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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효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15살이면 43년이고 근데 저는 1944년이라고 쓰고 말았네요. 창씨개명된 것도 찾아보려했지만 결국 찾을 수 없었답니다. 큰아버지도 기억이 가물가물 하신데 인우보증을 하시면서 두분 성함을 알려주셨답니다.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15살이면 43년이고 근데 저는 1944년이라고 쓰고 말았네요. 창씨개명된 것도 찾아보려했지만 결국 찾을 수 없었답니다. 큰아버지도 기억이 가물가물 하신데 인우보증을 하시면서 두분 성함을 알려주셨답니다. ⓒ 김규환
나: 무슨 강인디라우?
아버지: 두만강이제. 두만강은 백두산 천지에 이무기가 산다는 것이여. 긍께 비가 오나 맑으나 우게서 움직인께 물이 우리 동네맹키 맑지가 않아. 용인디 뭔지 엄청나게 큰 호수에서 출렁거린께 늘상 아래는 흙탕물이여. 김정구가 부른 ‘두만강 푸른 물에~노 젓는 뱃사공’ 노래에 나오는 두만강이 푸르다는 것은 거짓이고 뱃사공도 볼 수 없제. 고건 그렇고 그날 우린 두만강으로 갔다. 거그서 다급하게 훌러덩 옷을 벗고 허리띠를 풀어서 머리에다 동여맸다. 셤(헤엄)을 치기 시작했제. 뽀로(곧바로) 강을 가로질러 앞으로만 나아가믄 금방일 성 싶제. 근디 물살이 얼매나 거센지 건너편에 도착한 건 1km나 아래였다.

어머니: 아따 또 그 야그요? 골백번도 더 듣는 갑소. 인자 그만 드시고 아들 냘 핵교가야헝께 그만 재우싯쇼.
아버지: 아따 이사람아 헐 이야근 다 혀야제. 인자 지대로 헐라고 허구만….

어머니는 말려봤자 쉬 그치지 않을 것이란 걸 알았다. 오늘도 이렇게 무사히 넘어가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나: 갹꼬 어처캐 됐는디라우?
아버지: 그 때 다리 우게는 일경들이 총을 들고 서 있었제. 근디 흙탕물에 밤에 건더분께 보여야 말이제. 무사히 건넜다. 만주 땅에 내린께 거근 온통 흙뎅이가 까맣드라. 그래각고 만주사람 집에 들어가서 사흘 동안 일을 거들어 주니께 강냉이밥을 많이도 주드라. 일단 속이 대리지(아리지) 않은께 좋아. 실컨 먹으니가 정말 배불렀제. 고렇게 거그서 눌러 살아불라고 했어.

나: 근디라우?
아버지: 나흘 째 순사들한테 잽혀부렀다. 다시 다리를 건너 탄광으로 갔어. 그 뒤로 쇼와(昭和) 20년이던가 천왕이 항복 선언을 할 때까장 살았제 뭐. 여기서 부터는 니기 엄씨도 알믄 안 되야.

아버지 목소리가 나지막해졌다.

아버지: 돌아오기 전 해 겨울에 근방에 있는 처녀를 한명 살퀐다. 코가 오똑하고 키도 컸어. 그약꼬(그래가지고) 둘이 혼인하잔 야그도 있었제. 니기 아부지보다 나이가 세살 위였응께 그때 열아홉이였을 것이여. 해방이 된께 한꾼에 가자고 했더니 거길 안 떠난다고 하데. 지복산이(꽤) 이뻤는디….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이었을까? 그런 낯설고 힘든 과정에서도 여자를 사귈 생각을 하다니.

아버지는 두 번이나 나를 긴장시켰다. 아버지가 영영 내려오지 못할 사연이 한번은 그냥 두만강을 헤엄쳐 건너 만주로 도망을 친 것이고 또 한번은 어떤 여인을 만나 정을 나눴으니 하마터면 우리 가족과 내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겠다는 위기감이 스쳐갔다.

나: 글다가 큰 일 날 뻔 했구만이라우?
아버지: 글제 근디 니기 할아부지랑 할매가 아른거린께 두 번 이야기 하고 말아부렀다.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몇날 며칠 말귀를 알아듣기 시작한 뒤로 고등학교 때도 집에 가면 아버지 옛 이야기가 이어졌다. 마치 다른 사람 이야기인 듯, 벽시계 태엽이 풀려 시간이 멈춰버린 듯 아버지는 늘 그 시기부터 여순사건에서 6.25 그리고 빨치산 이야기로 어린 나와 우리 형제자매를 끌어안았다.

어린 나도 기분과 상황에 따라 잔소리나 술주정으로 들렸다가도 때론 <전설따라 3000리>라는 책보다 더 재미있었다. 아버지는 주무시면서도 잠꼬대를 가끔 하셨는데 창씨 개명된 이름을 일본 경찰들이 호출하면 "하이!"하며 몸을 꼿꼿이 세우기까지 했다.

