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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왜 면허를 따래요.
그러게, 왜 면허를 따래요. ⓒ 정수권
“뭐요? 지게차?”
“응. 지게차 면허를 따요.”
“…….”

아내가 어이없다는 듯 나를 한참 노려보다가 방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무척이나 속상했나 보다. 지금으로부터 6년 전 가을 어느 날이었다. 아내는 마흔 가까이 될 때까지 자신의 손으로 한 번도 돈을 벌어보지 못했다.

아내는 일찍 내게 시집을 오는 바람에 직장생활을 해보지 못해 막연하게나마 사회생활에 대한 동경과 약간의 소외의식을 가졌다. '언젠가는 뭐라도 해야지'라고 생각은 하지만 집안 살림과 아이들 뒷바라지가 우선이었다.

어느덧 아이들이 자라서 학교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고 남편도 귀가시간이 늦어져 혼자 텅 빈 집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면, 무슨 일이라도 해서 일하는 보람도 느끼고 아이들 학비와 늘어나는 학원비를 보태고 싶으나 그러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 같아 조바심이 났을 것이다. 그래서 내게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물어왔는데 내가 대뜸 지게차 면허를 따라고 했으니 자존심에 꽤 상처를 받았다.

나는 오랜 세월 바둑을 뒀다. 회사에서 퇴근하여 훤한 낮에 집으로 일찍 가기 뭣해서 기원을 들락거렸다. 비록 잘 두지는 못하지만 그냥 두어도 재미난 바둑을, 거기다가 내기까지 했으니 오죽 했겠는가.

결혼한 후로 아내와 많이 다투었지만 다른 기억은 별로 없고 오직 왜 늦게 오느냐는 문제로 티격태격했다. 그 다툼이 싫어서 ‘알았다. 내일부터 일찍 올게’하고는 한 이틀 정도 일찍 귀가를 한다. 그럴 때도 집에서 인터넷 바둑을 두거나 바둑 TV를 시청했다. 그러나 한 3일 정도 지나면 벌써 좀이 쑤신다. 오늘은 기원에 절대 가지 말아야지 하며 큰마음을 먹고 퇴근을 하지만 발길은 벌써 기원을 향하고 있다.

늘 함께 두던 그 사람들이 나를 기다릴 것 같아 잠깐 들러 얼굴이나 한 번 보고 가자고 들른 기원이, 여기까지 온 김에 한판만 두고 가자다가 그러다 지기라도 하면, 이길 때까지, 이기면 한판만 더…. 이렇게 두다보면 어느덧 밤 열두 시 땡이다. 그 제서야 아내 얼굴이 어른거린다.

좁은 기원 안은 언제나 담배연기로 자욱했다. 나의 건강을 걱정하는 아내는 기원에 제발 가지 말라며 나를 어르기도 하고 달래도 보다가 스스로 지쳐 아예 포기했다. 더 이상 잔소리는 들리지 않고, 밤늦게 돌아와 보면 부엌 식탁엔 빈 맥주병이 자주 보였다. 나의 귀가가 늦어질수록 아내의 주량도 늘어갔다. 그러면서 스스로 뭔가 일을 해서 자신의 시간을 가지려 했다.

3일만에 벌떡 일어난 아내
3일만에 벌떡 일어난 아내 ⓒ 정수권
3일간을 말도 없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던 아내가 벌떡 일어났다. 그 모습이 자못 비장하기까지 했다. 당장 지게차 면허 원서를 내겠다며 외출 준비를 했다. 혼자 가겠다는 걸 억지로 달래 내가 동행했다.

한국인력 관리공단을 물어물어 찾아갔으나 지게차 운전면허는 일반자동차 운전면허와는 달리 먼저 국가기술자격증을 취득한 후 실기시험을 치르도록 되어 있었다. 게다가 지금이야 매일매일 원서를 접수를 받고 있지만 당시엔 자격증 취득시험을 1년에 두 번만 치르도록 정해 놓았다. 우리가 찾아갔을 때는 그 시기가 벌써 한 달 이상 지나 있었다. 몇 달을 기다려야 한다는 담당자의 말을 듣고 아쉽지만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대형면허를 따지?”

집으로 돌아온 내가 며칠 후 다시 염장을 질렀다. 이번에도 아내가 ‘오냐, 따오마! 그래서 앞으로 내가 직접 돈을 벌어 올게’하는 듯 어금니를 꽉 깨물더니만 당장 114로 대형운전면허시험장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부산 시내에는 대형면허교습소가 없단다. 부산을 벗어난 경남 진영에 있다고 했다.

이튿날 아침, 아내는 지게차 면허를 알아보러 갈 때보다 더욱 비장한 각오로 휑하니 차를 몰고 가버렸다. 나는 회사에 출근하여 업무를 보고 있었으나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라 달리 알아볼 수도 없었다. 그날은 일찍 퇴근을 하였다. 아내가 돌아와 있었다. 기분이 꽤 풀린 듯했다. 시험장에서 운전은 할 만했으며 여자는 자기 혼자뿐이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한 번씩 쳐다보더라고 모처럼 웃었다.

며칠 후 일요일 아침, 운전 연습을 하러가는 아내를 따라 갔다. 고속도로 서부산 톨게이트를 지나 한 시간 정도 달려 시험장에 도착했다. 많은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으나 역시 여자는 아내뿐이었다. 출발선에 선 대형버스 운전석에서 손으로 브이자를 그리는 아내가 대견스러웠다. 나도 얼른 버스에 올라 옆에서 아내의 운전솜씨를 지켜봤다. 제법 능숙한 솜씨로 커다란 버스를 잘도 몰고 다녔다.

연습이 끝나고 옆을 보니 특수면허장도 같이 있었다. 컨테이너를 싣고 다니는 트레일러였다. 시험장 사무실에 알아보니 삼십 몇 만 원만 더 주면 할 수 있다고 했다. 내가 당장 그것까지 신청하라고 했더니 아내는 경비가 너무 많이 든다고 그 면허는 다음에 따기로 했다. 그리고 기어이 한 마디 했다.

“이제 보니 당신 큰일 낼 사람이네.”

아내는 보기보다 몸이 약하다. 그래서 그런지 참 많이 다쳤다. 목, 허리, 손목, 발목 등, 관절 부근은 안 다친 곳이 별로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도 왼쪽 손목을 치료 중에 계단에서 넘어져 오른쪽 발목까지 다쳐 또 다시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아내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이 다친 데 대해 의아해 하고 그리고 대형운전면허증을 소지한 것에 놀란다. 다행히 아내는 그 일로 인해 많이 밝아지고 자신감이 생겼다. 요즘은 나도, 매일 두던 바둑을 한 달에 두 번의 정기 모임에만 참석하고 기원도 가끔씩 들르지만 대부분 집에 일찍 들어온다.

내가 그 당시 아내의 등을 떠밀어 그 면허를 취득하게 한 것은, 언젠가는 필요할 때도 있겠지만 그것을 당장 활용하지 않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자신감을 심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내에게도 그 면허증은, 뭐든지 할 수 있도록 자신을 지켜주는 일종의 부적과도 같을 것이다.

<오마이뉴스> 독자 여러분, 아내가 우울해 하나요? 지금 당장 지게차 운전자격시험을 신청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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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내 주변의 사는 이야기를 따스함과 냉철한 판단으로 기자 윤리 강령을 준수하면서 열심히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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