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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대마도 남쪽에 위치한 이끼섬 아시베만 항구. 45년 10월 11일 해방 소식을 듣고 귀향길에 나선 조선인 168명이 태풍으로 인한 전복사고로 사망한 지점이다.
일본 대마도 남쪽에 위치한 이끼섬 아시베만 항구. 45년 10월 11일 해방 소식을 듣고 귀향길에 나선 조선인 168명이 태풍으로 인한 전복사고로 사망한 지점이다. ⓒ 이국언
"사체 검시에 참여했던 간호사에 따르면 당시 시신 중에는 아이를 꼭 안고 있는 어머니 시신이 발견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고국으로 돌아가려다 참변을 겪고 죽어간 사람들의 원혼이나마 제대로 유족한테 돌아갈 수 있도록, 꼭 생존자를 찾아주십시오."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일본 '강제동원 진상규명 네트워크(이하 진상규명 네트워크)'가 60년 전 해방의 기쁨을 안고 고국으로 귀한하다 태풍으로 난파 당한 '아시베만 조난선' 생존자를 찾고 있다.

진상규명 네트워크에서 활동 중인 하나후사 도시오(61·花房俊雄)씨 등 일행 4명은 지난 23일 광주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 사무실에서 일명 '아시베만 조난선 사건'에 대한 설명회를 갖고, 관련 생존자를 찾아줄 것을 호소했다.

이끼섬에 피항했다 태풍에 전복... "당시 33명 생존"

아시베만 조난선 사건은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11일 강제 징용 등의 이유로 일본에 남겨진 조선인들이 광복의 기쁨을 안고 귀향길에 올랐다가 대마도 남쪽 나가사키현 이끼섬 아시베만 인근에서 태풍을 만나 168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1951년 해상보안청 자료에 의하면, 당시 사망자는 168명, 생존자는 33명으로 보고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해안가에서 수습한 확인된 사체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어서, 일부 항구 밖으로 떠밀려 갔거나 사고 현장에서 임의로 화장시킨 시신의 경우까지 합하면 사망자는 훨씬 많았을 것이라는 것이 진상규명 네트워크 측의 설명이다.

하나후사 도시오 사무국장이 당시 조선인 희생자들이 매장된 이끼섬 해안과 위령비 사진을 설명하고 있다.
하나후사 도시오 사무국장이 당시 조선인 희생자들이 매장된 이끼섬 해안과 위령비 사진을 설명하고 있다. ⓒ 이국언
당시 새벽에 태풍이 항구를 덮쳤는데, 아침에 보니 온 해안이 시체로 까맣게 덮혀 있었다는 현지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당시 사고의 처참함을 알 수 있다. 아이를 안고 죽은 어머니 사체도 발견돼 주위를 더욱 안타깝게 했다.

당시 사고 선박의 승선자들이 몇 명이었으며, 누구였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당시 일본 내 조선인이나 한국 내 일본인의 귀향 수송 문제는 적십자회에서 관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해방 후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조선인이 한꺼번에 밀려들면서, 제때 귀국하지 못한 조선인들은 배를 빌리는 등의 비공식적 루트를 이용해 귀국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 진상규명 네트워크 측의 설명이다.

사고 직후 사체는 해안가에 임의로 매장하고, 생존자 중 일부는 친인척과 가족의 사체를 당시 사고 현장에서 화장해 한국으로 가져 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 후 해안가 매장지의 일부 토사가 유실되자, 1976년 히로시마 시민단체인 '미쓰비시 한국인 징용공 원폭피폭자 침몰 유가족을 지원하는 모임' 주도로 발굴 조사에 나서기도 했다. 일부 유실된 유골을 제외하고 이때 수습된 86구의 유골은 현재 사이따마현 '곤조인'이라는 절에 안치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남, 전북, 경남도 판자 표식 세워둬"

일본 내 '전후책임을 묻는 관부재판 지원단 사무국장'을 맡고 있기도 한 하나후사 도시오씨는 "출신지나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사체를 매장하면서 각각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라는 판자로 된 표식을 세워 뒀다는 현지인의 증언이 있는 것으로 미뤄, 이 지역 출신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고 말했다.

