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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사상탑
주체사상탑 ⓒ 박도
쑥섬 혁명사적지에서 은빛 대동강물을 따라 달리던 버스가 잠시 뒤에 머문 곳은 사방이 탁 트인 대동강변에 주체사상탑이 하늘 높게 서 있는 광장이었다. '주체'란 말만 들어도 남녘의 대부분 사람들은 그 말이 뜻한 바도 잘 모른 채 먼저 피하거나 얼른 덮어버리는 말이 아닌가.

주체사상탑은 1982년 4월 15일, 김일성 주석 70돌 생일에 세웠다는데 그 높이가 170미터요, 봉화의 크기만도 20미터나 된다는 크나큰 조형물이었다. 전망대까지 고속엘리베이터로 올라갈 수 있다지만 운행치 않아서 언저리만 살폈다.

탑 뒷면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이 주체사상의 기초입니다."

문장으로만 풀이해 볼 때 얼마나 평범하고 당연한 말이 아닌가. 내가 살아오면서 절실하게 느낀 것은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로, 최근에 펴낸 책의 후기에도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라는 제목으로 "그 어떤 이념도, 사상도, 제도도 사람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나는 주체사상의 기초가 너무 평범한 데 의외였다.

대동강 건너편의 인민대학습당
대동강 건너편의 인민대학습당 ⓒ 박도
내가 듣기로 주체사상을 세운 이가 월남한 황장엽씨라는데, 그 사실을 심기섭 안내원에게 확인 겸 물어보았다.

심 안내원의 얼굴이 금세 벌레 씹은 표정으로 바뀌더니, "어디까지나 위대하신 김일성 수령님께서 말씀하셨던 바"라고 말하면서 조국을 배신한 황장엽은 말도 꺼내지 말라면서, "그는 (황장엽씨를) 용광로에서 쇳물이 녹을 때 나오는 슬래그(찌꺼기) 같은 자"라고 혹평했다.

언저리 경치가 너무 아름다웠다. 대동강물이 마냥 푸른데 건너편 인민대학습당이 궁전처럼 물 속에 드리웠다. 같은 방을 쓰는 이길융 선생과 평소 존경하는 전상국 선생과 함께 기념촬영을 한 뒤 점심을 들기 위해 다시 버스에 올랐다.

규정만 지키면 일없습네다

옥류관 냉면집 앞에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손님들
옥류관 냉면집 앞에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손님들 ⓒ 박도
평양시내는 한산하였지만 대동강변의 옥류관 냉면집은 사람들로 붐볐다. 더운 날 냉면 한 그릇을 먹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이미 예약된 탓인지 곧장 2층으로 안내되었는데, 방 어귀에는 '김정일 지도자께서 다녀간 방'이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먼저 내놓은 녹두지짐과 돼지고기 찜, 양배추 김치로 입가심을 하고 놋대접에 나온 그 유명한 평양 '옥류관 랭면'을 들었다. 보기에도 깨끔하고 맛도 담박했다. 냉면 맛의 비결은 육수에 있다는데 깊이가 있는 맛이었다. 접대원들이 희망자에게는 100그램을 담은 작은 그릇의 냉면을 더 주었는데 그 맛에 반한 일행 대부분 마다하지 않았다. 다시 이곳에 와서 냉면 맛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서 나도 덤을 받아서 그릇을 비웠다.

13시 30분, 오후 첫 관람지는 개선문이었다. 평양의 개선문은 파리의 개선문을 본 뜬 듯한데, 우람해 보이나 세운 지 오래지 않아서 고색창연한 맛은 전혀 없었다. 기둥 왼쪽은 1925, 오른쪽은 1945라 새겼는데 이는 김일성 주석이 고국을 떠난 해와 돌아온 해라고 한다. 그 위쪽에는 다음의 글이 새겨져 있다.

"만주벌 눈바람아 이야기하라 / 밀림의 긴긴 밤아 이야기하라 / 만고의 빨찌산이 누구인가를 / 절세의 애국자가 누구인가를 / …."

평양의 개선문
평양의 개선문 ⓒ 박도
그동안 북에서 가장 자랑삼아 내세우는 것은 김일성 장군의 빨치산 투쟁 경력이고, 남의 지도자들은 그 점에 가장 콤플렉스를 느낀 나머지 그것은 가짜라고 날조하거나 덮어버리기에 급급하였다.

