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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주인이 바뀐지 26년. 옛날 우리집이 있던 자리는 화재로 소실되고 집터만 덩그라니 남아 있습니다.
ⓒ 한명라
제가 태어나고 자란 집은 전북 임실군 오수면 남신동에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봐도 참으로 특이한 집이었습니다.

그 시절 우리집은 일제시대 일본 사람들이 지어서 살았던 집으로, 해방 후에는 아버지께서 근무하던 농협의 관사로 사용되었습니다. 처음에 농협 관사였던 집을 훗날 아버지께서 구입을 하셨는데, 우리집과 바로 뒷집은 그 구조나 크기가 모두 똑같은 집이었습니다.

차츰 차츰 살아오면서 각자가 편리한 대로 조금씩 개조를 했지만, 그 기본 구조는 여전히 닮아있어 우리집과 뒷집은 쌍둥이 집이었습니다.

우리집 앞마루는 앞으로 길게 복도처럼 누워 있었고, 마루 끝에는 미닫이 유리문이 설치되어 있어서 그 당시 주류를 이루고 있던 한옥과는 달리 유난히 유리창이 많았습니다.

안방에는 지금의 붙박이장 같은 용도의 다락이 두개 있어서 방에는 장롱이 없었습니다. 다만 안방과 작은 방 사이에 커다란 대청마루가 가로질러 있었는데, 그 대청마루에 장롱 두개가 사이좋게 마주보고 서 있었고, 쌀 뒤주와 보리쌀 뒤주 두개도 마주 보고 앉아 있었습니다.

옛날 시골집들은 변소 또는 칫간이라고 하여 대부분 대문옆이나 헛간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우리집 화장실은 안방에서 뒷마루 복도를 통하여 실내에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굳이 신발을 신지 않고도 맨발로 화장실을 드나들 수 있었습니다. 간혹 같은 반 친구들이 우리집에 놀러오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온 집안을 구경을 하고 다녔습니다.

집안 구석 구석에는 숨을 곳도 많아서 막내 오빠와 저 그리고 동생은 집안에서도 숨바꼭질을 하며 놀곤 했습니다.

▲ 들판 바로 앞으로 도살장이 보이고, 그 너머로 길게 기찻길이 누워 있습니다.
ⓒ 한명라
우리집 마루 위에 서서 앞을 내다보면, 저만치 멀리 기차가 시도 때도없이 기적소리를 울리며 달리던 기찻길이 들판을 가로질러 길게 누워 있습니다.

그 기찻길을 향해서 봇도랑을 오른쪽으로 끼고 200여m를 가다 보면, 우리 고장에서 하나뿐인 제법 커다란 규모의 도살장이 있었습니다.

그 도살장에는 여러 아저씨들이 다 큰 돼지들을 짐발이 자전거 뒤에 실고 부지런히 자전거 패달을 밟으며 드나들고는 했습니다. 그리고 가끔 덩치가 커다란 황소도 그 도살장에 끌고 와서 잡고는 했지요.

추석 명절이나 설날이 다가오면 유난히 그 도살장 굴뚝에서는 검은 연기가 쉴 새 없이 피어 올랐고, 돼지들의 비명소리 또한 끊임없이 하늘로 울려 퍼지고는 했습니다. 명절이 멀지 않았음이 도살장의 부산한 분위기만으로도 저절로 느껴지고는 했습니다.

순진스러운 커다란 눈을 껌벅이며 끌려가기 싫어 버티던 황소가 억지로 끌려가다가, 어느 때에는 밧줄을 끊고 도망을 쳐서 온 동네를 어수선하게 뒤죽 박죽을 만들기도 했고, 그런 사건이 일어나는 날에는 동네에서 유별나기로 소문이 난 개구쟁이들 조차 성난 황소의 뿔에 받치게 될까 몸을 사리는, 순식간에 온 동네가 공포의 도가니로 빠져 버리기도 했습니다.

그 도살장 옆 창고와 나란이 연결되어 있는 단칸방에는 어느 일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집에는 저보다 나이가 몇 살 위인 아들 딸도 있었고,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지만 저와 비슷한 또래의 딸도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은, 저와 함께 학교를 다니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튼 그 집의 자녀들은 초등학교조차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일찌감치 대처로 돈벌이를 하러 떠나야 했고, 그 집 아주머니는 도살장에서 나오는 고기나 내장들을 삶아서 커다란 다라(함지박)에 담아 머리에 이고 팔러 다녔습니다. 제법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고장까지 팔러가는지 며칠동안 그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또 한사람,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아저씨가 계셨는데, 동네의 어른이나 아이들 가릴 것 없이 '기바우'라고 부르는 아주 특이한 별명을 가진 아저씨였습니다.

