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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6일, 안산시 문화예술의 전당에서 졸업식이 있던 날, 학위를 수여받은 후, 저는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를 교가(校歌)를 불렀습니다.

"온 세상 우러르는 무한 공간에…."

그러나 한 번도 불러 본 적이 없기에 반주에 맞춰 어설프게 따라 부를 수밖에 없었던 교가를, 결국 중도에 멈춰야 했습니다. 한 순간 목이 메이더니 왈칵 눈물이 쏟질 것만 같아 도저히 따라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 전은경, 박규채 교수님과 함께
ⓒ 고봉주
지난 4년간의 힘들고 고단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면서 저도 모르게 설움이 북받쳐 올랐던 것입니다. 생활비 대기에도 빠듯한 봉급생활자이자, 쌍둥이 딸을 대학에 보내는 가장이었던 제가 아내와 상의도 없이 덜컥 사이버 대학의 문을 두드렸던 것은 지난 2002년이었습니다.

출석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인터넷을 통한 원격강의와 아무 때나 들을 수 있어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편리함 때문에 이 기회에 그렇게 하고 싶었던 대학공부를 해보자고 크게 마음을 먹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면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단장의 설움도 한 몫 했습니다.

"대학도 못 나온 주제에…."

대학이야기가 나올 때면 그저 먼 산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기에 쓰디 쓴 소주잔을 기울이며 비참해지는 마음을 달래야 할 때가 많았습니다. 때론 옳은 생각임에도 대학을 나오지 못했다는 눈치를 받으며 접어야 했던 안타까운 시간들도 있었기에, 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사이버 대학은 좀처럼 저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이버 대학의 공부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공부시간이야 밤잠을 아끼면 되었지만 한 집에 셋이나 되는 대학생을 감당해내야 하는 아내의 고통은 생지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제가 받는 쥐꼬리 만한 봉급과 아내의 월급을 모두 합해봐야 두 딸의 대학공부와 막내의 고등학교 학비로도 부족하여 학자금 융자를 받아야 할 정도였는데, 뜬금없이 대학생이 또 하나 늘었으니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늦깎이 공부를 하겠다고 나선 남편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는 듯 아내는 차마 그 처절한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몇 번을 중도에 포기하려고도 했습니다. 친구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그나마 몇 푼 안 되는 봉급이 압류를 당했을 때는 정말이지 사는 것까지도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용기를 심어주시던 한 분의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만큼은 대학 교수님과 중·고등학교 선생님이 다를 줄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스승은 어디에서나 똑같은 스승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학비를 내지 못해 자퇴를 생각하고 있을 때면 언제나 따뜻한 말로 격려를 해주시며 어려움을 함께 고민해 주시던 교수님이 계셨기에 오늘 이 빛나는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 희생만 해왔던 아내에게 사각모를 씌워주고 찰칵.
ⓒ 고봉주
스승의 은혜는 하늘과 같다고 했던가요? 언젠가는 하필 시험기간에 장모님상을 당해 시험을 놓치고 잘됐다 싶어 이 기회에 포기를 하자고 마음을 먹었으나 또 다시 교수님은 저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저는 전후 사정을 장문의 글로 써서 마음의 회초리와 함께 교수님들께 보내 드렸습니다. 그런 후 어떤 과목에선 기어이 F학점을 받기도 했으나 가혹한(?) 리포트 작성으로 겨우 낙제를 면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한 고비 한 고비 넘기기를 여덟 차례, 마지막 졸업논문을 작성하던 때였습니다. 솔직히 한 번도 써 본 적 없고 쓸 자신도 없었기에 사이버 대학이라 대충 넘어가도 되려니 하는 단순한 생각으로 주위에 부탁을 해서 베끼고 짜깁기를 해서 논문이랍시고 제출을 하였으나, 보기 좋게 불합격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어떻게든 졸업을 시키려 작정하셨던지 그때부터 교수님의 전화 논문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불합격 통보를 받고 논문을 짜깁기했다는 죄스러운 마음에 차라리 졸업을 포기하려 했던 저는 교수님의 정성에 감복되어 다시 머리를 싸매야 했습니다.

대학생인 두 딸의 도움을 받아가며 여러 날 밤을 새워 컴퓨터와 씨름을 하고서야 겨우 초라한 논문 한 편을 작성할 수가 있었습니다. 교수님으로부터 논문이 합격했다는 전화를 받고선 어찌나 행복했던지! 교가를 부르던 중 이 모든 일들이 한 순간 떠오르며 저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들어 허공을 주시하다가 학교 마크가 선명하게 걸려있는 단상을 바라보았습니다. 단상 위 교수님들 사이에 다소곳이 앉아 계시는 전은경 교수님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힘들어 할 때에는 어김없이 전화를 해서 "어려우시지요. 조금만 더 힘내세요"라며 격려를 해 주시던 교수님, 마지막 논문심사를 하시면서도 행여 논문을 제출하지 못해 졸업을 못하게 될까봐 노심초사하시다가 불합격 후에는 그 오랜 시간을 핸드폰으로 논문작성에 대해 지도를 해주시던 교수님.

그 하해와 같은 은혜를 어찌 다 갚아야 할지…. 교가를 차마 다 부르지 못하고 저는 마음속으로 스승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교수님, 고맙습니다. 사람들이 붐비지 않았다면 엎드려 큰 절을 올리고 싶었습니다. 교수님의 따뜻한 정성이 아니었다면 오늘 이 빛나는 졸업장을 가슴에 안을 수가 있었을까?

식장 밖으로 나와 그동안 너무 고생했던 아내에게 가운을 입혀 주었습니다. 어색해하는 아내에게 사각모를 씌우고 나란히 서서 사진도 찍었습니다. 아빠의 학사모를 서로 써보겠다며 수선을 피우는 딸들과는 달리 늦깎이로 학업전선에 뛰어들어 가족들의 희생을 딛고 받아 든 졸업장을 품에 안고서 마냥 대견스러워하는 아내의 얼굴이 너무 행복해 보였습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했다던가요? 40세가 넘은 나이에 시작했던 대학 공부, 가족들의 눈물겨운 희생과 교수님의 따뜻한 사랑이 만들어낸 이 빛나는 졸업장을 이 세상 그 무엇과 비교 할 수 있겠습니까?

생업으로 돌아온 오늘, 저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동료들의 축하를 받으며 차마 못다 불렀던 교가를 힘차게 불렀습니다.

"아-아 나아가자 세계를 향해 아-아 영원하리 우리의 한성"

오늘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뒤늦게나마 안산을 향해 엎드려 교수님들께 큰 절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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