찬사가 낭랑하게 장내에 울려 퍼졌다.

"언어가 다른 사람들끼리는 문학 공동체를 이룰 수 없지만, 언어가 같은 사람들끼리 문학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남과 북의 우리 동포들은 일제 강점기에도 함께 같은 모국어로 문학적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이번 2005 민족문학작가대회는 모국어 문학 복원의 모임이었습니다…."

이어서 북측 현승남(아동문학) 작가동맹부위원장의 답사가 흘러나왔다.

"남북의 동포들이 강토가 갈라져 헤어져서 살아도 속일 수 없는 것은 역시 하나의 핏줄이었습니다. 서로 뜻과 정을 나누고 사랑을 주고받는 우리들은 언어도 하나, 민족의 문학도 하나, 절대로 둘이 될 수 없는 하나의 민족, 하나의 문학 바로 그것을 확인하는 만남이었습니다. 이번 우리의 만남으로 통일문학의 새 날을 앞당기며 영원한 상봉의 첫발을 내디딥시다…."

▲ 리동구 선생(왼쪽)과 필자
ⓒ 박도
8명이 한 조로 모인 20여 개 둥근 밥상에서는 첫날과는 달리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정담과 석별의 아쉬움을 나누었다. 내 옆자리에 앉은 분은 4·15 문학창착단 소속 소설가 리동구(66) 선생이었다.

선생은 김일성대학 조선어문학과에서 20여 년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창작에 전념하고자 교단을 물러났다고 하면서 굳이 내 취재 수첩에다가 '만나니 반갑습니다. 통일의 그날 다시 만납시다 2005. 7. 24.'라고 서명해 주었다. 나도 30여 년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하니까 더욱 친밀감이 느껴진다면서 다시 만날 그날이 기다려진다고 하였다. 또 다른 옆자리의 북측 김용규씨가 밥상의 술잔을 채우게 한 뒤 "쭉 냅시다"는 말로 단숨에 술잔을 비우게 하였다.

이색 만남의 사연들

건너편 모임에서는 두 사람이 매우 반갑게 만나기에 가서 사연을 들어 봤다. 일본 조선대학교 오향숙 교수와 남측 공지영 작가의 만남이었다. 사연인즉, 오향숙 선생이 연변조선족자치주 룡정에다가 '강경애 문학비'를 세울 때 공지영 작가가 많은 기부금을 보내준 데 대한 답례 인사 자리였다.

오 선생은 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침 이 날 이 장소에서야 첫 상면을 하였다고 하면서 공지영 작가에게 거듭 고마움을 말하였고, 공지영 작가는 별 것도 아닌 일에 오히려 송구스럽다면서 얼굴을 붉혔다.

▲ 일본 조선대학교 오향숙 선생(왼쪽)과 공지영 작가
ⓒ 박도
▲ 홍석중 작가(왼쪽)와 강영주 교수
ⓒ 박도
그 옆 자리에서는 홍명희 선생 손자인 작가 홍석중 선생과 상명대 강영주 교수의 반가운 만남이 이어지고 있었다. 강 교수는 대표 저서가 <벽초 홍명희 연구>라고 할 만큼 홍명희 연구의 대가인 바, 서로 글만 읽고 지내다가 이번 대회에 만나게 되어 마치 헤어진 오누이의 상봉처럼 애틋한 사연을 주고받고 있었다.

이밖에도 각 자리마다 이런저런 사연과 애틋한 만남의 이야기, 그리고 북측 공훈가수들의 노래로 밤이 깊어가는 줄 몰랐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실감케 하는 석별의 만남이었다.

▲ 돈암초등학교 동창생의 만남, 왼쪽 북측 남대현 작가 오른쪽 김훈 작가
ⓒ 박도
22:00 만찬 모임을 끝내고 연회장을 나오는 어귀에서 한 극적인 만남이 있었다. 남측의 김훈 작가와 북측의 남대현 작가의 만남이었다. 두 사람은 출신 초등학교를 확인하고는 서로 얼싸 안았다.

두 사람 모두 서울 돈암초등학교(당시 돈암국민학교) 출신인데 남대현씨는 서울에서 일본으로, 다시 북한에 귀국 정착한 작가였다. 두 사람은 학교 다닐 때 돈암초등학교 건물에 걸린 '차조심' '불조심' 등 얘기를 확인하면서 40여 전의 학창 시절로 돌아갔다.

