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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11일 인천 자유공원에서 열린 '미군강점 60년 청산 주한미군철수 국민대회'에서 <맥아더는 살인자>를 부르고 있는 박성환씨
지난 9월 11일 인천 자유공원에서 열린 '미군강점 60년 청산 주한미군철수 국민대회'에서 <맥아더는 살인자>를 부르고 있는 박성환씨 ⓒ 박준영
9월 상반기를 뜨겁게 달구었던 노래라면 아무래도 <맥아더는 살인자>가 아닐까 싶다. 팽팽한 찬반양론속에 한 보수 음악가는 <맥아더를 사랑하자>는 노래를 발표해 음악을 통한 진보-보수 격돌을 꾀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한국전쟁의 영웅, 우리 민족의 은인으로 각인된 맥아더를 학살자, 살인자로 낙인하고 맥아더 동상을 끌어내리자고 호소한 이 노래는 분명 충격적이다. 그래서 노래가사에 대한 진위여부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요즘 들어 가수 박성환씨가 겪고 있는 고통의 정도를 생각해보면 너무하다 싶다.

9월8일 노래 발표 이후 홈페이지에는 1500여 명이 넘는 익명 네티즌들이 찾아와 입에 담을 수 없는 험상궂은 욕설을 퍼붓고 심지어 박성환씨 가족까지 위협하고 있다. 또한 하루에도 200여 건이 넘게 들어오는 문자 메시지에는 욕설과 위협이 쏟아지고 있다.

마음을 굳게 먹는다지만 사람이다 보니 마음의 상처는 어쩔 수 없다. 정신적 충격으로 낯선 사람과는 눈도 맞추기 어렵다는 박성환씨의 상처는 당분간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사실 박성환씨의 홈페이지에 가보면 사이버 테러가 얼마나 무서운 범죄인지를 똑똑히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이 노래를 부른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노래의 내용 자체가 워낙 논란거리다 보니 노래를 준비하면서 자료도 찾고 공부도 많이 했다. 저 또한 어렸을 때 배운 그대로 맥아더는 영웅이고 은인인 줄 알고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자료를 찾다 보니 그게 진실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며 노래를 부르게 된 계기를 이야기하는 박성환씨는 앞으로 요청하는 곳이 있다면 기꺼이 <맥아더는 살인자>를 부를 결심이다.

그는 이번 논란을 보면서 한가지가 아쉽다. 내용상 부족한 점이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노래를 계기로 맥아더에 대한 올바른 연구와 토론이 진행되기를 바랐으나 일방적 매도로 그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번 노래 발표가 "과거진상규명의 한 과정"이라고 보기에 학자나 전문가 집단들이 맥아더에 대한 연구를 활발히 벌일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노래를 듣고 가사가 너무 적나라하다며 걱정하는 사람도 있단다. 그러나 박성환씨는 "그 현실을 살았던 분들의 실상은 더 비참하고 적나라했을 것"이라며 이제는 우리가 깨달아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격려전화도 많이 온다며 웃는 박성환씨. "얼마 전에는 강원도 평창에 산다는 한 어르신이 해병대 출신이란 게 부끄럽다며 격려전화를 주셨다"며 "자신의 노래를 둘러싼 논쟁과 자신을 향한 사이버테러는 '맥아더문제'가 우리 사회의 마지막 전선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는 그는 지금의 고통을 꿋꿋이 이겨낼 결심을 내비쳤다.

박성환씨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세 가지를 배웠다. 하나는 50-60대 어르신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거다.

"욕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젊은 사람들인데 50-60대 어르신들은 전화를 하시면 사는 곳과 이름을 말하시고 자신의 생각을 조목조목 말씀하신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 분들이 한창 예민한 나이에 겪었을 고통과 그 분들이 왜 그런 생각을 하시는지 이해가 된다."

물론 자신이 본 전쟁의 단편만으로 생각이 굳어진 것이 안타깝기 그지없기도 하다.

또 하나는 동지의 소중함이다. 익명의 사람에게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욕설을 듣고 생명의 위협을 받는 와중에 걸려오는 격려 전화와 메일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격려의 눈길과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진하게 다가온다. 자신이 살아온 길이 옳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준 동지들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그리고 겸손함이다. "하나를 보고 열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열을 보고 하나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는 그는 어르신들과 이야기하면서도 겸손함을 많이 배웠단다. 혹시 초심을 잃고 건방지게 되지는 않았을까 되돌아보게 됐다는 박성환씨는 책임감을 가지고 더 열심히 공부할 생각이다.

사람들은 그를 반미가수라고 부른다. 오만한 자세로 이것저것 간섭하고 빼앗는 미국을 반대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박성환씨.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반미를 부르지 않았다. 대학 때 야학을 하면서 노동자, 빈민들의 삶에 다가갔던 그는 노동현장에서 볼 수 있는 가수였다. 그러던 그는 2000년 양심수를 위한 음악제에서 '종달새'라는 창작곡으로 대상을 받았다. 그 해 동료가수로부터 '김양무실천단'을 하며 전국 순회를 해보자는 말에 덜컥 승낙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다들 통일노래를 부르는데 내가 아는 노래라곤 '우리의 소원은 통일'과 '그날이 오면'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는 생각을 했죠. 통일하면 '되면 좋지' 정도의 생각만 하고 살았으니까."

그러다가 목포 공연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정성이 가득 담긴 김밥과 음료수를 한아름 안겨주는 걸 보면서 큰 감동을 받는 그는 그 때부터 6·15공동선언을 비롯해 통일에 대해, 미국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2000년 오노의 금메달강탈사건을 보면서 '퍼킹 유에스에이'를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번 일은 그에게 큰 정신적 상처를 남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박성환씨는 물러설 생각은 추호도 없다. 맥아더가 우리 민족의 영웅의 아니라 우리 민족을 죽인 학살자라는 것은 명명백백한 역사적 사실이기에 그는 앞으로도 원하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 가서 노래를 부를 생각이다.

"노래는 백사람을 울리지만 노래 가사는 한 사람의 마음을 울린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가사가 중요하다는 거다. 앞으로는 가사 하나를 써도 더 열심히 조사하고 공부해서 진실을 알리는 책임감으로 노래하는 가수가 될 것이다."

그의 결심은 확고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자주민보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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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자전국회의에서 파트로 힘을 보태고 있는 세 아이 엄마입니다. 북한산을 옆에, 도봉산을 뒤에 두고 사니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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