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세계의 과거사 청산>
<세계의 과거사 청산> ⓒ 푸른역사
광복 60주년을 맞이한 최근의 한국 사회에서는, 요즘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분주하다. 현 정부가 출범 초기부터 공공연하게 밝혔던 과거사 청산에서부터 중국-일본 등 동아시아의 정치·사회적 이해관계와 연결된 역사 왜곡 논란에 이르기까지. 21세기의 대한민국에 있어서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기억이기에 앞서, 지켜야 할 정체성이며 찾아야 할 권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역사의 상처를 간직한 국가가 대한민국만은 아니다. 2차대전의 전범국가였던 독일에서부터 피해국가였던 프랑스, 프랑코 군부 독재를 체험했던 스페인과 남미의 칠레, 아르헨티나 등 우리에게도 친숙한 수많은 국가들이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고통스러운 역사와 조우해야 했던 과정이 있었다.

20세기에 일제 강점하 식민지 체제와 남북 분단, 동족상잔의 전쟁과 30여 년간의 군사독재 등 역사의 시련들을 고루 체험했고, 그 상처가 오늘날의 사회에 있어서까지 후유증으로 이어지고 있는 대한민국에 있어서 우리보다 먼저 과거와의 대결에 나섰던 다른 민족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겐 중요한 전범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흥미롭게 느껴진다.

<세계의 과거사 청산>은 국내의 대표적인 서양사학자 안병직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를 중심으로 한 연구팀이 2002년부터 2년간 '과거 청산과 문화 정체성의 국가별 사례연구'라는 공동 학술연구의 결과물로 모여진 책이다. 이 책은 독일, 프랑스 같은 유럽 선진국에서부터 남아공, 아르헨티나, 칠레, 스페인,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식민지 수탈이나 침략 전쟁, 군사독재와 같은 어두운 역사를 지녔던 나라가 그 과거를 어떻게 규명하고 극복했느냐를 보여 준다.

그러나 이 책은 우리가 흔히 기대했던 과거사 청산의 바람직한 모델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 입장에 서서 과거와 처리하는 방식은 '그때그때 달라요'라는 결론에 더 가깝다. 어느 국가, 어느 민족이건 간에 자신들만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가치관, 여기에 드러내기 어려운 치부 또한 있는 법이며 현실의 과거사 청산도 어떤 방식이건 이러한 환경적 제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기록은 냉정하게 이야기한다.

우리에게 깊이 알려지지 못했던 사실로 소위 2차대전이 끝난 뒤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 처벌은 자의적 기준으로 새로운 인권 탄압의 문제를 제기했고, 당시 프랑스 드골 정권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악용되었음을 이 책은 지적한다. 반면 전범국가였던 독일에 있어서는 나치 범죄의 책임을 극소수 엘리트 집단에 국한함으로써 독재 정권을 용인한 대다수 국민들에게 면죄부를 주었을 뿐 아니라, 독일 국민 스스로 역사에 대한 주체적인 청산의 기회를 배제해 버렸던 역사를 지적한다.

과거 청산의 오류는 대개 권선징악적인 명분론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현실은 선악을 명쾌하게 구분짓기 어려울 뿐더러 오히려 과거청산이 모종의 정치적 목적이나 여론의 과격한 선동주의와 결합했을 때 생길 수 있는 부작용은 실로 엄청나다. 단순히 처벌과 단죄를 통해 과거의 피해의식로부터 대리 만족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치부에 대한 냉철한 성찰과 적극적인 관용을 기반으로, 과거와의 단절이 아닌 미래지향적인 정체성을 수립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반세기가 넘는 오랫동안 친일과 군사독재, 분단 이데올로기의 잔재 속에서 살아 왔던 우리는 종종 과거를 냉정한 현실이 아닌, 감성적인 시선에서 접근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현재의 시선에서 우리가 역사를 평가하지만, 우리가 만들어 놓은 현실 역시 미래의 언젠가는 또 다른 역사의 대상으로 평가 받는다는 점을 고려할 때 명분과 감정에만 입각한 과거 청산은 실제로 한 번쯤 돌아볼 만한 대목이다.

하지만 여기서 경계해야 할 것은 신중론을 빙자하여 무조건적인 성찰과 포용으로 과거에 대한 물타기를 하려는 일부 여론의 속성이다. 실제로 이 책에서는 전반적으로 중립을 지키는 듯하지만, 우리의 역사와도 비슷한 선례를 가지는 '프랑코 독재' 처벌방식을 통해, 집단적 망각을 택한 스페인 국민의 과거사 청산을 은근슬쩍 옹호하는 느낌을 준다.

정치적인 목적이 얽혀져서 집단적 파국을 막기 위해 공통의 침묵을 택했다는 스페인의 처리 방식은 그들 나름대로는 합리적인 선택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과정을 지켜보는 우리에게는 그 어떠한 '정의'나 '명분'도 정치적 목적과 실리 앞에서 초라해질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보여 주는 것 같아 일견 섬뜩하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히 한 번쯤 우리가 짚고 넘어갈 만한 것은, 과거청산이라는 것이 당장 대중의 반응을 이끌어내기 좋은 이벤트일지는 몰라도 실제로는 그것은 짧은 시간에 마무리 지어지는 것도 아니며 시간의 흘러감에 따라 또 다른 형태의 평가와 정의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역사에 영원한 종결이라는 것이 없듯이, 역사의 해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만큼, 우리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작업에 좀 더 신중함이 필요하다는 의견만큼은 분명 숙고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세계의 과거사 청산 - 역사와 기억

안병직 외 10인 지음, 푸른역사(2005)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