하지만 <동아일보>조차도 당시 보천보 전투 보도기사 동판을 금으로 도금하여 김일성 주석에게 선물로 갖다 바친 물증이 묘향산 국제친선전람관에 전시돼 있으니 누군가 거짓말한 게 틀림없다.

개선문 앞의 교통안전원
개선문 앞의 교통안전원 ⓒ 박도
차라리 모든 역사적 사실은 사실대로 밝히고 시시비비를 따지는 게 더 합리적인 자세로 더 이상 우리 사회에 불신풍토를 조장치 않을 것이다. 그래야 기성세대는 다음 세대에게 매도당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 관람지는 세 곳인 바, 평양산원 지하철 재북 인사 묘소다. 재북묘소 참가는 희망자가 많아서 연장자 순서로 잘라 해당되지 않아서 나는 두 곳 가운데 평양산원을 택하였다. 그래서 1호차 버스로 옮겨 탔다. 버스기사가 약속시간보다 이르다면서 조금 더 머물다가 가자고 하여, 다시 밖으로 나왔다. 마침 우리를 인도하는 교통 공안원들이 앞에 있기에 말을 붙였다.

"남녘에서는 사람들이 교통경찰을 가장 무서워하는데 북녘에서도 그렇습니까?"
"규정만 지키면 일없습네다."


사람 사는 곳은 비슷한가 보다. 어느 사회든 법과 질서만 지킨다면 무섭지 않을 거다. 하지만 그 법과 질서가 합리성과 정당성, 도덕성이 있어야 그 사회 구성원들이 잘 지킬 것이다.

평양산원
평양산원 ⓒ 박도
평양산원

14시 30분, 평양의 날씨도 대단히 뜨거웠다. 섭씨 30도는 웃돌 날씨였다. 뙤약볕 속에 평양산원을 찾았다. 우리 일행 가운데 양자택일 중, 뜻밖에도 평양지하철을 찾는 이가 훨씬 더 많았다. 평양산원을 찾는 이는 15명 안팎이었다.

'김춘희'라는 병원 측의 안내원이 평양산원에 대한 자랑을 잔뜩 늘어놓았다. 1979년 4월 30일 착공하여 세계사에 유래 없는(?) 빠른 공사로 1980년 1월에 완공하여 1980년 7월 30일 남녀평등기념일에 문을 열었다고 자랑하였다.

평양산원은 13층의 기본청사와 6개 동의 부속 건물로, 연면적 6만 평방미터로 산원에는 산과 부인과 내과 비뇨기과 구강과 안과 이비인후과 등 여성종합병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라 살림이 어려운 가운데도 나라의 미래를 위하여 김정일 지도자 동지께서 친히 보살펴주신다면서 최신 고가 의료장비까지 독일에서 수입하였다고 지도자 동지에 대한 자랑이 끝이 없었다. 1500개의 병상으로, 산과 540개 부인과 460개, 소아과 500개 등이 마련되었다고 했다.

진료실 곳곳에도 지도자 동지께서 친히 방문하였다는 붉은 팻말을 출입문 위에다가 붙여 놓았다. 그러면서 당신네들도 '인민을 위하여 복무'한다고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인민을 위하여 복무한다'는 구호는 달리는 평양시내 전차 옆에도 걸렸고, 북녘 곳곳에도 걸려 있었다.

신생아실의 세쌍둥이들(노란 배냇옷과 포대기는 남자아이, 분홍색은 여자아이)
신생아실의 세쌍둥이들(노란 배냇옷과 포대기는 남자아이, 분홍색은 여자아이) ⓒ 박도
안내원은 방과 층을 옮겨 다니면서 판에 박은 자랑을 늘어놓기에 아주 이력이 나 있었다. 마침 한 진료실에서 산모가 초음파 검사를 받고 있었다. 담당의사가 60대로 진지해 보였다.

그래서 내가 "의사 선생님이 권위 있는 분 같다"고 하였더니, "선생님, 눈썰미가 대단하십니다. 저 분이 바로 강효식 박사님으로 세계적인 의학 권위자"라고 안내원이 말하자, 강 박사가 마스크를 쓴 채 나에게 목례를 하였다.

