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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겉그림
책 겉그림 ⓒ 리브로
그렇다면 문명사회와 야만사회를 나누는 기준은 무엇일까. 옷을 입고 사는 사회인데 비해 나뭇잎으로 몸의 일부를 가리고 사는 사회, 짐승을 잘 다듬고 끓여서 먹는데 비해 아무데서나 함부로 날 것으로 먹는 사회, 가까운 친족끼리는 혼인하는 법을 금지하고 있는데 비해 친족 혼을 이루고 사는 사회, 화학무기나 미사일을 사용하는데 비해 창과 칼을 전쟁무기로 사용하는 사회, 이메일이나 편지로 서신을 주고받는 사회에 비해 파피루스나 돌에 글자를 새겨서 연락을 주고받는 사회 등으로 구분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문명사회와 야만사회를 나누는 기준은 어디까지나 문명사회 쪽에 있지 야만사회 쪽에 있지는 않다. 이는 문명사회만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장하는 것이며, 세계를 주도해 가는 여론 또한 문명사회 쪽에 실려 있기 때문에 그런 가늠자를 사용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문명사회와 야만사회는 결코 나눌 수 없는 사회다. 두 사회는 존재 입지를 확고히 해나가는 동안 서로 많은 것들을 배우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문명사회와 야만사회는 서로 충돌 속에서 상호협력, 상호교역, 상호통혼을 하게 됐다. 칼과 화살로 달려드는 야만사회를 통해 문명사회는 더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지닌 폭탄과 더 빠른 총알을 개발해 냈고, 문명사회가 꿰뚫고 쳐들어오면 올수록 야만사회는 더 깊숙하고 온전한 곳을 찾아 옮겨 다닐 수 있게 됐다.

분명한 언어로 서신을 주고받는 문명사회는 단 몇 글자에 달하는 글자로 서신을 주고받는 야만사회에서 암호 같은 것을 개발하게 됐다. 그런 충돌과 약탈 속에 문명과 야만은 자연스레 통혼하게 됐다.

잭 웨터포드가 쓴 <야만과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권루시안 옮김/이론과실천/2005)라는 책도 바로 그런 관점에서 쓴 것이다. 이 책에서는 세계 역사에서 문명사회와 야만사회에는 늘 충돌과 폭력만 있었던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상호협력, 상호교역, 상호통혼이 있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더하여 문명사회란 이름을 걸고 야만사회를 개발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 자리에는 또 다른 저항과 공멸만 되풀이 된다는 것이다.

"문명의 충돌에서 일어나는 불꽃은 폭력만을 낳은 게 아니라 문화의 고갱이와 혁신에 불을 붙이기도 했다. 서로 다른 문화 간의 접촉은 세계사의 추진력 가운데 하나였다. 헤브라이인과 훗날 아랍인 같은 사막 부족들은 지중해의 여러 도시에 새로운 종교를 전해주었다. 세계는 아메리카의 부족민에게서 새로운 음식, 직물, 의약품을 얻었다. 유라시아 평원의 기마인은 유럽과 아시아의 경제망을 통일시켰고, 사하라의 낙타 유목민은 지중해와 아프리카 내륙을 연결시켰다."-23쪽

"매번 붐이 휩쓸고 갈 때마다 이 대륙의 어떤 부분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피사로가 아타우알파 황제의 몸값을 받고 잉카 제국을 약탈한 뒤, 스페인 정복자들은 은으로 눈을 돌렸다. 은이 다 떨어지자 아르헨티나에서는 소, 페루에서는 구아노, 그리고 비교적 근래에는 안데스 산맥 전역에 걸쳐 코카인이 붐을 일으켰다. 붐이 한 번씩 일어날 때마다 사람들은 전보다 더욱 황폐한 상태가 되었다."-294쪽-


그런 까닭에 문명이란 이름을 내걸고 무분별하게 개발하고 파괴하고 벗겨내면 낼수록 문명사회는 스스로 자신을 옥죄고 파괴한다. 울창한 수풀을 베어내서 산업공단이나 골프장을 만드는 것도, 높은 산을 깎아내어 도로를 닦고 철도를 놓는 것도, 땅을 만들고 관광지를 개발한다는 명목으로 바다를 막는 것도 문명사회가 자신을 스스로 파괴하는 꼴임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자연재해만 보더라도 명백해진다. 미국에 들이닥친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재앙도, 일본 열도를 매년 휘저으며 돌고 도는 태풍의 위력도, 중국에 퍼붓고 있는 큰 홍수도, 남극대륙 로스해의 남부에 떠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빙하 로스빙붕이 녹아내리는 것도, 그 모든 게 야만사회를 파먹으려드는 문명사회에 던지는 경종이 아니던가.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문명사회가 한 때 원시부족에게 뒤집어 씌웠던 약탈과 파괴 행위는 그다지 떠들썩한 일이 아님을 알게 된다. 오히려 문명사회야말로 더 포악하고 흉측한 야만을 만들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야만은 분명 문명사회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명사회 내부에 깊숙이 뿌리내려 있다. 그 문명은 자꾸자꾸 야만적인 행동을 취하도록 부추기고 있고, 그것이 문명도시 한가운데서 일어나고 있음도 생각해야 한다.

그렇기에 야만사회는 점점 더 퇴락해야 되고, 문명사회는 그만큼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는 생각은 금물이다. 야만사회는 그 사회 대로 존재하여 자연에 더 많은 이로움을 가져다주어야 하고 문명사회는 그 야만사회를 통해 배우고 본받고, 또 상호 협력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깊이 있게 성찰해야 할 것이다. 공존하는 길속에, 진정한 살 길이 있음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야만과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잭 웨더포드 지음, 권루시안(권국성) 옮김, 이론과실천(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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