▲ 기바우 아저씨는 냇물 건너 시장통에 있는 주조장으로 막걸리를 받으러 다녔습니다.
ⓒ 한명라
'기바우'라는 별명은 어떤 연유로 불리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기바우 아저씨가 하는 일은 생산적인 일이나 특별한 일이라고는 거의 없었습니다.

단지 그 도살장 주변을 깨끗하게 정리 정돈 하는 일, 그리고 그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일은 하루에도 몇 번씩 노란 양은 주전자를 들고 냇가 건너 시장통에 있는 주조장으로 막걸리를 받으러 가는 일이었습니다.

평소 기바우 아저씨의 얼굴에는 희로애락을 나타내는 아무런 표정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동네 사람들 어느 누구와도 눈인사나 말 한마디 건네지 않던 그 기바우 아저씨는, 막걸리를 받아 오는 길에 주전자 꼭지에 입을 대고 몇 모금의 술을 마셨는지 기분좋게 취했을 때면, 이 세상에서 부러운 게 아무 것도 없다는 듯, 마냥 행복한 표정으로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길가의 풀에게도 술 한 모금 먹으라며 부어 주기도 하고, 흘러가는 봇도랑의 물에게도 술 한 모금 마시라고 찔끔 따라 주기도 했습니다.

기바우 아저씨에게는 하루에도 몇 번씩 술을 받으러 다니는 행위만이 오로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아주 소중한 의미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무슨 재미있는 일이 없는지 놀잇감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동네의 개구쟁이들이 때맞춰 적당히 기분 좋게 취해서 지나가는 기바우 아저씨와 마주칠 때가 있습니다.

그때 개구쟁이들은 합창을 하듯 큰소리로 기바우 아저씨에게 '기바우는 기발나고, 하바우는 하발난다'고 놀려대기도 했지만, 기바우 아저씨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이들의 짓궂은 놀림은 처음부터 아예 듣지도 못한 것처럼 무시해 버리기가 다반사였습니다.

막걸리가 가득 담긴 주전자만이 자신의 소중한 보물단지라도 되는듯 손잡이를 꼭 붙잡고, 세월아 가느냐 나도 간다는듯 갈지(之)자의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도살장을 향하고는 했습니다.

그러던 기바우 아저씨가 어느날, 아주 온순한 황소가 마치 밧줄을 끊고 도살장을 탈출하여 우리 동네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듯이, 분노로 가득 찬 얼굴로 길다란 장대를 들고 고함을 지르며 우리 동네 안으로 쳐들어 왔습니다.

아무리 개구쟁이들이 자신을 놀려대도 못 들은 척 하더니만, 자신에게 커다란 돌맹이까지 던져대며 욕을 하는 데에는 참을 수가 없었는지 아이들을 쫓아 골목길을 달음박질을 치던 성난 기바우 아저씨의 모습은 그때 처음으로 보았습니다.

▲ 어린시절 마음껏 뛰어 놀던 우리집 옆의 골목길.
ⓒ 한명라
처자식에 대한 걱정도 없는 듯 했고, 천하태평으로 하루 하루를 보내면서 오로지 막걸리만을 좋아하며, 그 막걸리를 받으러 가고 오는 낙으로만 살아가던, 동네 사람 그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던, 온순하기 그지없던 기바우 아저씨의 분노는 가히 온 동네사람들의 관심과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고, 오래도록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물론 그 사건이 있었던 후, 어떤 개구쟁이도 감히 기바우 아저씨를 예전처럼 함부로 놀리지 못했음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 이편에서 저편으로 뛰어 넘던 봇도랑. 지금은 그 폭이 작은 수로로 변했습니다.
ⓒ 한명라
하늘을 흘러가는 구름에게도 술 한 모금을 권하고, 흘러가는 시냇물에게도 술 한 모금을 권하고, 길가에 피어 있는 이름모를 꽃 한 송이에게도, 풀 한 포기에도 아주 인심좋게 술 한 모금을 권하던 기바우 아저씨가 그처럼 성난 황소처럼 폭발하여 동네의 골목길을 내달리던 모습이, 지금 세상을 살아가는 저에게 가끔 생각이 날 때가 있습니다.

세상이 내게 부당하게 굴어도, 하고 싶은 말 다 하지 못하고 살고 있지만, 그 부당함을 애써 외면하고 살아가고 있지만, 그 부당함의 도가 지나치면 언제라도 용기 있게 떨치고 일어나서 나 여기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주장할 줄 아는, 그런 용기 하나쯤은 가지고 살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무조건 참는 것만이 능사가 아닌, 어느 누구나 상대방에게 터무니없이 억울하게 무작정 짓밟히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 갈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생각이, 주어진 현실에 아무 문제 일으키지 않고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던 저에게 이따금씩 떠오르곤 합니다.

▲ 지금은 폐허가 된 도살장. 도살장 앞마당은 밭이 되어 콩이 심어져 있습니다.
ⓒ 한명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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