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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은 여전히 번화하다. 그러나 옛날은 없다. 사진 아래 왼쪽, 아이스베리란 곳 쯤이 필하모니였다. 옛 건물은 이미 없다. 맞은편 사보이호텔 입간판만이 옛날 그대로인 듯하다.
명동은 여전히 번화하다. 그러나 옛날은 없다. 사진 아래 왼쪽, 아이스베리란 곳 쯤이 필하모니였다. 옛 건물은 이미 없다. 맞은편 사보이호텔 입간판만이 옛날 그대로인 듯하다. ⓒ 이동환
필하모니, 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리다. 헤아릴 수 없는 얘깃거리가 쌓여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얘기를, 더구나 필하모니 언저리에 국한시켜 쓸 수는 없다. 독자들이 식상할 테니까. 따라서 필하모니 얘기는 오늘로, 그 여자 얘기까지만 하련다. 이십 대가 된 이후 처음 느꼈던, 아팠던 사랑 얘기까지만.

1983년은 참 방황이 깊었던 시기다. 암울한 정치 현실과 진로문제가 가장 큰 고민이었다. 그 뜨거운 여름 땡볕 아래, KBS 앞 달궈진 아스팔트에 엉덩이를 익혀가며 '이산가족찾기'에 한 자리 꼈던 아픔. 어떻게든 고향 소식을 듣겠노라 애쓰던 늙은 아버지의 비애. 결국 '사람찾기'를 포기하고 쓸쓸히 돌아서던 아버지의 뒷모습. "여, 북청사람 있소? 있으므 말 좀 하기요"라며 쉰 목소리로 아무나 붙잡고 눈물짓던 아버지, 아!

나는 늘 외로웠다. 어린 나이에 사는 게 너무 힘들었다. 번뇌가 너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명동으로 달려갔다. 필하모니 어두운 감상실 구석, 깊은 의자에 몸을 묻고 흐느꼈다.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들으며 연주자 '파블로 카잘스'의 숨소리에도 흐느꼈고, 비탈리의 <샤콘느>를 들으며 '야사 하이페츠'가 긁어대는 애절한 바이올린 선율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필하모니는 입장하게 되면, 오른 쪽으로 차를 마시며 쉴 수 있는 휴게실, 왼쪽으로는 온 몸을 묻을 수 있게끔 의자가 놓여있는 컴컴한 감상실로 나뉘어 있었다. 가운데 신청곡을 받는 창구와 DJ실이 있었다. 입장료로 오백 원을 내면 음료권을 주었다. 아침 열시부터 밤 열시까지, 문 여는 시간 내내 한 발짝도 나오지 않고 감상실에 틀어박힌 적도 많았다. 어느 날부터 눈에 띄기 시작한 그 여자, 역시 늘 혼자였다.

83년 12월, 거리마다 크리스마스캐럴이 울려 퍼지던 때였다. 창구에 신청곡을 막 내려는데 그 여자가 가로막고 있었다. 역시 신청곡을 적고 있었다. 언뜻 보니 비탈리의 샤콘느를 신청하면서 사족을 달기를, 반드시 야사 하이페츠의 연주로 들려주세요, 라고 쓰고 있었다. 나는 대뜸 말을 붙였다.

"샤콘느를 꼭 하이페츠 연주로만 좋아하시나 봐요?"
"아…, 네."
"오르간 반주를 가장 잘 이해하는 연주라고 느껴서 저도 참 좋아하거든요?"
"저도요. 그런데 늘 혼자 오시나 봐요."


그게 시작이었다. 음악을 매개로 우리는 급속하게 가까워졌다. 나보다 세 살이 위였고 모 대학원에서 불문학 공부를 하며 조교로 근무하는 여자였다. 무엇보다 화장 안 한 맨얼굴이 좋았다. 더구나 얘기가 통했다. 관심사가 비슷했다. 가끔 ‘아폴리네르’의 시를 원어로 들려주며 내 귓불을 간질이던 숨결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늘 전율을 느꼈으니까.

우리는 왜 헤어졌을까?

방황하는 나를 언제나 지켜주던 여자였다. 미친놈처럼 여기저기 싸돌다가 돌아오면 꼭 그 자리에 있었다. 항상 웃으며 가슴을 열어주었다. 상처받고 지친 몸과 마음을 녹여주던 여자였다. 가끔 다투기도 하고 토라지기도 하고 별의별 일들이 많았지만 언제나 자기 자리를 지키는 여자였다. 나를 위한 자리만큼은 절대 치우지 않고 비워두었다. 그런데 우리가 왜 헤어졌을까?

