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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나폴리, 서귀포미항
한국의 나폴리, 서귀포미항 ⓒ 김동식
넘치면 덜고, 모자라면 채워주는 고향

이번 추석만큼은 푸짐한 오곡백과가 아니더라도 가족과 친지, 이웃들과 따뜻한 마음과 여유를 나눌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명절이 끝나고 다시 고향을 떠나더라도 '넘치면 덜고, 모자라면 채워주는' 고향의 넉넉함을 담아갈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5월 농부, 8월 신선'이라는 말이 있다. 여름에 부지런히 일하고 천고마비의 좋은 절기에 햇곡식과 햇과일을 풍성하게 거둬들이면 '신선'이 따로 없다는 뜻이다. 가을추수가 끝나면 마을마다 놀이를 즐기는 것도 신선놀이이다. 호남 남해안 일대에서 행하는 강강술래와 전국적인 소먹이 놀이·소싸움·닭싸움·거북놀이 등은 풍년농사를 축하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예로부터 한가위는 밭일을 하는 농부들의 명절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시사철 일을 해야 하는 일부 백성들에게는 농부처럼 가을을 풍요롭게 맞이하는 신선이 되지 못했다. 지금은 그 의미가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마음은 그래도 풍년이다. 그 공을 조상의 음덕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출어를 기다리는 어선들
출어를 기다리는 어선들 ⓒ 김동식
바다가 삶의 텃밭인 제주해녀와 어부들

제주도는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다. 그래서 바다밭이 삶의 터전인 해녀와 어부들이 제주에는 많다. 농부들이 흙에 씨앗을 뿌리듯 어촌사람들은 바다에 삶의 그물과 태왁을 던진다. 이들에게는 1년 열두 달 황량한 바다에 목숨을 걸고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8월 신선'은 되지 못했다. 삶의 애환이 묻어 있는 제주민요 속에도 험난한 바닷일이 생생히 그려지고 있다. 칠성판(七星板)을 타고 명정포(銘旌布)를 덮고 다니는 것에 빗대어 자신들의 처지를 노래했다. 몸서리 처질 일이다.

칠성판과 명정포

칠성판(七星板)이란 염습(殮襲:시신을 깨끗이 닦고 수의를 입히는 일 장례절차)할 때에 관의 시신 밑에 까는 널판을 말하며, 북두칠성이 인간의 길흉화복을 지배한다는 토속신앙을 반영하여 칠성판위에 뉘여서 염습을 하고 마디도 일곱마디를 묶는다. 명정포(銘旌布)는 붉은 천에 흰 글씨로 망자의 관직이나 성명 등을 쓴 조기(弔旗)로 관을 묻을 때 덮는다.
너른 바다 앞을 재어
한 길 두 길 들어가니
저승길이 오락가락
떠다니는 칠성판아
이어사는 명정포야
못할 일이 요 일이네
모진 광풍 불지 말라



그 옛날에는 만선의 깃발을 달고 무사히 포구에 배가 들어오면 흥겨운 잔치를 열었다. 해마다 어촌에서는 정월 대보름의 첫사리 때나 출어기에 무사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당제(당굿)나 용왕제, 풍어제를 올렸다. 바람과 조수의 흐름에 따라 목숨을 담보로 바닷일을 하는 어촌 사람들의 개인적인 신앙과 마을공동체의 유지라는 사회적 본능이 토착의례로 귀결된 것이다.

만선의 깃발을 꿈꾸며
만선의 깃발을 꿈꾸며 ⓒ 김동식
만선의 꿈 안고 희망을 낚는다

그 삶의 현장을 찾아가 봤다. 서귀포칠십리를 지나 서귀포항에 도착한 시간은 이른 새벽 6시. 어저께 저녁 만선의 꿈을 안고 떠났던 어선들이 돌아올 시간이다. '한국의 나폴리'라 불리우는 아름다운 항구인 서귀포항의 새벽은 억척같이 세파를 헤쳐나가는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바다 멀리에서 너울거리며 밀려오는 파도가 물양장 안으로 다가와 세차게 부딪친다. 질퍽한 삶을 자연 속에 파묻고 소박하지만 역동적으로 살아가는 바다 사람들의 꿈이 항구에 먼저 도착하는 순간이다.

수확의 결실
수확의 결실 ⓒ 김동식
서귀포항은 밤새 고기를 건져 올리던 그물을 손질하느라 어부들의 마지막 손놀림으로 새벽을 잠깨운다. 오늘 저녁이면 다시 그 그물을 들고 바다로 나가야 한다. 그물에 건져올린 고기들은 우리 삶 속으로 팔려나가는 시간은 순식간에 이루어지고 서귀포칠십리에 아침은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밝아왔다. 만경창파에 배를 띄워 삶의 희망을 낚아올린 어부들은 곧 짧지만 달콤한 휴식에 빠져든다.

우리 삶의 식탁으로 갈 어부들의 희망
우리 삶의 식탁으로 갈 어부들의 희망 ⓒ 김동식
저녁에 다시 서귀포항을 찾았다. 바닷내음이 짭짜름하다. 어둠이 내리면 대부분 일터에서 돌아오는 시간이지만 바다와 싸워야 하는 사람들은 밤부터 긴 하루가 시작된다. 출어를 준비하는 어부들의 발걸음에는 노동의 핏발이 서려 있다.

"추석에 올라가요?"
"가야지요. 식구랑 생이별한 지 석삼년인데."
"고향에 태풍 피해는 없고?"
"충청도는 괜찮다네요. 형씨는 집이 서귀포라서 좋겠소."

어부들의 대화가 해풍에 실려나갈 즈음 엔진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고기잡이배들이 꼬리를 물어 서귀포항 물양장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또 다시 만선의 꿈을 안고 바다로 향하는 어부들의 뒷모습에는 질긴 생명력이 따라 붙고 있었다. 세월을 낚고, 자연을 낚으며 인생의 희망을 찾는 어부들에게 힘찬 박수가 필요한 순간이다.

바다밭으로 떠나기 전에
바다밭으로 떠나기 전에 ⓒ 김동식
이제 조금만 있으면 한치잡이, 갈치잡이 배들로 서귀포의 밤바다를 수놓게 되리라. 밤새 은빛 비늘이 되어 서귀포칠십리를 환하게 밝히는 아름다운 밤풍경에 도시 나그네들이 넋을 놓고 있는 줄도 모르면서.

자! 이제 출항이다
자! 이제 출항이다 ⓒ 김동식
어부들에게도 한가위는 한 해의 농사를 중간 점검하고, 재무장을 준비하는 생산적인 명절이다. 비록 올해 농사(어업활동)가 끝나 수확의 보람을 자축하는 즐거운 추석이 아니지만, 그들만의 행복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오늘도 살아 있고, 내일이면 다시 가족의 희망을 낚으러 바다밭으로 나갈 수 있다는 현실이 고맙기만 하다. 풍랑을 무사히 피하고 고기를 많이 잡아 든든한 가장의 자리에서 식구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조상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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