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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을 훔치다> 책 표지
<아름다움을 훔치다> 책 표지 ⓒ 디새집
그가 낸 사진 에세이집 <아름다움을 훔치다>(김수남 글ㆍ사진)는 사회적 냉대와 무관심 속에서도 꿋꿋하게 전통문화를 지켜가던 예인 11인에 대한 글과 생생한 사진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와 마음을 나누고, 그에게 기꺼이 자기 예술의 빛나는 틈새를 보여주곤 했던 그분들은 거의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김금화와 공옥진 두 분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인지 그가 찍었던 흑백사진들은 마치 몇 방울의 눈물처럼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에게 영혼의 틈새를 보여준 예술가들

그의 책 맨 첫머리에 나오는 안사인은 평생 제주도에서 굿판을 벌이며 살았던 심방(무당)이었습니다. 198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71호 '제주 칠머리당굿'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던 그는 무당이 천시되고 굿이 미신타파의 대상이었던 환경 속에서도 스스로 심방임을 자부하며 굿을 지키고 가르치던 제주의 대표적 심방이었습니다.

공옥진(73)씨는 한국의 전통적인 소리에 춤과 재담, 몸짓을 가미한 1인 창무극의 창시자입니다. 오장육부가 뒤틀린 듯한 동작과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관중을 매료시키는 그는 유달리 굴곡진 삶을 살았습니다.

공씨는 여덟 살 무렵 무용가 최승희의 수양딸 겸 심부름꾼으로 팔려가 어깨 너머로 춤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최승희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 공씨는 도쿄에서는 식모살이까지 해야 했고, 미군의 폭격으로 그가 일하던 집이 사라지고 나서야 여수로 돌아와서 해방을 맞았습니다.

거지들과 어울려 문전걸식도 했고 창극단원으로 유랑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삭발하고 출가해 15년간 속세와 담을 쌓고 살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겐 '병신춤'으로 널리 알려진 그는 이제 그가 겪었던 사랑과 결혼, 이혼 등 모든 인생의 고통을 숙명으로 받아들입니다. 아니, 자신의 운명뿐만이 아니라 어쩌면 타인의 고통마저도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춤판에 서면 구천을 떠도는 구슬픈 원혼들이 뿌옇게 나한테 달겨들제. 이승에서 미처 풀지 못한 그네들의 한이 욱신욱신 뼈마디를 옥죄오는 게 육신이 가만 있을 수 없당께"

이동안(1906~1995)은 만일 살아 있다면 제가 가장 만나보고 싶은 예인 가운데 한 분 입니다. 남사당패에서는 살판(땅재주)과 어름(줄타기)를 배웠고 박춘재로부터는 발탈 연희를 배우기도 했던 그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한말 최후의 광대'였습니다. 그렇게 다양한 기예를 갖춘 그였지만 1983년이 돼서야 '발탈'로 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지정을 받았을 뿐이었으니 안타까운 일이지요.

우리는 흔히 승무하면 한영숙류나 이매방류 승무를 떠올립니다만 이동안도 승무도 꽤나 잘 췄다고 합니다. 그가 승무를 추는 모습이 담긴 한 장의 사진을 바라보니 그가 추던 승무는 어떠했을까 궁금해지더군요.

김금화 만신과 황해도 내림굿의 한 장면
김금화 만신과 황해도 내림굿의 한 장면 ⓒ 김수남
"꿈결 같은 세상살이 헌신같이 버리고, 사람 죽어 범이 되고 범은 죽어 꽃이 되네…."

서해안 배연신굿과 대동굿 예능보유자인 김금화. 그는 삶과 죽음, 고통과 환희, 좌절과 희망 등을 흐드러진 굿판을 통해 풀어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그가 굿을 펼치고 있는 흑백사진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혼백이 빨려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모르긴 해도 굿이란 산 자와 죽은 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일 겁니다. 살아서 못다한 이야기를 죽은 자는 무당의 공수를 빌어 풀어냅니다. 그렇게 해서 산자와 죽은 자는 화해합니다.

우리가 굿을 한낱 미신으로만 치부해버리기에는 우리 문화에서 굿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결코 작지 않다는 걸 생각하게 됩니다. 굿장단에 맞추는 살풀이춤도 바로 굿에서 나왔고 음악과 창, 무용 등 모든 전통예술이 굿에서 갈라져 나왔기 때문이지요.