천상병 선생이 알려주셨고, 이후 잉걸아빠가 무지 드나들던 탑골공원 뒤 음식점.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천 원이면 닭곰탕 두 그릇에 막걸리 한 병은 덤이었는데, 주인이 바뀌었단다. 지금은 옛날과 달리 공원에 오시는 노인들이 주고객이란다. 그 여자와 마지막 날 바로 이집 앞에서 다투기 시작했다.
천상병 선생이 알려주셨고, 이후 잉걸아빠가 무지 드나들던 탑골공원 뒤 음식점.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천 원이면 닭곰탕 두 그릇에 막걸리 한 병은 덤이었는데, 주인이 바뀌었단다. 지금은 옛날과 달리 공원에 오시는 노인들이 주고객이란다. 그 여자와 마지막 날 바로 이집 앞에서 다투기 시작했다. ⓒ 이동환
1986년 10월 하순. 유난히 먼지바람이 불던 어느 날 우리는 헤어지게 되었다. 한 번도 내 자존심을 긁은 적이 없었는데 그날은 달랐다. 작심한 모양이었다.

"오늘따라 왜 그래? 이 집이 왜 갑자기 싫다는 거야?"
"이 집이 싫은 게 아니고 동환씨 이기심이 싫어."
"이기심? 내가?"
"그래. 동환씬 여자 데리고 갈 데가 여기밖에 없어? 여기 말고는 나랑 밥 먹을 데가 그렇게 없어?"
"좋다고 그랬잖아."
"그건 3 년 전 얘기야. 당신이 소박하다고 느꼈으니까."
"지금은?"
"아니야!"


지금 생각해보면 그 여자 말이 맞다. 참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잉걸아빠는(지금도 아내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어쨌거나 나로서는 자존심이 ‘팍’ 구겨지고 말았다. 오직 자존심 하나 내세우며 으스대던(?) 시절이었으니까 더욱 그랬을 터. 나는 두 말도 없이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피카디리 극장 옆 먹자골목 아무데나 자리 잡고 꼬치안주와 소주를 시키면서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소주 반병을 컵에 따라 단숨에 마시고 꼬치안주를 질겅질겅 씹고 있을 때였다. 앞자리에 그 여자가 와 앉았다. 내 손에 든 소주병을 빼앗아 자기도 컵에 따라 들이키더니 나를 노려보았다.

"동환씨한테 내가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어? 내가 왜 동환씨한테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지?"
"내가 뭘? 헤어지자고 한 건 너야."
"내가 언제?"
"아까 그랬잖아. 이제는 아니라고. 그게 그 말 아니야?"
"설사 헤어진다고 해도 그래. 우리 햇수로 4년이나 만났어. 어떻게 그렇게…."


어느새 여자는 울고 있었다. 그 대목에서 마땅히 나는 여자를 달래야만 했다. 그게 남자답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 나는 외로 꽈져 있었다.

"나 벌써 스물아홉인 거 잊었어? 집에서는 시집 안 간다고 난리굿도 아니야. 선보라는 거 이 핑계 저 핑계 대는 것도 이제 힘들어."
"선보면 될 거 아냐? 그리고 내가 독신주의잔 거 모르고 만났어?"
"뭐? 나쁜…, 자식!"


몇 병이나 나눠 마셨을까. 아무튼 그게 그 여자와 마지막 술자리요, 이별장단이었다. 그 골목 들어설 때 내가 뒤도 한 번 안 돌아봤듯, 여자 역시 취해 털레털레 사라지면서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추억은 대개 아픔이다. 이 글을 쓰면서 돌이켜 생각하니 그 여자에게 많이 미안하다. 어딘가에서 지금은 한두 아이의 어머니로 살아갈 여자. 혹시 이 글을 본다면 이런 얘기를 해주고 싶다. 그날 먼지바람 속으로 총총히 사라지던 뒷모습을 보면서 혼자 웅얼거리던 말이기도 하다. 몇 마디 더하기, 이제라도 용서를 빌고 싶다.

"그날 내가 그리도 냉혹했던 것은 당신을 떠나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직업도 없는 스물여섯, 삼팔따라지 자식, 그나마 아비 잃고 방황 끝나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당신과 함께라면 그깟 독신주의,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놓아주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결혼한다면, 당신 고생이 너무 빤히 보였기 때문입니다. 사랑만 가지고 결혼하기에 저로서는 어렸고, 용기 또한 없었답니다."

덧붙이는 글 | 내가 만난 모든 여자, 그리고 지금의 아내까지, 모두 나로 인해 상처받았다. 적어도 지금 아내에게 두고두고 갚을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면, 그런 쉬운 발상 역시 너무 이기적이다. 남자라는 동물은, 아니 나는 여자 앞에서 영원히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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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커서 '얼큰샘'으로 통하는 이동환은 논술강사로, 현재 안양시 평촌 <씨알논술학당> 대표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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