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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가 쓰러진 논. 농사 일 중에서 벼 묶어 세우는 일이 가장 힘들다고 합니다.
벼가 쓰러진 논. 농사 일 중에서 벼 묶어 세우는 일이 가장 힘들다고 합니다. ⓒ 김유자
벼는 쓰러진 것도 문제지만, 하필 벼 이삭이 나오는 출수기에 물에 오랫 동안 잠겨 있는 바람에 빈 쭉정이가 허다하다고 한숨이십니다. 두 분이 드실 식량이라고 해야 얼마나 되겠습니까?

모두 시집 가고 장가 가서 부모님 생각보다 제 식구 건사하느라 바쁜 우리 6남매에게 보내주시려고 짓는 농사랍니다. 이제 쌀은 그만 부치시라고 말씀드렸건만, 오늘 아침에 전화를 거시더니 또 쌀 한 짝을 부치셨다고 합니다. 저도 딸을 키우고 있지만, 제 딸이 시집가고 나면 우리 부모님만큼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우리 고향마을 역시 다른 시골마을처럼 쇠락해가는 분위기가 역력합니다. 집과 집 사이에 폐가가 몇 집 끼어 있어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봄 기다릴 일 있으랴
흙담 따라가며 무너진
적모란꽃 덤불자리

아이다운 아이로 자라지 못한
어른답지 못한 어른들의 도시로
먹이를 공급하다 지친 노인들마저
자리 비워 가는 시골 폐가

겨우내 진눈깨비 혹독한 따귀를
돌쩌귀 한 손으로 거머쥔 채
저 혼자 다 맞아낸 쪽문 혼자서
무너진 흙담 겨드랑이로 드나드는 햇살 한 조각
사시 눈 겨우 뜨고 지켜보고 있었다.

- 김향숙 시 '폐가' 전문


그래도 담장과 담장 사이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마을 고샅길은 정겹기만 합니다. 고무줄 놀이하던 골목도 있고, 땅뺏기 놀이하던 공터도 있습니다. 옛 추억에 젖어 걸어가며 바라보는 담장에선 가을이 익어가고 있습니다.

담장은 그저 돌멩이라는 무생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주인의 삶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 살아 있는 유기체가 아닌가 싶습니다.

ⓒ 김유자
마을 담장에 표정을 입히고 있는 식물 중에서 가장 흔한 것이 호박입니다. 담장 위에 떡 버티고 앉아 있는 늙은 호박이 보이지요?

마치 "담장을 지배하는 건 나다!"라고 배타적 권리를 주장하는 듯하지 않습니까?

ⓒ 김유자
이 집 담장은 조금 낮아 보이지요? 그 낮은 담장을 호박 줄기와 잎이 에워싸고 있는 풍경이 집주인의 넉넉한 인심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 김유자
이 집은 대문이 활짝 열려 있고 양쪽 담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담쟁이덩굴입니다. 앞집과는 달리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입니다.

주인 내외는 어디 일 나갔나?
사립문은 열려 있고
기울어진 울타리 위에는
호박덩굴이 마음껏 달릴 듯하더니
잠시, 멈춰 하늘을 만지고 있고
마당에는 쉬고 있는 경운기 한 대
삽 두 자루, 빈 경유통 하나
툇마루 끝에는 걸레가 하얗게 말라가고 있고

나는 좀 기다릴 요량으로 뒤뜰로 가본다
오동나무 그늘 아래
낯선 객이 왔는데도 짖지 않는
잠든 똥개 한 마리
햇살이 그 주변에서
아차, 하고 짐짓 뒤로 물러서는 것이 보이고

이 집은 저 혼자 산다
이럴 때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도 이렇게 한번쯤은 나를 비우고
누가 나를 두드리면 소리가 나도록
텅텅, 살고 싶어지는 것이다

- 안도현 시 '혼자 사는 집' 전문


ⓒ 김유자
이 집은 폐가랍니다. 담을 겸하고 있는 건물 벽이 금방이라도 무너져버릴 것 같지요?

살던 집을 이렇게 버려두고 도회로 나갔지만, 이 집 주인도 차마 자신이 살던 고향집을 아주 잊기야 했겠습니까? 자신을 버리고 간 주인을 기다리는 빈집의 기다림이 애절하게 느껴집니다.

ⓒ 김유자
길지 않은 담장을 호박덩굴이 기어가고 있습니다. 꽃은 여러 송이 피어 있건만, 막상 열매는 보이지 않습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꽃은 환멸입니다. 그런 점에선 삶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 김유자
정신 없이 호박꽃 속으로 들어간 꿀벌 한 마리
나는 짖궂게 호박꽃을 오므려 입구를 닫아 버린다
꿀의 주막이 금세 환멸의 지옥으로 뒤바뀌었는가
노란 꽃잎의 진동이 그 잉잉거림이
내 손끝을 타고 올라와 가슴을 친다

그대여, 내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나가지도 더는 들어가지도 못하는 사랑
이 지독한 마음의 잉잉거림,
난 지금 그대 황홀의 캄캄한 감옥에 닫혀 운다

- 유하 시 '사랑의 지옥' 전문


시인의 시처럼 저기 호박꽃 속에, 그 황홀하지만 캄캄한 감옥에 갇혀 울고 있는 꿀벌이 있을까요? 살짝 호박꽃 속을 들여다 봤지만 꿀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난 여름에 사랑의 아픔을 겪었던 꿀벌들은 벌써 그 감옥을 탈출해서 또 다른 감옥을 찾아 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김유자
담이 꽤나 긴 집입니다. 담을 괴고 있는 돌들의 모양도 아기자기하고 예쁩니다. 담장이 유독 낮게 보입니다. 아마도 이 집 주인은 호기심이 많은 분일 겁니다.

고샅을 넘겨다 보기 쉽게 아주 낮게 담장을 쌓은 걸 보면 말입니다.

ⓒ 김유자
담장에 걸쳐진 담쟁이 잎들에 벌써 단풍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갖가지 표정을 지으며 앉아 있는 고향의 담들이 고맙기만 합니다.

있는 듯 없는 듯 경계를 이루며 안과 밖을 아우르는 담장. 적당히 자기 속내를 드러낼 줄도 알고 적당히 감출 줄도 아는 넉넉함이 좋습니다.

만일 이 담들이 도시의 담들처럼 날카로운 유리를 박고 있다거나 철조망을 두르고 있다거나 한다면 고향마을은 더 이상 정겹게 보이지 않을 겁니다.

저는 고향의 돌담들이 도시의 높다란 담처럼 진화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저 지금 그대로 있기만을 바랄 뿐. 사진을 담으면서 새삼스럽게 고향마을의 정다움은 담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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