아울러 "어떤 상황에 의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희생을 당하게 됐는지 사실조사가 필요하다"며 "생존자가 남아 있다면 당시 상황을 꼭 전해 달라"고 호소했다.

한편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는 지난 3월 일본 내 진상규명 네트워크로부터 아시베만 조난선 사건을 접수하고, 지난 8월 사실 조사를 위해 현지를 다녀온 바 있다.

"자경단에서 상륙 거부해 피해 키워"
아시베만 조난선 난파 경위, 의견 엇갈려

해방으로 부푼 꿈을 안고 귀향길에 올랐던 조선인들 200여 명이 한꺼번에 수장된 아시베만 조난선 사건. 현재까지 난파 경위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히로시마에 있는 시민단체 '미쓰비시 한국인 징용공 원폭피폭자 침몰 유가족을 지원하는 모임'이 1976년 현지 주민들을 만나 당시 상황에 대한 조사 자료에 의하면, 사고 선박은 태풍을 피해 사고 전날 아시베만에 피항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다만 당시 사고 인근에 살고 있었던 닛시라는 사람의 편지에는, 거센 태풍으로 선박을 묶어 두던 줄이 끊어지면서 전복된 것이라는 주장이제기되어 있다. 닛시의 편지에 따르면 정박 중 여자, 노인, 아이들 등 일부 조선인 승선자들은 배에서 내려 동네에서 제공하는 식사를 하기도 했다. 그 뒤 기상이 악화돼 배를 좀 더 안전한 곳으로 옮겨뒀음에도 불구하고 피해를 입고 말았다는 것.

이와는 전혀 상반된 주장도 있다. 민간 자율방범대 성격의 '자경단'이 태풍을 만나 피난차 이 섬에 온 조선인들의 상륙을 막았다는 증언도 있다. 당시 경찰당국은 귀국길에 오른 조선인에 대한 주위를 당부하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따라 여자, 아이, 노인 등 일부만이 육지에 발을 디딜 수 있었고 대부분은 선박에 승선한 상태에서 태풍에 내몰렸다는 것. 난파 경위 또한 추후 사실 조사가 필요한 부분이다.

"강제동원 명부 일본정부가 공개해야"

"'일제감정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위원회'에 신고한 피해자가 20여만 명에 이르지만 피해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중 30%도 안 된다고 들었습니다. 나머지 70%가 넘는 사람들의 피해 사실을 증명하려면 일본정부가 이 명단을 공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시베만 조난선 사건 생존자를 찾기 위해 한국을 방분한 하나후사 도시오 '일본 전후책임을 묻는 관부재판을 지원하는 회' 사무국장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 해결에 있어 일본 정부의 책임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일본 정부는 올해 정부가 당시 일본 기업에서 고용한 조선인 명부를 밝혀달라는 요청에 대해 108개 기업이라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에 대해 "강제동원 진상규명 네트워크가 확인한 자료에 의하더라도 200여곳이 넘는다"며 "탄광회사와 같은 경우 일부 없어진 기업도 있지만 108개밖에 안된다고 하는 주장은 완전히 기만"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일본 정부가 지방자치단체에 일제 강점기 조선인 피해자들에 대한 유골조사를 의뢰하면서도 필요한 인력과 예산을 지원하지 않아 이번 조사가 얼마나 제대로 됐는지 의심스럽다"며 "화장이나 매장 증명서를 찾으면 당시 사망자의 인적 사항이나 사망 원인에 대해 알 수 있을 텐데, 강제동원 진상규명 네트워크에서 증명서를 찾아달라는 요청에 응한 지방정부는 단 한곳도 없었다"고 일본 정부의 무성의를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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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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