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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쿠바의 노 음악가들에게 존경과 찬사를 보낼 것이다. 기자 역시 이 영화를 가장 좋아하는 영화 가운데 하나로 꼽고 있으며 지금도 종종 음반을 통해 그들의 연주를 듣는다. 당시 영화를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

"혹시 우리나라에도 그런 분들이 계시지는 않을까?"

한참 잊고 지내다가 얼마 전 한국 예술종합학교의 김춘미 교수님을 통해 여든이 넘으신 분들이 정기적으로 연주연습을 하신다는 얘길 들을 수 있었다. 수소문 끝에 만난 분들이 바로 해금 연주자 일초(一超) 김종희(87) 선생님과 가야금 연주자 동은(桐隱) 이창규(87) 선생님이시다.

▲ 함께 연주를 하고 계신 해금 연주자 일초(一超) 김종희(87) 선생님과 가야금 연주자 동은(桐隱) 이창규(87) 선생님
ⓒ 심은식
두 노악사분은 1918년 생으로 이왕직 아악부 4기로 조선 왕실의 음악 전통을 이어 공부하고 평생을 악공으로 살아오셨다. 70년 넘는 세월 동안 한 가지 일을 해왔을 때 그것에 우리는 어떤 수식어를 붙여야 할까? 그리고 그 분들이 들려주는 음악에 어떤 설명을 할 수 있을까? 그 분들을 만나 당신들의 삶과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앞으로 네 차례에 걸쳐 이 분들의 삶을 조명할 계획이다.

이 시대 마지막 예인(藝人)들을 만나다

사당동에 위치한 어느 건물. 지팡이를 짚은 노인 한 분이 천천히 계단을 오르고 계셨다. 한참이나 걸려 4층에 도착해 몇몇 사람과 인사를 나누고 들어간 곳은 '한소리 국악원'이라는 사설 국악연습실.

잠시 뒤 해금, 거문고, 가야금, 대금, 피리, 장구 등의 악기가 어우러지며 연주가 시작됐다. 조선 왕실에서 연주되던 정악 가운데 가진 회상 상령산이다. 그 유장하고 깊은 소리는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마치 위엄 있는 왕실 한곳에 앉아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 매 달 두 번씩 모이는 연주자들. 예전에 함께 연주하시던 분들은 작고하시고 이제는 젊은 세대가 그 자리를 이어가고 있다. 대금 노헌식(51)씨, 피리 양정환(51)씨, 거문고 김란경(41)씨.
ⓒ 심은식
▲ 연주 삼매경에 빠지신 김종희 선생
ⓒ 심은식
해금 연주자 일초(一超) 김종희

이번 회에는 먼저 해금 연주자인 일초 김종희(87) 선생님을 소개한다. 선생은 1918년 7월 종로에서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조선왕조 고종황제의 근위대장으로 종2품의 관직을 지니셨던 분이다. 그러나 왕조가 일제에 의해 몰락하자 가세는 기울었고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가야 할 나이의 선생은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라는 곳에서 중등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에 음악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때가 1931년으로 선생은 그곳의 4기생으로 입학해 이후 5년간 수업을 받게 된다.

"18명을 모집하는데 180명이 지원을 했어. 그런데 다행히 붙어서 그때부터 음악 공부를 했지. 거기서 다시 만난 동은(이창규 선생)과는 보통학교도 동창으로 나하고는 80년 지기인 셈이야. 허허허."

선생은 아득한 눈길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처음 2년 동안은 악보와 이론 공부를 하고 3학년 때부터 악기를 배웠어. 나는 김천흥 선생님에게서 해금을 배웠지."

▲ 김천흥 선생에게서 해금을 배우는 이왕직 아악부 4기생. 좌측 두 번째 학생이 김종희 선생
ⓒ 김교성
일제치하에서 우리 음악을 하면서 힘들지 않았냐는 질문에 선생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그렇지 않아. 그 때 일본 사람인 다나베 히사오(田邊尙雄)라는 양반이 우리 음악을 듣고는 이런 음악은 꼭 보전해야겠다고 생각해 오히려 여러 면에서 지원을 했어. 그래서 외국의 사신이 오거나 여타의 행사가 있으면 우리 음악을 연주했거든. 그게 얼마나 뿌듯하고 좋았는지 몰라."