숙소로 돌아온 뒤 잠을 이룰 수 없어서 고려호텔에서 가장 높은 42층 스카이라운지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한바퀴 돌면서 잠들고 있는 평양 시가지를 내려다보았다. 밤의 평양은 더없이 조용하고 차분하였다.

어느 아버지의 아픔

▲ 고려호텔에서 바라본 평양시가지
ⓒ 박도
2005. 7. 25.

아침에 일어난 뒤 커튼을 열어 젖히고 평양 시가지를 내려다 보았다. 어느 도시나 아침은 출근 준비로 부산하기 마련이다. 평양 거리에도 출근하는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띄었지만 세계의 다른 도시에 견주면 차분하고 적은 편이었다. 이는 아마도 북한 당국이 가능한 주민들을 직장 근처에서 살게 하는 까닭으로 교통 인구를 억제한 북한식 사회주의 정책 탓으로 보였다.

차창으로 본 평양 시가지는 고층 건물은 많았으나 경제난 탓인지 거의 단색으로 현란치 않았다. 구내식당으로 가서 아침을 먹은 뒤 다시 고려호텔 앞거리로 나가서 산책 겸 사진을 몇 장 찍은 후 돌아갈 차비를 챙겼다. 오늘 일정은 오전에는 평양시내 관람과 금강판매소에서 기념품 구입, 점심 뒤 평양 출발로 시간 여유가 많았다.

▲ 이기형 선생이 만창장에서 북측 인사의 말에 경청하고 있다
ⓒ 박도
09:00 시내 관람을 위해 로비를 지나는데 이기형 선생이 의자에 앉은 채 눈물을 짓고 있었다. 사연인즉, 바로 눈앞에 따님을 두고도 만나지 못하고 떠나는 아비의 단장이 찢어지는 아픈 사연이었다. 선생이 고령에도 여러 가지 어려운 중에도 굳이 이 대회에 참석한 것은 평양에 두고 온 혈육을 만나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선생이 평양 도착 후 관계자에게 누누이 부탁하였으나 기다려 보라고만 하여 기대하였으나 떠나는 날 아침까지 부녀 상봉을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 따님의 사는 곳이 우리가 들렀던 옥류관 랭면집 부근이었다니 그곳을 지나쳤던 이기형 선생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평양이 아닌 서울이었다면 어떠하였을까를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만일 언론이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서로 특종을 놓치지 않으려고 연일 경쟁적으로 취재하여 이미 극적으로 만났을 성 싶었다. 하지만 북녘의 언론은 이런 개인적인 사연에는 관심을 갖지 않은 듯하였다. 아마도 그들은 이번 모임이 어디까지나 '6·15 공동선언을 위한 2005 민족문학작가대회'로 공적인 행사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 같았다.

평양 도착 첫날, 내가 심기섭 안내원에게 "나는 고향이 남쪽으로 북에 이산가족도 연고자도 없는 사람이라, 막상 이곳에 오고 보니까 차라리 나 대신에 북녘이 고향인 사람이 왔으면 더 좋았을 걸 그랬다"고 했다. 그러자 그가 "박 선생, 아닙니다. 우리는 통일 사업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오는 것을 더 환영합니다"고 단호히 말했다. 그의 답변이 평양의 정서를 대변한 듯하였다.

이기형 선생은 의자에 머리를 엎드리고는 "다리에 힘이 쭉 빠져서 걸을 힘도 없고 말할 힘도 없다"면서 울먹이셨다.

합의대로 이행하라오

애초의 일정에는 모란봉 산책이 포함되었으나 생략된 채 금강판매소에서 북한상품 구입만 하였다. 나는 별로 살 것이 없어서 책 몇 권만 샀다. 꼭 사고 싶은 책이 있었지만 공항에서 압수 당하고 시끄러울 것 같아서 연길에 이어서 이번에도 꾹 참았다.

11: 40 다시 호텔로 돌아오는데 양측 실무자끼리는 고려호텔 옆 우표판매소를 들르기로 합의된 모양인데 사람들이 짐도 많고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긴 탓으로 그곳에 들르는 이가 적었다. 그러자 북측 실무자가 남측 실무자에게 고성을 질렀다.

