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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를 사랑했다' 가 들어있는 스페셜앨범(2003/12/06).
'한 여자를 사랑했다' 가 들어있는 스페셜앨범(2003/12/06). ⓒ 예당엔터테인먼트
첫 인상은 뭐랄까, 정말 열심히 노래한다는 점 말고 특이하지 않았다. 소위 '대박'을 터뜨릴 만한 가수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손님과의 대화에서 늘 소곤거렸고 지나치게 목소리를 '깐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대는 모르시더이다'가 수록된 옴니버스 앨범을 발표하면서 조금 유명해졌지만 열성 여성팬들 말고 남자들은 별로 안 좋아할 거라는 인상이 잉걸아빠에게는 짙었다.

다른 가수들과 달리 최성수는 웬만해서 손님들과 합석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수많은 손님과 팬 가운데 잉걸아빠를 기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물론 기대하지도 않지만. 다만, '남남'을 발표하고 인기몰이를 시작할 때까지, 나는 그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혼신을 다해 노래했는지 알고 있다. 잉걸아빠 기호에 맞든 안 맞든 그는 최고가 될 자질을 신인 시절부터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

그의 노래는 지금까지도 잉걸아빠에게는 여전히 느끼하기만 하다. 그러나 잉걸아빠가 몰랐던 것 한 가지. 허파 속 마지막 한 방울, 끈끈한 공기까지 담아 노래하던 그의 열정이다. 정말 대단하다. 그 당시 잉걸아빠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됐던 수많은 가수 가운데 오직 최성수만 성공했다. 그에게는 분명 잉걸아빠가 눈치 채지 못한 무엇인가 있었다.

천상병 시인의 마음 속 고향, 에스콰이어 골목

천상병 선생. 그를 먼저 알아본 것은 나였다. 일명 '에스콰이어 골목'에서였다. 명동성당을 왼쪽으로 보며 내려오다가 또 왼쪽에서 만나게 되는 에스콰이어 골목이 당시에는 이른바 명동에서도 '문화 1번지'였다. 50년대와 60년대, 그 암울한 시기를 거치면서 예술 좀 하네, 하는 이들은 전부 명동으로 모여들었고 그 중심이 바로 에스콰이어골목이었다. 70년대부터 급격하게 그 면면들이 사라지고 말았지만 그 풍취는 여전히 80년대까지 남아 있었다.

1983년 가을 어느 날. 천상병 선생은 쉘부르 앞에서 제자리 종종걸음이었다. 천상병 선생님이 아니시냐고, 이렇게 뵐 줄 몰랐다고, 팬이라고, 사인 좀 부탁한다고, 잉걸아빠 한참 너스레를 떠는 통에 선생도 처음에는 뜨악했을 터. 놀란 고라니 눈으로 경계하며 한참 내 눈을 뚫던 선생이 대뜸 입을 열었다.

"천 원 있나?"
"네?"
"천 원 있냐구?"
"……."
"없음 말구."


두 말도 필요 없이 선생은 뒤돌아 삐딱한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야 시인 신경림 선생이 말씀하시던 천상병 선생에 대한 일화를 떠올렸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화들짝 놀란 나는 잽싸게 뛰어가 선생의 오지랖을 감히 치며 말씀 올렸다.

"천 원이 아니라 막걸리 스무 병도 대접할 돈 있어요."
"그럼 따라와!"


언덕바지 명동성당을 지나 종로서적을 저만치, 허리우드극장이 보일락 말락, 내가 따라오는지 안 오는지 괘념도 없이, 탑골공원 뒷골목으로 잰걸음을 내닫는 선생 뒤를 따르며 나는 한참 고민했다. '혹시 이거 오늘 잘 못 걸린 거 아냐?'하는 생각이 정수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되똥거리며 선생이 무슨 허름한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메케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 냄새는 언저리에서 짐꾼으로 생계를 잇는 분들 땀냄새였다.

"보소, 아지매! 여기 닭곰탕 두 그릇하고 막걸리 한 병 주소."

달랑 천 원짜리 한 장에 건더기 푸짐하고 국물 또한 장난 아닌 닭곰탕이 두 그릇에다가 막걸리 한 병까지 그야말로 놀랄 '노'자였다. 당시 자장면 한 그릇 값이 천 원을 넘어서고 있을 때였으니까 얼마나 싼 집인지는 물어봤댔자 주둥이만 아프다. 선생은 막걸리 두 사발을 연거푸 들이킬 때까지 아무 말씀 없으셨다.