서편제와 동편제를 넘나들던 김소희 명창이야 다 아실 겁니다. 소리 세계뿐 아니라 실제 생활 속에서도 단아함을 잃지 않았던 명창 김소희에게는 애제자들이 잇따라 실연으로 자살하고 지병으로 요절한 아픈 사연이 숨어 있었더군요.

무당 집안에서 태어나 살풀이춤의 대가가 된 김숙자씨는 일제강점기 굿이 금지된 탓에 토굴 속에 숨어서 아버지에게 무당과 광대에게 필요한 춤과 소리를 배워야 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배운 춤과 굿이었지만 굿판에서의 춤은 열다섯 살 때가 마지막이었고 그 후로는 무대의 무용가가 돼야 했습니다. 김숙자의 춤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제자들이 추는 도살풀이춤을 본 적이 있습니다. 긴 수건을 부여잡고 추는 춤 동작들이 살풀이춤보다 훨씬 스케일이 크고 강렬하더군요.

김숙자의 딸은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한 여인으로서나 어머니로서의 삶은 편안치 못했어요. 그러나 춤꾼 김숙자는 독특한 선을 지닌 살풀이를 이름과 함께 남겼지요. 춤이나 예술이 자신이 살아온 삶의 한 부분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어머이의 춤에는 한 맺힌 삶이 녹아들어 보는 이들에게 감동을 주는 게 아닐까요?"

박송암 스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겠지요? 범패(절에서 재를 올릴 때 부르는 소리)의 대가 박송암 스님은 대한제국 말 개화파 박영효의 손자였답니다. 그는 대처승이 되어서도 이발사와 양복점 직원 등을 전전했습니다. 그러다가 봉원사에서 월하스님으로부터 범패를 배우게 되지요.

참다운 범패는 깊은 계곡에서 들려오는 범종 소리와 같고 천파만파의 파도를 그리되 속되지 않고, 장인굴곡하고 일자다음하여 유장하고 심오한 맛이 있어야 한다."

바로 그의 범패 소리가 그랬습니다. 속되지 않고 마음 속 번뇌를 다 씼어가는 듯한 청량한 소리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범패가 부처님께 바치는 소리 공양의 일종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돼야 마땅하겠지요.

"춤은 몸으로 추는 것이 아니라 넋으로 추는 것이다. 그것은 뼈 마디마디에서 우러나와야 한다"라고 했던 한영숙. 그는 승무와 살풀이, 학춤 등 우리나라 전통무용의 맥을 잇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을 뿐 아니라 조지훈의 시 <승무>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던 진정한 춤꾼이었습니다.

그밖에도 이 책에는 강릉 단오제 예능보유자인 무녀 신석남, 망부가 <눈물이 진주라면>으로 유명한 가야금 산조의 명인 성금연, 집안일은 부인에게 맡겨둔 채 씨름판, 윷판, 소싸움판, 장기판, 투전판 등의 놀이판을 찾아 유랑생활을 했던 밀양 백중놀이의 보유자였던 하보경 등이 나옵니다.

피사체와 한 몸을 꿈꾸던 카메라

책의 발문을 썼던 연세대 김인회 교수는 사진가 김수남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자기가 만나는 대상에 대해 전인격적으로 몰입하고 대상이 속해 있는 세계 속으로 빠져들어가 주관과 객관의 차이가 무의미한 상황을 체험하려 한다. 동시에 열광하고 감동하는 자기의 예민한 감수성을 감추려 하거나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천대받으며 힘들게 살아온 무당이나 예인들, 산골이나 어촌의 민초들 삶의 상황과 정서 속으로 자기가 먼저 빠져들고, 정에 겨워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바로 사진가 김수남의 모습인 것이다."

김수남은 카메라의 렌즈를 들이대기 전에 먼저 피사체의 마음을 열고 싶었던 게지요. 그래서 그는 촌부들과 탁주 한 잔을 마시고 그들이 마음을 열기 전에는 결코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피사체와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일체화를 꿈꾸었던 것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전통 예인들은 거의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 이런 분들의 예술적 향기를 맛볼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난의 한 시대를 자신의 예술만을 품에 안고 살아가던 예술가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쓸쓸하기만 합니다

내가 미처 알기도 전에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알기는 했지만 무심히 지나쳐 버린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치 뉘우침처럼 가슴을 메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책이름 : <아름다움을 훔치다> 
저자 : 김수남
출판사 : 디새집
값:9.500원


아름다움을 훔치다 - 김수남이 만난 한국의 예인들

김수남 지음, 디새집(열림원)(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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