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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성산, 백두산
민족의 성산, 백두산 ⓒ 조선출판
작가는 아는 것만큼 쓴다

‘2005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문학작가대회’는 분단(분렬) 이후 처음으로 남북 작가들이 만나서 조국통일의 방안을 모색하는 대회로 그 의의가 자못 컸다. 지난 2004년 여름에 예정되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광복 60돌인 올해 열리게 되었다.

오랫동안 공들인 탓인지 집행 실무진들이 북측과 잘 교섭하여 대회 내용 못지않게 여정과 장소도 알차게 잘 잡았다. 유서 깊은 고도 평양, 민족의 성산 백두산, 산이 기묘하고 향기가 드높다는 묘향산에서 대회를 치렀다. 북측 안내원조차도 이번 코스가 북측 산하의 진수만을 가려 뽑았다고, "장군님께서 남녘 작가 선생님들을 최고로 우대하신 모양"이라고 말했다.

오늘(2005. 7. 22)은 평양 순안 비행장에서 비행기로 삼지연 비행장까지 간 뒤, 다시 백두산 아래 배개봉 호텔까지 가는 여정이었다. 비행기가 소형이라서 대회 참가단 전원을 한꺼번에 나를 수 없기에 1진 2진으로 나눠서 출발한다고 했다. 나는 2진으로 출발하기에 조반 후 시간 여유가 다소 있었다.

이길융 선생이 호텔 구내 서점에나 들러보자고 하여 그곳으로 갔다. 책의 인쇄나 제책 솜씨는 남녘의 1960년대 수준이었다. 나로서 가장 탐나는 책은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이었다. 1999년 연길에서도 만지작거리다가 끝내 포기했다.

그런데 1930~40년대 독립운동사, 특히 동북항일연군을 알려면 꼭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하얼빈에 갔을 때 김우종 선생도 극구 추천하였지만 그때도 만작거리다가 왔다.

값을 물었더니 권당 5유로로 모두 40유로라고 했다. 책값은 비싸지 않았지만 망설이다가 끝내 사지 않았다. 나란 참 졸장부다. 귀국 공항에서 나 때문에 집행부에 누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작가에게 자료는 생명이다. 그야 말로 작가는 ‘아는 것만큼 쓰게 마련’이다. 잘 알지도 모르고 뜬소문이나 유언비어만 듣고 사실인 양 글을 쓴다면, 이는 작가정신을 망각한 처사로 크나큰 죄를 짓는 일이다.

우리 속담에 “알아야 면장을 한다”고 하였다. 제대로 알아야 글을 쓸 수 있다. 그래야 시비선악도 가릴 수 있다. 그래도 지금은 많이 나아졌으나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학문과 사상, 양심의 자유를 옥죄는 법이 살아 있다. 우리나라가 문화 선진국이 되려면 학문과 사상, 양심의 자유를 방해하는 여러 법규나 올가미도 풀어야 한다. 자본주의 종주국 영국이 칼 마르크스의 망명을 받아들이고, 그에게 대영박물관에서 <자본론>을 집필케 하였다는 사실을 깊이 음미해 볼 일이다.

평양의 모란봉
평양의 모란봉 ⓒ 조선출판
조선작가동맹 김병훈 선생

10: 00, 비행장에 가고자 버스에 올랐다. 나는 늘 뒷자리에 앉았는데 이번은 앞자리에 앉았다. 곧이어 북녘 작가들도 우리와 동행코자 버스에 올랐다. 나이 지긋이 드신 어른이 버스에 오르기에 일어나서 옆 자리에 모셨더니 당신이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장 김병훈(76) 선생이라고 당신을 소개했다. 선생의 개막 연설도 들어봤지만 그때 마이크가 먼 곳이라서 얼굴은 전혀 기억에 없었다. 북녘 문단에서 가장 어른이었다. 초면인데도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

조선작가동맹 김병훈 위원장(왼쪽)
조선작가동맹 김병훈 위원장(왼쪽) ⓒ 박도
초기에 당신이 만주벌판의 항일투쟁을 주제로 쓴 <준엄한 전구>라는 소설 작품을 수령님이 읽어주시고 격려를 받았다고 했다. 수령님은 문학작품, 특히 소설을 좋아하셨다면서 고골리의 <외투>, 고리키의 <어머니>, 루쉰의 <아큐정전> 등에 감동을 받아서 혁명가의 꿈을 키웠다고 하였다. 그런 탓으로 수령님은 작가들을 가장 귀하게 여기셨고, 장군님도 문학 예술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 주신다고 칭송이 자자했다.

