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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왕이 약수에 띄웠다는 '고란초'  여러해살이풀. 6~9월. 관상용, 약용.
백제왕이 약수에 띄웠다는 '고란초' 여러해살이풀. 6~9월. 관상용, 약용. ⓒ 강인춘
많은 화가 중에서 송훈(66세)씨 만큼 끈질긴 사람도 드물 것 같다. 한가지 주제로만 그림(들꽃)을 벌써 10년 내내 그려오고 있다. 파고 드는 그림, 세밀화. 끈질김이 없는 사람은 감히 시작도 못하는 그런 그림작업이다. 그림체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하나도 변하지 않고 있다. 그냥 그대로다.

할머니의 전설을 지닌 '할미꽃' 여러해살이풀. 4~5월. 관상용, 약용.
할머니의 전설을 지닌 '할미꽃' 여러해살이풀. 4~5월. 관상용, 약용. ⓒ 강인춘
그의 말대로 처음엔 들꽃을 찾아 보이는 대로만 그리면 되는 줄 알았다고 했다. 별 생각없이 손 재주만 믿고 수월하게 그렸다. 그렇게 한참을 그리다 어느 순간 그림을 내려다 보니 그 곳에 그려진 들꽃들은 모두 죽어 있었다.
'살아 있어 향기가 그윽히 배어나올 줄 알았는데….'

그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쥐어 뜯으며 그림들을 모두 찢어 내동댕이 쳐 버렸다. 몇 주일을 방황했다. 무작정 산 속을 헤매고 다녔다. 후미진 곳, 가파른 낭떠러지 기슭에서 이슬을 머금고 있는 들꽃들을 보면서 다시금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다시 붓을 들었다. 이제는 손이 아닌 진정한 마음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들꽃들은 너무도 작아 서서 찾으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앉았어요. 다음에는 '엎드려라!' 그래서 엎드렸지요. 그런데 그곳에 새로운 세상이 있었습니다. 깨알보다도 더 작은 들꽃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왼쪽부터 강아지풀, 고사리, 제비꽃.
왼쪽부터 강아지풀, 고사리, 제비꽃. ⓒ 강인춘
송훈씨는 그만의 독특한 세밀화기법으로 꽃송이를 정신없이 그려 나갔다. 몇 장이나 그렸을까? 이번엔 서서히 어깨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꽃 한송이를 그리는 데 꼬박 일주일, 아니 몇 주일이 걸리는 것도 있어 열중하는 사이 자신도 모르는 새 온 몸의 신경이 힘을 준 오른쪽 어깨로 몰려와 곤두선 것이다.

그럴 때마다 팔이 끊어져 나갈 듯이 아파와서 밤새 끙끙 앓는 날이 많았다고 했다.
어느 날은 너무 통증이 심해 하늘에 대고 "도와 주소서! 도와 주소서!" 통원의 기도를 했다는 걸 보면 그의 인내와 고통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어깨도 어깨려니와 식물의 줄기와 잎새에 아주 작은 미세한 잔털을 그려 낼 때에는 한동안 호흡을 멈추고서 붓을 그어야 했다. 숨도 고르게 쉬지 못하는 그런 작업과정의 연속은 결국엔 가슴을 열고 심장 수술까지 받아야만 했다. 2년전이었다. 어려운 역경들이 다투어 그의 앞을 막고 시샘했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중도에서 포기할 수 없었다. 수술 실밥을 풀자 그는 곧바로 다시 카메라를 들고 전국의 산자락, 후미진 산골짜기까지 샅샅이 뒤지며 이름없는 들꽃을 찾아 정처없이 누비기 시작했다.

남쪽 섬 바위에 붙어 사는 '풍란'. 7~10월. 관상용.
남쪽 섬 바위에 붙어 사는 '풍란'. 7~10월. 관상용. ⓒ 강인춘
그렇게해서 그려진 그의 그림에는 남다른 게 있었다. 보통의 들꽃이나 식물 그림을 보면 땅위로 솟은 줄기나 잎새 모양만 그린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식물의 근본인 뿌리까지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었다. 얽히고 설킨 뿌리는 줄기나 잎새보다도 더욱 그리기가 힘들었다.

그려오는 동안 그림의 재료도 많은 시도를 거쳤다. 처음에는 수채화로 했으나 시간이 흐르면 변하고 말아 다시 아크릴로 재작업을 했다. 아크릴은 수백년은 색깔이 변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종이도 '세목지'를 사용하다가 요즘은 100%'커튼(綿)지'로 바꾸었다.

일러스트레이터 송훈씨
일러스트레이터 송훈씨 ⓒ 강인춘
송훈씨는 10여년이 지난 지금에 까지 겨우 450여 장 밖에는 그리지 못했다. 우리나라의 들꽃은 이름없는 것까지 모두 합하면 수천 가지에 이를 것이다. 아마 모르긴 해도 이 작업은 그가 세상에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한마디로 송훈씨의 끈질긴 인내와 섬세한 필체로 그려진 식물 세밀화는 우리 나라 식물도감의 귀한 자료로써 후세대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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