연전에 한 번 그 집을 또 가봤는데 닭곰탕 한 그릇에 천오백 원이었다. 지금은 또 변했겠지만 아마 오천 원 이상 아니면 머슴밥조차 얻어먹지 못할 서울바닥에서 여전히 싼 가격을 받고 있으리라. 아직까지도 허리우드상가를 거점으로 리어카 끌며 지게 지고 땀 흘리는 언저리 어르신들을 위해서.

"니 이름 뭔데?"
"이동환이라고 합니다."
"모 하는데?"
"아직 학생입니다."
"공부 좀 하게 생겼네."


들은 말과는 달리 선생은 달변이었다. 적어도 내 느낌은 그랬다.

"듣기로 선생님, 이제 명동에는 잘 안 나오신다고 하던데요."
"어데? 가끔 나가지. 옛날 생각나면."
"오늘은 어쩐 일로…."
"어 그게, 시 쓰는 ○○ 알제? 만나기로 했는데 바람 맞았지."
"약속 하셨는데요?"
"약속? 내가 만나자고 하면 약속 아니야?"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소중한 시간이었다. 해거름에 주거니 받거니 시작한 막걸리 사발마다 찬바람 서린 달밤이 옹글게 깊어갔다. 계산하려고 하는데 선생이 손사래를 쳤다.

"해본 말 가지고, 아지매! 여그 얼마요?"
"제가 사드리기로…."
"나중에! 문디 콧구멍에 마늘을 빼먹지, 학생 주머니 털어서 뭐 하게?"


그게 천상병 선생과 첫 만남이었다. 자주 뵙지 못했지만 선생의 기이한 풍모와 말본새, 그리고 시는 내 가슴 속 깊이 새겨졌다. '초연'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신 위대한 스승이었다. 찻집 '귀천'에 가면 가끔 아무 데나 누워 졸던 선생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 왔나?"하며 신발을 찾으며 입이 귀까지 걸리던 선생의 천진난만한 모습. 잉걸아빠 같은 반거들충이는 흉내도 못 낼 고귀한 '이상'을 추구하던 구도자였던 것이다.

막걸리나 맥주 한 병만 대접해 드리면 만사 '오케이'던 선생. 1993년 4월, 기어이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그 전 해 10월이던가, 마지막 통화에서 "니 이제 고마 장가가라. 만날 바둑이다 술이다, 그래 갖고 사람 구실 하겠나?"하시던 말씀이 귀에 쟁쟁하다. 어쨌거나 다음해 가을 나는 장가들었다. 선생과 내가 만난 십 년 세월에 획을 긋고, 임은 하늘로 가시고 나는 땅에 뿌리를 내린 셈이다. 마지막 가시는 길까지 여럿 놀라게 하셨지, 기인 아니랄까봐.

조의금으로 들어온 800여만 원 되는 돈이 걱정스러웠던 선생의 팔순 장모님이 그만 아궁이에 숨겨놓으셨던 모양인데 그것도 모른 채 선생의 아내 목순옥 여사는 남편 떠나는 길이 추울까봐 불을 때버렸다. 홀라당 타고 재만 남았는데 그 사정을 들은 은행에서 그나마 형태가 있는 것들을 새 돈으로 바꿔주었다. 그때 누군가 이런 말씀을 하셨더랬지.

"타버린 돈, 상병이 하늘나라 막걸리 값이라고 생각하자. 이제 맘 놓고 마시게!"


덧붙이는 글 | 사보이호텔 앞에 있던 고전음악감상실 '필하모니' 얘기는 아무래도 다음번에 해야겠습니다. 엊그제 경기지역시민기자 간담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처럼 서울 나들이 하면서 명동에 잠깐 들렀습니다. 너무 많이 변했더군요. 사보이호텔만 여전하더군요. 옛날 냄새도 조금 풍기면서. 필하모니 얘기는 참 많이 아픈데…. 그래도 하렵니다. 어차피 '추억 사이 기억 하나'라는 부제를 단 이상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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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커서 '얼큰샘'으로 통하는 이동환은 논술강사로, 현재 안양시 평촌 <씨알논술학당> 대표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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