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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겉표지
책 겉표지 ⓒ 리브로
도청파문 때문에 지금은 잠잠해진 것 같으나 한때 친일과거사 청산문제는 뜨거운 감자였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어느 선까지 가려내야 할지, 가해자와 피해자를 처벌하고 보상하는 문제는 또 어떻게 해야 할지, 그를 둘러싼 사회적 분열은 어떻게 막고, 그 통합은 어떻게 이루어내야 할지, 그것은 지금까지도 큰 고민거리로 남아 있다.

그 고민거리를 풀 수 있는 해법은 과연 없을까? 있다면 어디에서 그것을 찾아 볼 수 있을까. 세계 여러 나라에서 했던 과거사 청산 방법들을 찾아보는데서 그 실마리를 풀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세계의 과거사 청산>(안병직 외 10인·푸른역사·2005)이란 책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유럽의 독일·프랑스·스페인·러시아, 남미의 칠레와 아르헨티나, 아프리카의 남아공과 알제리 등은 모두 과거청산 문제와 관련하여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는 나라들이다. 따라서 이 나라들의 사례를 비교 분석하는 것은 과거청산 작업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하여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17쪽, 서설)

남아공판 과거청산

이들 나라 가운데 자국 내에서 일어난 내란이나 폭력을 두고 가장 모범이 되게 청산한 나라는 남아공으로 꼽고 있다. 그 까닭은 남아공이야말로 청산과정에서 진상 규명도 잘 했을 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가 화해할 수 있는 통합을 이루어냈다는 사례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사실 남아공에서 벌인 과거사 청산 문제는 '아파르트헤이트' 기간 동안에 벌인 인종차별·억압·탄압정책에 대한 청산이기도 했다. 그것은 '진실과 화해위원회'란 기구를 두어, 1934년부터 말란(D.F.Malan)을 주축으로 한 국민당이 내건 정책에 대한 평가와 함께 청산을 이룬 것이고, 남아공 내에 민주화를 가져온 참된 결실이기도 했다.

다만 남아공에서 행한 처벌은 직접 처벌이 아닌 사면 쪽에 무게를 두었다. 이는 46년 간이나 지배해 온 아파르트헤이트 유산을 당장 뒤집는다면 응당 내란이 일어날 수 있는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해자가 범죄를 시인한 경우에 한해서만 응징보다는 사면 쪽으로 그 처벌 문제를 봉합했던 것이다.

"반세기에 걸쳐 온갖 악행을 자행한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이 선거혁명을 통해 무너진 자리에 다인종이 공존하는 새로운 '무지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동안 '마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철저한 처벌을 표방한다면 간신히 이룬 공존의 기반 자체가 깨질 상황이었다. 이런 딜레마를 풀어내는 타협안이 바로 진상은 낱낱이 밝히되 사면이라는 당근을 집어넣은 남아공식의 해법이었다."(164쪽)

프랑스판 과거청산

그럼 외국에서 가한 침략과 약탈에 대해 청산한 나라는 어느 곳일까. 그 나라가 있다면 어쩌면 우리나라와 그 상황이 맞아떨어지는 까닭에 과거사 청산을 둘러싼 실마리를 어느 정도는 찾을 수 있지 않겠나 싶다.

그 나라는 당연히 프랑스이다. 프랑스는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독일 강점기에 놓여 있었고, 그 4년 기간 동안 수도 파리를 포함하여 국토도 절반 이상이나 점령당했고, 3만 명이나 되는 민간인도 인질이나 레지스탕스 대원으로서 총살당했고, 13만9천 명이나 되는 레지스탕스 활동가들이 독일 강제수용소로 끌려갔고, 그 가운데 7만3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학살당했으며, 65만 명이나 되는 노동자들이 독일 공장으로 끌려가 일해야 했다.

프랑스 사람들은 그래서 그 4년 간에 달하는 기간을 가장 '암울했던 시절'로 기억하고 있는데, 더 치욕스러운 것은 그 기간이 페탱(Philippe Petain)이 저지른 '비시(Vichy) 체제'로서 독일에 대해 협력해 버리는 체제로 존속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프랑스 정부와 국민 모두가 레지스탕스로 똘똘 뭉쳐 독일에 저항하기보다는 오히려 독일에 두 손을 들어줬던 꼴이다.

그래서 드골은 그 대독협력체제를 끊기 위해서 해방 전까지, 밖으로는 레지스탕스와 함께 치열한 대독전투를 벌였으며, 안으로는 대독협력자들을 색출하여 처형하는 숙청작업을 벌였다. 이것이 해방 전에 일어났던 초법적 청산이라 할 수 있다.