나: 아부지 근디 해방된 것은 어처캐 알았는디요?
아버지: 우리도 몰랐제. 한 사나흘 지났을 때까장은. 근디 며칠 간 전기가 들어오지 않더라. 왜냐믄 김일성장군이 수풍이든 전력발전소마다 폭격을 한다는 소문이 들려왔제. 긍께 일제가 패망한다는 걸 짐작으로만 했을 뿐이여.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갇힌 신세나 다름없는 곳에서 외지 소식이나 천황이 항복 선언을 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고 한다. 다만 다들 집으로 간다는 사실만 알고 몸만 챙겨 집으로 정든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에 정신이 없었다는 말씀이셨다.

아버지: 정신이 없었제. 다들 하든 일을 내팽개쳤어. 그래각고 기차에 몸을 실어서 간신히 나왔다. 근디 벌써 그때 부텀 삼팔선이 갈린다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응께 다들 이남으로 갈라고들 했지 뭐냐. 우린 쌩판 모른 소린디 소련 비행기가 뜨고 이북은 며칠 사이에 김일성 장군이 장악할 것이라는 이야그여.

나: 그렇게 빨랑요?
아버지: 몰러. 근디 소문에 분명히 그랬응께. 그너저나 다들 기차에 몸을 실어 피양까지는 잘 왔다. 역에서 사람들을 태울라고 지달리고 있는디 고새 구름같이 사람들이 몰려들었어. 어떻게든 차에 탈라고 가관이 아니었다. 선반에 올라가 있는 사람허며 간당간당 매달린 사람, 거그다가 지붕에 올라탄 사람까지 개미가 지렁이 한 마리 두고 덩캐덩캐 엉겨붙은 모양이었제. 기적소리가 울리더니 차가 흔들리기도 해서 떨어지기도 했지만 전깃줄에 감전돼각고 떨어져 죽은 사람이 몇 백은 됐을 것이다. 우린 몸이라도 안에 있었응께 그나마 다행이었어.

일제와 태평양전쟁 그 후 드리워진 암울한 기운이 벌써 감지되고 있었다니! 뭔가 남북간 이념대립의 골짜기로 들어서면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휩쓸릴 텐데. 내전이 불을 보듯 빤한 것 아닌가. 나는 전후 세대다보니 그 당시 상황을 꿰뚫을 수는 없었지만 여전히 현실인 듯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아버지: 해주까지는 잘 왔다. 손에 쥔 돈이 여비하라고 째까썩은 있었응께 뭐라도 좀 사묵을라고 헌디 당최 바깥으로 나갈 수가 있어야 말여. 근디 창문 밖으로 사과 파는 사람들이 즐비하더라. 요리조리 돌고 지체하여서 닷새 이상이 걸렸응게 한 8월 20일 쯤 되얏을 것이여. 마침 황주가 그 때도 사과가 많이 났다 그래. 안에서 몇 전씩 손에 쥐고 바꿔 먹었지. 근디 우린 끝까지 버팅겼다. 기차가 살짝 움직이더라고. 돈을 꺼내 주는 척 하믄서 사과 바구니 째 나꿔 챈 것이제. 다들 그렸어. 고 담에 차가 미끄러져 나가부니께 쫒아와봐야 뭔 소용이겄냐?

그렇게 긴 귀향을 했다. 한 눈 팔 생각도 않고 남으로 남으로 향하여 화순역까지 실어다 줬다는 이야기다. 아버지는 17살 9월이 다 되어 집에 도착하였으니 근 보름이나 걸려 집으로 돌아와 다행이었다.

내 열다섯 살, 열일곱 살엔 철부지였다. 학교에 다니며 호강에 초를 쳐서 힘들다며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을 나이다. 중학교에 다녔을 어린 나이에 아버지는 3천리 끝까지 가서 모진 고생을 했을 텐데. 부끄럽기까지 했다. 그 뒤로 이어진 한국현대사 중심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아버지! 이 사회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은 숨기려고 갖은 애를 썼던 모습이 아직도 역력하다.

힘없는 나라에서 태어난 죄,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려다 겪은 한 많은 세월에 누가 보상을 할 것인가. 후선이랍시고 남의 일로만 듣고 재미난 이야기로만 들었지 살아생전 정확한 기록 하나 남기지 못한 내가 미운 건 해마다 광복절이 되면 되풀이해야 하는 작은 고통을 어찌 감내해 낼까.

덧붙이는 글 | 막내아들 혼례를 마친 뒤 얼마 안 된 2000년 추석 이틀 전 아버지는 저세상으로 가셨지만 직접 들은 이야기만으로도 대하소설 하나쯤은 쓸 분량이다. 다시 한번 당신의 모진 역경에 고개 숙여진다. 이 이야기는 개인사가 아닌 오늘 우리들이 있기 까지 지난한 살아있는 역사다. 모든 기억을 되살려 다시 쓸 기회를 가지려고 한다. 이미 두 번 썼지만 여기서 끝낼 수는 없다. 그만큼 애절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당신과 당시 힘겨웠던 삶을 산 분들에 대한 최소한 보상이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과 8.15>에 응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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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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