당시 악사들은 망국의 한을 그렇게 풀어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계의 어려움은 없었는지 묻자 이왕직아악부는 일본의 궁내성 소속으로 학생들에게 한 달에 15원씩 월급을 주었다고 한다.

"당시 쌀 한 가마니에 7원 50전이었어. 그러니 그걸 받아서 생활을 했지."

그러나 정작 문제는 해방 이후였다.

* 다음 주에 일초 김종희 선생 두번째 이야기로 계속됩니다.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란 어떤 곳인가?

▲ 1920년대에 촬영된 이왕직아악부 1기 생들의 연주모습. 당시 학생들은 나이가 어린 사람부터 20대의 청년까지 다양했다.
ⓒ국립국악원

이왕직아악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왕직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일제는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제 합병하고, 조선을 지배하기 위한 기구로 이왕직(李王職)과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였다. 이왕직(李王職)은 기존의 대한제국 황실업무를 전담하던 궁내부를 계승한 것으로, 이 기구는 조선총독부가 아닌 일본의 궁내성에 소속되었다.

당시 왕조의 몰락은 그들을 위해 존재하였던 음악문화의 쇠퇴를 가져오게 된다. 광무 원년(1897년, 고종 34년)에는 모두 772인의 음악인이 있었으나 1915년 궁중음악인의 수는 겨우 57명에 불과하였다. 궁중음악의 전통이 이처럼 심각한 단절위기를 맞고 있을 즈음 다행히도 1919년 왕실의 업무를 전담해 오던 이왕직(李王職)에서 아악생을 양성하기 위한 제도가 마련되었다.

세습에 의해 음악인을 양성했던 전 시대의 방법에서 탈피해 음악인이 되고자 하는 이들을 공모하여 아악대원을 모집하고 이들을 교습시켜 음악인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방법이 모색된 것이다. 1920년에 첫 입학생을 모집한 이후 이왕직 아악대원 양성소에서는 1945년까지 지속적으로 양성소원을 배출함으로써 궁중음악의 전통을 오늘에 잇는 주요한 사명을 다하였다.

양성소는 지금의 서울 명동 구 내무부 청사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대지가 1만 여 평이요, 건물이 수백 간이나 되었던 장악원은 임진왜란 이후에 건립되어 천여명의 장악원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정도였으나 1904년 노일(露日)전쟁 때에 일본군의 주둔지로 빼앗기고 지금의 서울 종로구 당주동 128번지에 있던 봉상시(奉常寺) 일부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연주실조차 버젓한 것이 없는 궁색한 형편을 면치 못했다.

이처럼 아악대의 상황이 어려웠던 무렵인 1920년, 아악부에는 당시 일본 음악계의 권위를 자랑하던 음향학자 다나베 히사오(田邊尙雄)가 조선음악을 조사하기 위해 방문을 하였다. 그의 조사 목적은 아악대의 존폐 여부를 가늠하기 위한 것으로 식민지 정부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다나베 히사오는 이 조사에서 궁중음악 전통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아악대 존속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아울러 이를 위한 연주단의 처우개선, 청사 이전 등을 강조함으로써 궁중음악 전승의 새로운 국면을 개척하는 데 일익을 하였다.

그 결과 1922년 관제의 개정으로 악원의 처우가 개선되는 1925년에는 종로구 운니동에 새로운 건물이 완공되어 새로운 터전을 잡게 되었고 명칭도 아악대에서 승격된 아악부로 개칭되었다.

왕조의 몰락과 국권 상실로 인하여 겪은 이러한 궁중음악의 전승은 제도적인 면에서 큰 변화를 겪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음악의 수용층 변화라는 획기적인 전환이 이루어졌다. 즉 과거에는 오직 왕실을 위해 연주하였던 음악들이 일반인을 위해 공개된 장소에서 연주되고 심지어는 방송을 통해서도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국립국악원 참고자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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