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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중한을 즐기는 정기영 선생. 그의 옹골찬 눈빛이 4년 만에 400년을 뛰어넘었나보다.
망중한을 즐기는 정기영 선생. 그의 옹골찬 눈빛이 4년 만에 400년을 뛰어넘었나보다. ⓒ 정기영/이동환
틈 날 때마다 블로그를 방문해 이모저모 살피면서 호기심이 더해갔다. 사진으로 봐서는 예사롭지 않은데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확신할 수가 없었다. 잉걸아빠는 궁금하면 반드시 해결해야만 직성이 풀린다. 안 그러면 거의 미쳐버리는 앙바라진 성격 탓에 급기야 경남 진해시까지 내려가 보기로 결정하고야 말았다.

지난 8일(월) 아침, 잉걸아빠는 경남 진해시 가주동 590번지에 있는 '웅천도자기연구소'까지 찾아갔다. 부산까지 마중 나온 정기영(57) 선생을 처음 본 느낌은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 녹록한 인사가 아니었다. 내가 제일 궁금한 것은 오랜 세월 교육자로서 미술을 가르치던 사람이, 창원시 초대의원까지 지냈던 이가, 아들 며느리 손자에 아내랑 부족함 없이 잘 살던 사내가, 왜 웅천막사발 복원에 사재를 털어가면서까지 나섰는가 하는 점이었다.

잉걸아빠는 이 웅천막사발 복원 1호를 만지고 보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집념의 산고가 과연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깨달았다.
잉걸아빠는 이 웅천막사발 복원 1호를 만지고 보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집념의 산고가 과연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깨달았다. ⓒ 정기영/이동환
왼쪽 위, 일본인들이 싹 훑어간 옛 도요지 구석구석 안 뒤진 데가 없단다. 일본인들이 손 못 댄 바위틈과 굴속까지 파헤쳐 결국 귀중한 자료인 파편들을 모아들였다. ▲ 오른쪽 위, 복원 2호. ▲ 왼쪽 아래, 복원 3호. ▲ 오른쪽 아래, 복원 4호.
왼쪽 위, 일본인들이 싹 훑어간 옛 도요지 구석구석 안 뒤진 데가 없단다. 일본인들이 손 못 댄 바위틈과 굴속까지 파헤쳐 결국 귀중한 자료인 파편들을 모아들였다. ▲ 오른쪽 위, 복원 2호. ▲ 왼쪽 아래, 복원 3호. ▲ 오른쪽 아래, 복원 4호. ⓒ 정기영/이동환
고려차완 형태를 재현한 작품(복원 5호). 질박한 아름다움이 숨구멍 하나하나에 녹아있다.
고려차완 형태를 재현한 작품(복원 5호). 질박한 아름다움이 숨구멍 하나하나에 녹아있다. ⓒ 정기영/이동환
왼쪽 위부터 복원 6, 7, 8, 9호. 재현 작품 오른쪽에 놓인 것들이 400여 년 전 파편이다.
왼쪽 위부터 복원 6, 7, 8, 9호. 재현 작품 오른쪽에 놓인 것들이 400여 년 전 파편이다. ⓒ 정기영/이동환
왼쪽 위, 복원 10호. ▲ 오른쪽 위, 400여 년 전 도공들이 불교가 아닌 다른 신앙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십자문양.
왼쪽 위, 복원 10호. ▲ 오른쪽 위, 400여 년 전 도공들이 불교가 아닌 다른 신앙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십자문양. ⓒ 정기영/이동환
왼쪽 위, 경남 진해시 가주동 590번지에 위치한 정기영 선생의 연구소.
왼쪽 위, 경남 진해시 가주동 590번지에 위치한 정기영 선생의 연구소. ⓒ 정기영/이동환
오른쪽, 경상남도 공예품 대전에서 입선했을 때(05/06/23).
오른쪽, 경상남도 공예품 대전에서 입선했을 때(05/06/23). ⓒ 정기영/이동환
- 왜 웅천막사발 복원에 나섰나? 무슨 계기로, 언제부터인가?
"창원시 초대의원으로 봉사하던 때 일본인들이 현지인 세 명을 고용해 웅천 옛 도요지를 훑으며 파편들을 깡그리 긁어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 현장에 가서 그 처참한 지경을 목격하게 됐다.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때부터 웅천막사발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복원에 나선 것은 만 4년 전부터다."