해방 후, 1944년 6월부터 11월까지 드골이 이끄는 임시정부가 뿌리를 내리고, 사법기구들이 잇달아 설치됐다. 당연히 숙청에 대한 합법화과 제도화가 뒤따르게 됐고, 점차 초법적 숙청에서 벗어나 사법적 숙청으로 자리 매김 하게 됐다.

그러나 사법적 숙청이 시작되면서 그 처벌 대상자에 대한 범위나 판결이 형평성을 잃게 됐다. 이는 레지스탕스 대원들을 체포하거나 고문 또는 처형에 직접 가담한 군인과 경찰, 민병대원들에게는 무거운 형량을 내릴 수 있으나 그밖에 사람들은 어떤 근거로 가려내야 할지 그 변별력이 정확하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언론계와 문단 활동을 했던 사람들은 대독협력 증거가 뚜렷이 나타나 있는 반면에, 그 당시 활동했던 공무원들과 '경제적 부역자'들은 한편으로는 대독협력자도 일할 수 있었고 또 다른 면에서는 레지스탕스로도 활동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양면성을 가려내기란 참으로 힘든 법이었다.

그런 까닭 때문에 처벌에 대한 불만이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더욱이 처벌 형태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사실로 드러나기 시작하자, 프랑스인들은 처벌을 둘러싼 환멸과 실망감만 안게 됐다. 그만큼 돈이 있거나 누리고 있는 지위정도가 높을수록 재판 절차를 오래 끌 수 있었고, 그에 따른 처벌 법망도 빠져나갈 확률이 높았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독협력자 숙청이라는 프랑스판 과거청산이 과연 성공한 것인가, 실패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은, 그 어느 쪽 답변도 일면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필자는, 일제 35년 간의 과거사 청산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프랑스 과거사 청산의 성과와 의의 쪽에 더 무게 중심을 두게 된다. 해방 후 프랑스의 숙청은, 한 차례 대규모의 사법처벌 물결을 통해 대독협력 행위를 확실히 범죄로 규정하고, 해방 전후의 내전과 무질서를 종식시키고, 아울러 공화주의와 민주주의에 기반한 새로운 체제에 정통성을 부여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106쪽)

경제문제라는 발목이 잡혀도 청산해야 한다

그밖에도 이 책에는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피노체트와 그 정권을 청산한 칠레와, 스탈린 체제 아래에서 테러와 강제 노동을 당했던 그 암울한 과거 역사에 대해 흐루시쵸프와 고르바쵸프 두 시대에 걸쳐 청산했던 러시아, 그리고 '뉘른베르크' 국제전범 법정이라는 외부에 의해 나치청산이 시작돼 점차 자국 내에서 나치청산과 홀로코스트를 동시에 청산해 갔던 독일에 대해서도 밝혀 놓고 있다.

아무튼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는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 하나는 세계 여러 나라들이 과거사를 청산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시기와 그 방법이 달랐고, 그 청산을 해야 하는 배경도 달랐다. 더욱이 내란과 외란으로 일어난 일에 대한 청산 기간과 처벌을 둘러싼 형평성도 달랐다. 그런데도 그들 나름대로 지녀야만 했던 암울한 과거사를 청산하는 데에는 그 모든 나라가 한 뜻을 지녔던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문제점은 그 모든 나라들이 전쟁을 딛고서 일어서야 했던 까닭에, 과거사 청산 문제보다는 경제문제를 더 우선시해야 했던 것이다. 그것 때문에 그 모든 나라들이 과거사 청산문제를 소홀히 처리할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사회 분열 쪽보다는 사회 통합 쪽에 무게중심을 두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던 것이다. 물론 그 경제문제는 과거사 청산을 더 진지하고 올바르게 풀어나가는데 큰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이쯤 해서 이 책을 통해 깨닫게 된 것을 말한다면 그것이 아닐까 싶다. 세계 모든 나라에서 분명하게 실시했던 과거사 청산 문제를 우리나라도 여러 경로를 통해서 더욱 진지하게 풀어나가야 하고, 우리는 이미 시간이 너무나 많이 흘러 응징하거나 사면을 할 수 있는 길이 없는 까닭에 다시는 그와 같은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우리 후손들에게 참된 역사를 성찰하고 일깨우기 위해서라도, 그 친일과거사 청산에 관한 조사와 그 행적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기록해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경제문제라는 발목이 잡히는 한이 있어도, 분열과 통합이라는 걸림돌이 있어도, 정권이 바뀌는 시간까지 흘러가는 일이 있어도, 정말로 진지하고 총체적으로 다루지 않으면 안 될 일이라 생각된다.

세계의 과거사 청산 - 역사와 기억

안병직 외 10인 지음, 푸른역사(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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