"애초에 합의대로 이행하라오."

남측 실무자가 구차하게 변명하였으나 북측 실무자의 고성이 이내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 한 장면으로 남북 실무자들의 어려움을 보는 듯하였다. 아직도 서로의 불신의 골이 너무 깊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12: 30 평양에서 마지막 점심을 고려호텔 구내식당에서 '랭면'을 먹은 뒤 곧장 우표판매소에 들렀다. 남쪽에서 이미 우표 수집 열기가 식은 탓인지, 오전의 고성 탓인지 별로 사는 이가 없었다.

14: 30 고려호텔 직원들의 환송을 받으며 귀로에 올랐다. 이번 방북 길에 집행부에서는 약간의 선물과 저서를 10권 이내로 북측에 전달케 되어 나는 세 권만 챙겼다. 첫 장편소설 <사람은 누군가를 그리며 산다>와 항일유적답사기 <민족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와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에 보관 중인 한국전쟁 관련 사진을 엮은 사진집 <지울 수 없는 이미지>였다.

도착 날 저녁 심기섭 안내원에게 전달했더니 그는 그새 훑어본 모양이었다. 특히 한국전쟁 사진집에 대하여 귀중한 자료라면서 민간인 학살 장면에 대한 가해자의 기록이 없다고 아쉬워했다. 나는 기록자로서 사진 뒷면의 원문을 그대로 번역만 하였을 뿐이지, 함부로 예단하여 가해자를 기록치 않았다고 답하였다.

그는 그새 정이 들었는지, 박 선생은 붙잡아두고 싶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내가 "물고기 한 마리가 강물을 다 흐려 놓는다"고 답하자, 그는 강물도 강물 나름이라고 맞받았다.

사실은 돌아가신 아버님이 북녘 땅을 오고 싶어 하셨다는 말을 하였더니 그가 아버님에게 드릴 술이라도 한 병 샀느냐고 물었다. 그렇지 못하였다고 답하였더니 공항에서도 판다고 일러주었다.

곧 공항에 도착하여 백두산 들쭉술을 한 병 산 뒤 비행기표를 받아 막 비행장으로 나가려는데 서강호 버스 기사가 헐레벌떡 나를 찾았다. 그는 내가 잃었던 카메라 렌즈마개를 들고 있었다. 나는 마개를 받은 뒤 사람들이 뜸한 곳으로 가서 고맙다는 말과 굳은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안녕! 평양이여

▲ 평양의 모란봉
ⓒ 조선엽서
15:20 공항 활주로에서 러시아제 뚜-154 고려항공 여객기에 올랐다. 곧 비행기는 평양공항 활주로를 사뿐히 벗어났다.

기내에서 나는 이번 방북을 곱씹어 보았다. 지난 60년간 서로 반목질시했던 골은 아직도 엄청 깊다는 것을 느꼈다. 그 골을 메우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자주 만나는 게 가장 좋으며, 통일을 위해서는 서로가 더 많은 양보를 해야 한다고 느꼈다. 통일 뒤의 혼란을 미리 막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차분하게 그 준비를 해야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사랑' '양보' '이해' '관용' '존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 방북의 가장 큰 소득은, 북녘 내 조국 산하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땅으로, 아직도 공해에 오염되지 않아서 장차 통일 조국의 큰 자산이라는 것을 확인한 점이다. 두고 온 내 조국 산하를 굽어보고자 기내 창으로 내려다보았으나 구름과 바다밖에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묵직한 피로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눈을 감았다.

"안녕! 평양이여, 백두산이여, 묘향산이여."

▲ 백두산 차일봉
ⓒ 조선엽서

덧붙이는 글 |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인내하면서 부단한 노력으로 '2005 민족문학작가대회'를 성사 시키고 성공적으로 마치게 해 주신 민족문학작가회 염무웅 이사장, 김형수 집행위원장 외 여러 실무 집행위원님, 그리고 북측의 관계자 분에게 고맙다는 말씀드립니다. 
  
이 기사를 쓸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신 오마이뉴스, 무엇보다 열독해 주신 네티즌 여러분에게 곱배기로 감사드립니다. 뒷날 더 재미있는 기행문으로 다시 만날 것을 희망하면서 마무리 인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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