북에서는 작가가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창작에만 전념한다면서 나라에서 기본 생활비가 나오고 원고료와 인세는 따로 받는다고 자랑하였는데, 얼마나 받느냐고 꼬치꼬치 되묻지 않고 듣기만 하였다. 당신 가족은 부인과 딸 아들 네 남매를 두었는데, 모두 출가해서 지금은 부인과 둘이서 지낸다고 하였다.

내 고향을 묻기에 '경북 구미'라고 말하자, 일제시대 당신 아버지가 철도원으로 복무하여서 경북 김천에도 산 기억이 있다면서, 구미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어린시절 김천역 석탄하차장에서 석탄으로 장난을 많이 한 때문에 검둥이로 지냈다는 추억담도 말씀하였다. 나도 외가와 고모댁이 김천이라서 자주 다녔기에 김천역의 석탄하차장은 눈에 선하다고 하였더니 옛 사람을 만난 양 더욱 반가워 하였다.

당신은 나이가 드신 탓으로 한국전쟁과 이산가족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고 있었다. 1971년 삿포로 동계올림픽 때 북한 선수 한필화와 남녘의 오빠 한필성의 사연도 이야기해서 나도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던 터라 서로 호응이 잘 되어 이야기가 냇물처럼 잘 이어져 갔다.

보현사 뜰에서 바라본 묘향산 멧봉우리들
보현사 뜰에서 바라본 묘향산 멧봉우리들 ⓒ 박도
전쟁 당시에 북에서 남으로 피난 간 이 가운데 미군이 원자탄을 떨어뜨린다는 소문 때문에 단지 며칠 피한다고 떠난 이가 대부분이었다면서, 며칠이 그새 50년을 넘겼다고 안타까워 하셨다.

내가 쓴 작품명을 물었다. 첫 작품이 비전향장기수의 딸과 해직기자와의 순애보를 쓴 <사람은 누군가를 그리며 산다>라고 하자, 우선 제목이 너무 좋다고 했다. 당신도 칠십을 훨씬 넘겼지만 여태 ‘그리움’에 산다며 꼭 읽어보겠다고 볼펜을 꺼내 명함 뒤에다가 작품이름을 또박또박 적었다. 마침 이번 방북 길에 한 권 가져왔는데 안내원에게 전하겠다고 하였다.

10여 년 전에 썼지만 작품이 널리 읽히지 않았다고 하자, “작품이 좋으면 언젠가는 세상 사람들이 알아준다”고 말하면서, 마치 아버지가 자식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듯 하였다. 남쪽에 돌아가서 조정래 선생 만나면 꼭 당신이 <태백산맥> 잘 읽었다는 말을 전해 주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태백산맥>은 아주 공들여 쓴 작품이라고 칭찬을 거듭하였다.

잠깐 새 버스가 평양공항에 닿았다. 원로 작가는 남녘 후배 작가에게 악수와 함께 한 마디 남겼다.

"작가는 인민을 감동시켜서 인민을 바른 길로 이끄는, 시대를 앞서 가는 사람입니다."

백두산에서 내려다 본 구름바다
백두산에서 내려다 본 구름바다 ⓒ 박도
7천만 겨레가 조국 땅을 밟고서 백두산에 오를 그날

이틀 만에 다시 보는 평양 공항은 첫날과는 달리 서먹함도 감정의 미묘함도 덜 했다. 사람은 자주 만나야 하는 보다. 그래야 서로 간에 얼어붙은 마음도 녹게 마련인가 보다.

삼지연 행 비행기 앞에서
삼지연 행 비행기 앞에서 ⓒ 박도
평양공항 일대는 뙤약볕만 내리쬘 뿐 적막강산이었다. 백두산 삼지연 행 비행기는 프로펠러가 달렸다. 저 비행기를 타고 내 조국 산하를 밟으면서 백두산에 오른다니 가슴이 벅찼다.

1999년 여름, 연길에서 출발하여 어랑촌 청산리를 거쳐 백두산에 오른 뒤 귀국하여 쓴 항일유적답사기 <민족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에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정말 두고 떠나기에 너무나 아쉬운 장엄한 산하였다. 내 언제 다시 조국 땅을 밟고 항일유적지를 둘러보며 이곳에 와서 저 온천수에 세속에 찌든 몸을 닦으랴(131쪽)”

그 뒤 2004년 5월 31일, 백산 무송을 거쳐 백두산에 올랐고, 이번에는 정말 내 조국 땅을 밟으며 백두산에 오르게 된다. 순간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7천만 겨레가 누구나 마음대로 내 조국 땅을 밟고서 백두산에 오를 수 있는 그날을 위해 휴전선 철조망을 자르는 펜치와 같은 사람이 되리라고 마음 속으로 다짐하였다.

덧붙이는 글 | 그동안 오마이뉴스에 올렸던 인터뷰 기사를 모아서 도서출판 '새로운사람들'에서 <길 위에서 길을 묻다>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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