- 평생 걸어온 도예가도 아닌데 복원이 어떻게 가능한가?
"나는 미술을 가르쳤다. 또 도자기에 관심이 많았기에 물레 정도는 너끈히 다룰 줄 알았다. 더구나 나는 복원설계 기술이 있다. 어릴 때부터 도예가로 성장한 사람만 복원 자격이 있나? 관건은 집중과 열정이다."

- 공감한다. 기자가 여기 내려오기 전에 알아본 바로는 우리나라 일부 문화계 풍토가 자신들이 정한 어떤 '루트'를 통하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다 그러지는 않으리라). 사실, 그들이 정한 루트로 인정받으려면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까지 자기 돈 들여 전시회를 해야 하고 사방팔방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을 초빙해야 하는데 말이 쉽지, 돈 없으면 인정받을 생각 말라는 것과 같다. 어떤가?
"그렇다. 내가 답답해 하는 부분도 바로 그런 점이다. 일본인들이 웅천막사발 옛 도요지를 싹 훑어간 뒤, 내 돈 들여 바위틈과 굴까지 뒤져 그나마 간신히 모아들인 파편 감정을 의뢰해도 반응이 없다. 그 파편들을 연구해 설계도까지 그려가며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끝에 복원에 성공했으니 와서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라고 해도 아예 들은 척도 안 한다. 아마추어가 무슨 복원이냐? 그런 식이다. 와서 보지도 않고 가서 보여주겠노라고 해도 싫단다."

- 많이 힘들고 외로웠을 텐데 가족들은 어떤가?
"다행히 아내와 아들 모두 지지한다. 그리고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외롭지 않다. 처음부터 누가 알아주기를 기대한 것은 아니다. 나 죽은 다음에 후대도 있지 않은가?"

- 기자는 솔직히 말해 선생이 재현한 막사발들을 직접 보고 전율을 느꼈다.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살아 있는 한, 내가 모은 400여 년 전 도공들의 땀과 피가 어린 파편들 하나하나, 원형을 추정해 복원해볼 요량이다.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리고 복원 작품이 쌓이게 되면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있고 평가할 수 있도록 저렴하게 내놓을 생각이다. 실제로 복원 운운하면서 한 점에 어마어마한 돈을 받는 사람들도 있다. 안타깝다."

- 이곳에 직접 와보니 참 외지다. 가족들도 함께 계시지 않는 모양인데.
"아들 내외는 분가해서 살고 있다. 아내는 창원시 원래 집에 머문다. 사나흘에 한 번씩 아내가 밑반찬이니 뭐니 잔뜩 해다 준다. 다행히 인터넷이 들어와 블로그라는 걸 꾸밀 수 있게 되었다. 심심하지 않다. 그러나 거의 컴맹이라 사실 잘 꾸미지도 못하고 관리도 못한다. 타이핑도 서툴러 안부게시판에 답례인사조차 잘 못 남긴다. 오해를 사기도 한다."

- 계획은 아까 들었다. 그래도 끝으로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건강이 허락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그래서 하루에 4km씩 조깅을 한다. 건강해야 그나마 이 일을 할 수 있으니까. 이 일과 관련해 혹 더 상처받는 일이 있더라도 꿋꿋하게 웅천막사발을 복원해낼 것이다."

정기영 선생과 헤어지고 부산역에서 KTX에 몸을 실었다. 이틀거리 취재에 피곤한 터라 금세 잠이 쏟아질 줄 알았는데 말짱했다. 상념 때문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좋아라하는 사람. 자기네 테두리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죽어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풍토를 뻔히 알면서도 묵묵히 웅천막사발 복원에 남은 인생을 건 정기영 선생의 강렬한 눈빛이 좀체 잉걸아빠를 놔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덧붙이는 글 | 정기영 선생의 웅천막사발 블로그 바로 가기 ☜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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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커서 '얼큰샘'으로 통하는 이동환은 논술강사로, 현재 안양시 평촌 <씨알논술학당> 대표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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