"북조선에서는 남자아기를 더 좋아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똑같이 아들 딸 귀중하게 여깁니다. 나라에서 다 키워주기 때문입니다."

"자녀수를 국가에서 간섭치 않습니까?"
"전혀 간섭치 않습니다. 그전에는 많이들 낳았는데 최근에는 젊은이들이 대부분 하나나 둘로 적게 낳는 추세입니다."

"북조선 가정에서는 여권이 더 세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집안의 기둥은 역시 남자입니다."

그 말에 일행 모두 크게 웃었다. 안내원도 따라서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남자들은 기둥이 있지요."

안내원은 조산한 아이방도 보여주고 세쌍둥이 아이방도 보여주었다. 신생아 가운데 남자아이는 노란 배내옷에 노란 포대기인데 견주어 여자아이는 분홍색 배내옷에 분홍색포대기를 덮고 있었다.

또 다른 방에는 산모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다. 모자의 건강을 위하여 가능한 모유를 수유한다고 설명하면서 어디까지나 산모의 희망에 따라 1인실 2인실을 쓰는데, 산모들이 2인실을 더 희망한다고 말하였다.

안내를 마치면서 더 질문이 없느냐는 당당한 태도에 내가 물이 먹고 싶다고 하자 그는 적이 당황하는 눈치더니, 곧 한 빈방으로 안내하고는 신덕산 샘물 병을 갖다주어서 우리 일행 모두 갈증을 풀었다.

평양산원 관람을 마치고 그분들의 환송을 받으며 버스에 오르는데 이경자(소설)씨가 귀엣말을 하였다. 당신이 보기에는 아이도 산모도 영양이 부족해 보이고 모든 게 궁색해 보이는데 내가 물을 청해서 그들이 당황하는 걸 보고 민망해서 혼났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동포애로 좀 더 많이 북을 도와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였다.

듣고 보니 내가 눈치 없는 행동을 한 것 같아서 잘못을 깨우쳤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 아닌가. 그저 난 손님으로 물 한 모금 정도는 가볍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로부터 물 한 모금에 더 정이 간다고 하지 않는가.

다음 관람지는 만경대 학생소년궁전이다. 거기로 가는 길에 건너편 자리에 앉은 낯이 선 안내원이 나에게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북조선에서는 이 모든 시설을 사용하는 데 돈 한 푼 내지 않는다고 자랑하였다.

"선생님, 우리 평양산원을 둘러보신 소감이 어떠십니까?"
"사회주의 국가의 복지정책이 '요람에서 무덤까지'라고 알고 있는데 요람 시설이 훌륭하군요."

그러자 그는 나의 말꼬리를 잡고 남조선의 산아에 대해 꼬치꼬치 물었다. 그 물음 속에는 은연중 북조선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속내가 비쳤다.

"남녘에서는 산모의 형편에 따라 병원과 병실을 선택합니다. 부유층에서는 특실도 쓰고, 가난한 이들은 2~3인용도 씁니다. 그 전에는 돈이 없어서 집에서 낳는 이도 있었는데, 요즘은 의료 보험혜택을 받기에 집에서 낳는 산모는 거의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한 산모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한 산모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 박도
나의 답변에 그는 북조선은 돈 한 푼 안 낸다는 것과 누구나 전혀 차별 없이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고 거듭 강조했다. 나도 그의 말꼬리를 잡자 서로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병원비가 무료고 크게 차별이 없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지도자 가족이나 당 간부 가족과 일반 노동자의 가족과는 다소 차별이 있을 거다'라는 논점이었다.

그는 줄곧 누구나 조금의 차별도 받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나는 '아무리 사회주의지만 지도자 가족이나 당 간부 가족에게는 의사나 간호원이 대하는 태도가 조금은 달라도 다를 거다'라는 논쟁이었는데, 그도 나도 지지 않고 논쟁을 벌였다.

"박 선생, 더운 날씨에 씰데없는 논쟁 그만 하시오."

앞자리에 앉아서 우리의 논쟁에 짜증이 나셨는지 김원일(소설) 선생의 일갈에 그도 나도 입을 닫았다. 그새 버스는 학생궁전 앞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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