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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 아래 핀 더덕꽃. 표정이 아주 화사하지요?
담장 아래 핀 더덕꽃. 표정이 아주 화사하지요? ⓒ 김유자
초롱꽃과의 여러해살이 덩굴식물인 더덕이랍니다. 사물이 보기 흉하게 잇달아 들러붙거나 몰려 있는 모양을 보고 "더덕더덕 붙어 있다"고 하는데 그 말이 혹 더덕의 강한 번식력에서 나온 말인지 모를 일 입니다.

그러나 가까이서 바라본 더덕은 덩굴마다 수많은 꽃들을 달고 있긴 했지만, 지저분하기는커녕 기품이 있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왜 더덕에서 그토록 진한 향기가 뿜어져 나오는지 꽃을 바라보니 저절로 알게 됩니다.

더덕꽃이 예쁘기에 한데 모아봤습니다. 같은 더덕꽃이라 해도 표정이 다 다르지요?
더덕꽃이 예쁘기에 한데 모아봤습니다. 같은 더덕꽃이라 해도 표정이 다 다르지요? ⓒ 김유자
아마도 들꽃이 집안에 피는 꽃보다 아름다운 건 옹기종기 모여 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모여 살며 나의 향기를 날려 보내고, 다른 꽃의 향기를 맡으며 살아가니 그렇겠지요.

들꽃 언덕에서 알았다
값비싼 화초는 사람이 키우고
값없는 들꽃은 하느님이 키우시는 것을

그래서 들꽃향기는 하늘의 향기인 것을

그래서 하늘의 눈금과 땅의 눈금은
언제나 다르고 달라야 한다는 것도
들꽃언덕애서 알았다.

-유안진 시 '들꽃 언덕에서' 전문


벌개미취. 아마 청초하다는 말이 이 꽃보다 더 어울리는 꽃은 없을 겁니다.
벌개미취. 아마 청초하다는 말이 이 꽃보다 더 어울리는 꽃은 없을 겁니다. ⓒ 김유자

벌개미취 흐드러진 간이역쯤 와 있다
흠집 나고 닳아진 나무의자 앞에서
내 모습 참 많이 닮아 편안함이 배어든다

- 이태순 시 '오후 3시' 일부


꽃에게도 일상이라는 게 있다면 삶이 참 따분하고 지루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이상스럽게도 간이역 부근에는 철로를 따라서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벌개미취꽃이 많더군요. 그 꽃무더기를 바라볼 때마다 아, 저 꽃은 시방 여행을 떠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오래도록 그 자리에 멈춰서서 벌개미취꽃의 여행을 배웅했습니다. 어쩌면 내년 이맘때는 벌개미취꽃이 여행지에서 담아온 낯선 향기를 맡을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상사화. 잎은 꽃을 만나지 못하고, 꽃은 잎을 만나지 못하니...
상사화. 잎은 꽃을 만나지 못하고, 꽃은 잎을 만나지 못하니... ⓒ 김유자

말이 곧 절이라는 뜻일까
말씀으로 절을 짓는다는 뜻일까
지금까지 시를 써오면서 시가 무엇인지
시로써 무엇을 이룰지
깊이 생각해 볼 틈도 없이
헤매어 여기까지 왔다
경기도 양주군 화암사엔
절 없이 절터만 남아 있고
강원도 어성전 명주사에는
절은 있어도 시는 보이지 않았다
한여름 뜨락에 발돋움한 상사화
꽃대궁만 있고 잎은 보이지 않았다
한 줄기에 나서도
잎이 꽃을 만나지 못하고
아마도 시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인 게라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마음인 게라고
끝없이 저잣거리 걷고 있을 우바이
그 고운 사람을 생각했다

-정희성 시 '시를 찾아서' 전문


잎이 다 시들고 난 다음에 꽃대궁이 올라오는 상사화. 시인은 아마도 시라는 게 자신과 닿을 수 없는 상사화라고 여기는 모양입니다. 상사화는 이별초라고도 부르고 홀로 사는 스님 신세와 비슷하다 해서 중무릇 혹은 중꽃이라고도 한답니다. 상사화든 이별초든 이름이 쓸쓸하기는 마찬가지지요? 자신의 외로움을 알아달라는 것인지 상사화는 피어 있는 기간이 꽤 길더군요.

'영원한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진 도라지
'영원한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진 도라지 ⓒ 김유자

요요한 초승달 속눈썹
남갑사 끝동저고리
십년수절 청상

보랏빛 꽃잎에
옥맺힌 눈물매듭
심산(深山) 골골이
뿌리로 깊더이다

아으 다롱디리

- 손해일 시 '도라지꽃'


백도라지는 집에서 자라는 도라지랍니다. 산에서 자라는 도라지는 보라색 도라지고요.
백도라지는 집에서 자라는 도라지랍니다. 산에서 자라는 도라지는 보라색 도라지고요. ⓒ 김유자

칠월 장마철
늘피한 도라지밭 좀 봐
모시적삼 흰소매 들어
꽃 이름 일러주는 고모 좀 봐

살았을 적 죄란 죄는
불질러 빻아
죽어서는 온 바다 위
나드릿길 트고
가끔가끔 눈비로나 찾아오더니

장마철
연일 비,
도라지밭에 내려
도라지꽃 좀 봐
고모 좀 봐

흰 소매 푸른 소매
흔드는 것 좀 봐
난 알어, 그 말 뜻
난 알어,
저무는 도라지밭에 비 맞고 섰네

- 이향아 시 '도라지꽃' 전문


'타오르는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진 메꽃. 무척 정열적인 꽃이지요?
'타오르는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진 메꽃. 무척 정열적인 꽃이지요? ⓒ 김유자

무찔레꽃
애기똥풀꽃
시계풀꽃
중얼거리다가
중얼거리다
아, 저것은
메꽃
간들거리는
종꽃부리
폐교된 산골 초등학교
아이들 없는
복도에
대롱대롱
목을 매단
녹슨 구리종.

- 나태주 시 '메꽃' 전문


기품있는 보라색 꽃을 피우는 맥문동꽃. 뿌리가 보리의 뿌리와 같은데 수염뿌리가 있어서 맥문동이라 한답니다.
기품있는 보라색 꽃을 피우는 맥문동꽃. 뿌리가 보리의 뿌리와 같은데 수염뿌리가 있어서 맥문동이라 한답니다. ⓒ 김유자
뿌리에 덩어리처럼 달린 모양이 보리와 같이 생겼다 하여 맥문동이라 한답니다. 겨울에도 푸른 잎이 변함이 없어 겨우살이풀이라고도 하구요. 보랏빛 꽃망울이 올망졸망 달려 있는 맥문동꽃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노라면 알싸한 슬픔을 풍겨져 나오더군요. 미처 지우지 못한 슬픔의 흔적일까요? 꽃이 지고나면 까만 열매를 맺습니다.

'열렬한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진  접시꽃.
'열렬한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진 접시꽃. ⓒ 김유자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눈높음과 영육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 도종환 시 '접시꽃 당신' 일부


해 그림자가 점점 길어져 갑니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지겨우리만치 우리를 괴롭히던 땡볕도 상쾌한 가을 바람에 그 자리를 내주고 물러갈 채비를 할 것입니다. 걱정이 많은 존재인 시인은 자기 마음의 모두를 줄 수 있는 시간이 짧아져 간다고 초조해 합니다.

그러나 시인이 아닌 존재인 저는 다만 제 자신 안에 있는 모든 뜨거움을 한 데 모아서 전 존재를 밖으로 피워낸 저 꽃들처럼 살지 못했던 한 시절이 그렇게 흘러가는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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